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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가 만난 사람] 무술감독 정두홍
김혜리 사진 오계옥 2008-08-22

액션영화가 끓는 점=정두홍℃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시사회에서 정두홍 무술감독을 보았다. 5시 방향 뒤쪽에서 비스듬히. 나의 자리는 극장의 맨 뒷줄, 그는 바로 앞줄 왼쪽이었다. 속눈썹이 참 길다고 생각했다. 김지운 감독과 세 배우가 입장하자 정두홍 감독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마이크를 잡은 김지운 감독은 무대인사를 하고 정두홍 무술감독이 이 자리에 있다고 알렸다. 관객이 두리번거렸다. 벌떡 일어나 목례라도 하면 분위기가 화목할 텐데, 정두홍 감독은 질색하며 좌석 깊이 몸을 파묻었다. 수줍은 사람이네. 설마. 그 날의 잔상이 인터뷰를 감행하게 했다고는 차마 말 못하지만, 정두홍 무술감독이라면 야전에서 만나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있었다. 한끼 식사나 몇잔의 커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올 사람, 어깨를 부대끼고 넘어지며 무엇인가를 함께 만든 다음에야 간신히 첫 문장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대상.

정두홍은 액션 연기자로서 무술감독으로서 싸우듯 일을 해왔지만, 우선 무술감독이기 위해서도 싸워야했다. 무술 연기자 선배들이 좋았던 시절을 안주삼아 이야기하고 영화 크레딧에 무술감독 대신 무술지도라는 직함이 오르던 1990년대 초 과도기의 충무로에 착지한 그는, 자기의 길을 닦아가며 걸어야 했다. 1990년 <장군의 아들>에서 배우 이일재의 대역으로 영화계에 점을 찍은 이래, 무술감독으로 성장해 급속히 산업화한 한국영화가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몸싸움을 만들어냈다. 액션 장르영화의 전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선봉에 선 정두홍의 작업은 행운인지 불운인지 실전이 곧 학습이었다. <명성황후> 뮤직비디오에서 와이어 액션을 처음 체험했고, <쉬리>의 시가전은 그가 최초로 시도한 총기 액션이었으며, <태양은 없다>와 <반칙왕>은 권투와 레슬링 액션에 대한 첫 도전이었다. 정두홍은 누울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팔자다. 액션 연기자들의 ‘집’이 간절해서 동료 넷과 함께 1998년 보라매공원 체육관 한구석을 빌려 설립한 공동체 서울액션스쿨은 체육관에서 출발해 스턴트맨들의 학교가 됐고 <짝패> 이후로는 제작사 성격도 띠고 있다. 액션 연기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안정적 텃밭을 한국영화산업 안에서 사수하는 문제도 정두홍의 현안이다. 뜻 맞는 감독들과 시도하는 액션배우 공모 프로젝트는 그런 고심의 결과다. 말이 좋아 ‘국가대표’지, 장르영화 시장이 허약한 충무로에서 정두홍 감독의 고민은 여전히 사활의 차원이다. 그래서 그는 여태 뜨겁다.

정두홍의 액션이 우아하다는 평을 들었던 기억은 많지 않다. 그가 디자인한 싸움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의 냄새로 진동한다. 정두홍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준 김성수 감독의 <비트>를 다시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당대의 청춘을 전율케 한 교무실 액션의 시동은 그제껏 묵묵하던 민이(정우성)가 친구를 패는 교사의 몽둥이를 움켜쥐고 낮게 내뱉은 대사였다.“때리지 마세요.” 지긋지긋하게 세상의 주먹에 두들겨 맞은 자의 항변. 그 한마디는 정두홍표 액션의 정서를 꿰뚫는다. 당신이 정두홍과 대화하며 가장 자주 듣게 될 단어는‘미치다’,‘부딪히다’,‘아프다’다. 위기가 왔을 때 이 내향적인 남자가 취하는 유일한 전술은 본인의 몸을 들들 볶는 것이다. 슬럼프에 빠진 2004년 겨울에는 계절이 바뀔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기도 했고, 서른여덟살이 된 이듬해 여름에는 코뼈를 부러뜨려가며 프로 복서로 데뷔전을 치렀다.“이러다 죽겠구나”라고 체감하는 점에 도달하면 그는 죽지 않기 위해 다시 운동화 끈을 매고 달린다. 기체가 되어 자유를 얻는 비등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지글대는 탄불 위에 올려놓는 형국이다.

정두홍의 동지이자 천적(?)인 류승완 감독은 “딱 <삼국지>의 조자룡”이라고 잘라 말한다. 과연 정두홍은 <칼의 노래>를 보고 울었다고 했다. 그것도 부록을 읽고. 장수들의 인명록에 모함과 누명으로 죽은 영웅이 하도 많아 분을 가누지 못한 것이다. <너는 내 운명>을 보며 오열을 참느라 온몸의 잔근육이 다 불거진 사건은 류승완이 정두홍을 놀릴 때 애용하는 일화다. 강하지만 안타까운 사람, 그는 우리가 파주 액션스쿨에 도착했을 때 땀에 절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쓴‘몸만들기’에 관한 책을 읽었어요. 과거에는 운동을 몇 시간 했느냐에 집착했지만 나이 드니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이라도 즐겁게 운동하는 쪽이 몸에 이롭다는 걸 알았다고 썼던데요. 감독님에겐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시점이 안 왔나요? =이미 왔죠. 지금 제가 마흔셋인데 서른아홉 무렵 왔어요. 그 다음부턴 내 몸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싸우는 건데 결국은 바보짓이죠. 밤 되면 아프니까. 전에는 작품 회의가 있어도 운동이 미치게 하고 싶어서 핑계를 대고 빠질 정도였어요. 요즘도 파주에 있으면 종일 운동하지만 집중적인 개인 운동은 하루에 평균 네댓 시간 정도?

-평생 육체를 쓰면서 살아온 사람에게 나이 먹는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보다 무겁게 다가오겠죠? =슬프죠. 겁난다는 말도 자주 써요. 촬영현장에서도 몸을 다 못 풀고 살짝 시범을 보여주면 “오, 맛이 갔는데?”라고 놀리잖아요? 무심코 던진 농담이지만 속으로 철렁하죠. (웃음) 서울액션스쿨에는 20대, 30대 펄펄 나는 애들이 있잖아요. 부러우면 부러운 걸로 끝내야 하는데 단원들 다 보낸 다음에 그 애들이 했던 걸 저 혼자 한번 그대로 해봐요. (웃음) 축구를 즐겨요. 20대들과 뛰어도 몸으로 들이받으며 서로 사정 봐주지 않는 신선한 경쟁의 느낌이 좋아요. 체력은 질 수밖에 없지만 이겨보려고 애쓸 때 제 속에서 올라오는 에너지가 좋거든요. 악을 써서 계속 운동을 하는 것은 꼭 한창때만큼 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정신력까지 약해지기 때문이에요.

-관객이 극장에서 확인한 정두홍 감독님의 최근작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입니다. 김지운 감독과는 세 번째 작업인데요. =누군가가 영화계에서 제가 대화할 때 가장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 상대를 딱 집으라고 한다면 김지운 감독이에요. 이 양반이 자기가 원하는 정서를 말해주면 제 머릿속에 그림이 딱 떠올라요. 근데 제가 흥분하면 남들이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경향이 있거든요? (웃음) 김지운 감독님한테 “아하!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라는 거지?”라고 떠들면, 그냥 넘어가질 않고 “뭐? 못 알아듣겠어”라고 꼭 반문을 해요. “감독님만 내 이야기 못 알아들어”라고 투덜거리면“뭐 나만? 다들 못 알아들어”그러죠. (좌중 폭소) <반칙왕>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불편했어요. 사람이 눈으로 말을 해야 하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짜증났어요. 말도 작게 자분자분 해서 잘 안 들려서 일단 “알겠습니다” 하고 나중에 스탭한테 확인하곤 했죠. 그러다 <달콤한 인생>을 하면서 편해지더라고요. 원하는 정서를 분명히 말해주니까. 류승완 감독 같으면 여기서 돌아서 발을 몇번 차고 하는 식으로 자세히 들어가니까 정서는 저쪽에 두고 동선만 쫓아가기 쉽거든요. (웃음)

-<놈놈놈>에서 재미있는 요소는 주요 인물의 성격과 액션 스타일이 이루는 조화였어요. 그런데 도원과 창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태구의 액션 스타일이 모호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태구는 알고 보면 운이라고 보인 것이 다 내공과 타이밍인 인물인데 그런 절묘함을 내비치는 액션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요? =감독도 나도 태구에게 액션을 더 주는 건 부담스러웠어요. 태구는 옷에서 철판 빼내고 잠수헬멧으로 총탄 튕겨낼 때가 제일 태구스러운 거죠. 뭔가 액션을 줘서 잠재력을 암시하기보다 그냥 무한정 정이 가는 인물이길 바랐어요. 귀여움이 최강이에요. 아무리 우성이와 병헌이가 기막히게 액션을 해도 태구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은 따라갈 수 없어요. 현장에서 보다가 태구라는 인물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송강호 방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니까요. (웃음) 에, 사실 송강호씨 본인 얼굴이 귀엽지는 않잖아요? 근데 태구는 깨물어주고 싶더라고요.

-스턴트와 대역 연기를 하면서 많이 다치셨던 걸로 알아요. 거의 죽다 살아난 경험도 있을 텐데, 죽음의 근처에 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뭐라고 보세요? =죽음 근처에 가면 오히려 두려움을 알게 돼요.이런 게 죽는 거구나 알고 나면 도리어 침착해지고 고개를 숙이게 되죠. 부모님들이 자식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전 여기(가슴을 가리키며) 너무 많이 묻었어요. 처음 보낸 분은 선배였는데 제가 무술감독을 맡았던 드라마에서 서강대교 투신장면을 찍다가 사고가 났어요. 10월의 새벽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선배가 물에서 나오면 같이 뼈다귀해장국 먹으러 가야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요. 첫번에 잘 뛰어내렸는데 촬영감독님이 한번 더 가재요. 헤엄쳐 나오는 선배한테 “형, 다시 한번 가야 한다는대?” 했더니 “응, 그래? 그럼 가야지” 하면서도 선뜻 몸이 안 움직였어요.“형, 농담 아냐. 진짜야”라고 보내고 두 번째 뛰어내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형이 안 나왔어요. 그 뒤 일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때 제 위에 있던 회장님이 “네가 떠나는 건 좋은데 하던 작품은 책임지고 끝내는 게 맞지 않겠냐”고 해서 알겠다고 했어요. 작품을 마친 뒤 회장님이 무술감독 시절 팀원을 잃은 경험을 들려주시더군요.

저는 그 어떤 종교보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를 믿어요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저는 부처님이나 하나님보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를 더 믿어요. 아버지가 절 살려줘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어요. 많이 맞으며 자라서 무섭기도 했어요. 농사일하기 싫어하고 말썽을 많이 피웠거든요. 농약 치라고 하면 오기로 일부러 바람을 맞으며 거꾸로 뿌려서 다 얼굴에 쐬고 중독돼서 쓰러져버렸죠. 하하. 그런데 군대에 입대하는 날 아침밥을 먹으며 이별하는데 아버지가 우셨어요. 그러니 아들은 얼마나 눈물이 났겠어요.

-형제 중 막내인 걸로 알아요. 막내라서 사는 게 힘든 쪽이었나요? =힘들었죠. 4남3녀의 막내예요. 형, 누나들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일찌감치 산업전선으로 나갔기 때문에 외동처럼 자랐죠. 집에 돈도 없고 공부도 타고나지 않았으니 얼른 졸업해 농사지으라는 말만 들었어요. 중학교도 안 보내려고 하셨는데 누님들이 고집 피워서 겨우 갈 수 있었고 고등학교 갈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공부에 목표도 없으니 정말 할 일이 없어서 겨울방학 동안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어버렸어요. 제가 유일하게 받은 상이 다독상이죠. (웃음) 그 시간이 없었다면 사람이 지금보다 더 휑했을 거예요. 한달 동안 책 빌리러 갈 때만 빼면 이불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읽었어요. 그게 몇 학년 때였더라? 이거 직업병이야. 기절을 많이 해서 기억력이 없어요. 하하, 웃다가 미안해지죠?

-외람되지만 아버님이 많이 때리고 진학도 말리셨는데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게다가 감독 데뷔작으로 준비하신다는 <데어 스토리>(Their Story)라는 영화도 자전적인 부자관계 이야기라고 들었는데요. =<데어 스토리>는 제작자가 액션이 들어가길 원해서 3인칭의 시대극으로 만들까 싶어요. 아버지는 당신이 돈이 없으니까 저를 학교 보내려면 큰 자식들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자신이 자식을 돕진 못할망정 도움을 받아서 막내를 교육시키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거죠. 그걸 저는 나중에야 이해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명절 다음날이었고 저는 군대에 있었어요. 형제들이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시고 돌아가시라고 청했는데 아무 할 말 없다면서 벽에 걸린 달력과 시계에 세번 번갈아 시선을 던지다 임종하셨대요. 어머닌 이유를 아셨죠. 달력에 막내 제대하는 날을 표시해놓았던 거예요.

-너무 늦게 화해해서 더욱 애틋하신 거네요. 보통 남자애들이 레슬링이든 태권도든 TV로 보고 흉내내다가 운동을 시작하잖아요? =동네에서 두 번째로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어요. 큰형이 폼 잡느라 월급까지 가불해서 장만해준 거죠. 어린이 태권왕 대회를 보고 너무나 태권도가 하고 싶었지만 시골이라 도장이 없었어요. 그래서 산에 가서 혼자 타잔놀이하고 동네 골목대장했죠. 심심한 형들이 아이들 데려다 싸움 붙이면 거기서도 승승장구하고. 하지만 옥녀봉파니, 촛불파니 하는 ‘조직’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실망스런 모습을 봤거든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각수 관장님의 도장이 동네에 생긴 거예요.

-운동을 통해 자기의 몸이 변화하고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컸나요? 아니면 TV에서 본 멋진 장면을 재현하는 기쁨이 컸나요? =그보다 무엇인가에 내가 열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친구들 몰래 다녔죠. 창피하기도 하고, 운동한다고 소문나면 촛불파에서 더 데려가려고 할 테고. (웃음) 누나들이 명절 때 준 용돈을 모아서 관비를 냈는데 몇달씩 밀려서 엄마한테 고백을 했더니 긴장하시더라고요. 옛날 사람들은 태권도 배운다면 깡패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체육관에 가서 돈 없어서 못 가르치니 못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관장님이 공짜로 다니게 해주셨어요. 제가 은인이 많아요.

-태권도 시범단으로 대학 시절 해외 여행도 많이 하셨는데요. 무술 시범이라는 것도 보여주는 액션에 속하니까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염두에 두셨을 것 같습니다. =쇼맨십이 필요했죠. 내성적이고 수줍었지만 무대에 올라가면 변했어요. 주인공을 맡은 내가 적극적으로 안 하면 팀워크가 깨지니까요. 멕시코시티에서 보인 시범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어요. 마이크도 없이 고산지대에서 기합을 지르며 했는데 커다란 체육관이 열광으로 진동했어요. 한국에선 시범을 보여도 좀 시니컬하잖아요? 쟤네들 약 파는가보다 그러고. (웃음)

-영화와 드라마 일을 하게 된 데에도 그 짜릿한 경험이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 걸까요? =그렇죠. 두 번째 짜릿함은 <테러리스트>에서 최민수씨 대역을 할 때 왔어요. 패션쇼 장면에서 가죽점퍼에 모자를 쓰고 양복 입은 수십명 패거리들과 맞서는데 내 안에서 뭔가가 쫙 올라오는 거예요. 아, 이게 무슨 힘일까. 당시 현장에서 정강이가 찍히고 깨져도 괜찮다고 다시 가자고 그랬어요. 선배들은 방금 비명도 지르고 눈도 풀렸던 애가 그러니 너 마약했냐고 물었어요. 그렇게 영화에 미쳐간 거죠. <본투킬>을 하면서는 쇄골이 부러졌는데 그 이튿날이 <런어웨이>에서 대역을 하기로 한 날이었어요. 그냥 붕대를 감고 현장에 가서 일곱번 차창에 부딪혔어요. 사람이라 아픔은 어쩔 수 없어서 멈칫거렸는지 여섯 번째는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곱 번째는 유리창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 뒷머리를 의식적으로 내둘러 깨고 떨어졌어요. 몸에 힘을 주면 기절을 하다가도 피가 머리에 쏠려 기절을 안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죠. (좌중 탄식)

지금도 전 대역하고 싶어요.

-<태양은 없다> 촬영 당시 현장을 취재한 선배기자가 말하길 정두홍 무술감독의 첫인상이 “한이 많아 보였다”고 해요. 그 무렵에는 무술팀이 스탭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고 밥도 따로 먹고 했다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그런 분위기가 달라졌나요? 아니면 지금도 그런 경계를 느끼시나요? =지금은 다른 한이 있고요. 당시에는 스스로 백정이라고 불렀어요. 그 정도로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공깃밥 하나를 먹어도 제작부에서 눈치를 줬어요. 제작비가 빠듯했고,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스탭이 아니니까요. 물론 액션팀도 잘못한 게 있어요. 거칠고 못 배운 것 같은 태도를 보여줬거든요. 그것이 몹시 싫어서 술 먹으면 실수할까봐 회식자리에도 안 갔어요.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활황기 추억담하면 제가 선배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 아니냐고 화내다가 맞기도 했어요. 저는 지금도 현장이 어렵지만 액션스쿨 젊은 친구들은 스탭들과 너무나 빨리 친해지고 어울리더라고요. 부러워요. 저로선 <짝패>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탭들과 함께한 첫 경험이어서 그때 많이 친해졌습니다.

-펀치나 킥에 감정을 실어보내는 게 액션이라고 생각하시는 걸로 압니다. 그런데 배우에게 액션 연기를 지도할 때 결과적으로 그의 감정이 좋다 나쁘다는 판단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왜 좋고 나쁜지를 배우와 이야기하다보면 월권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쟤가 감독이냐?’ 하는 눈총도 많이 받았죠. 그런데 액션을 하다보면 감정이 보여요. 태권도 시범은 테크닉을 보이는 것이지만 영화 액션은 왜 때리는 건지 정서가 보여야죠. 폼나게 주먹질만 하면 그가 분노한 건지 질투하는 건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때린 건지 알 수 없거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잘 봐야 해요. 모니터를 보면서 앞숏의 감정이 어떻게 끝났나를 보죠. “으아아” 하면서 감정이 격하게 끓어올랐는데 다음에 발로 때리면 이상해요. 멀어 보이거든요.

-확실히 발차기는 상대방과 접촉하기 싫어하는 느낌이 있죠. 그래서 <달콤한 인생>의 도입부 액션이 좋았어요. 한강 다리에서 시비거는 패거리들을 선우(이병헌)가 제압하는 장면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짜증과 상대에 대한 경멸이 표현되어 좋았어요. 회자되는 액션은 불각목 싸움입니다만. =<달콤한 인생>의 불각목 장면도 따지면 개싸움에 속해요. 아름다운 합의 형식과 동작은 없잖아요. 살아남아야 한다는 몸부림인 거죠. 그것도 장점이 있지만 액션의 양식으로서 감상해주지는 않거든요. 저 역시 한강 다리 장면 같은 액션이 좋아요. 준비한 콘티를 한컷도 안 바꿨는데 숙제검사해서 칭찬받은 기분이었죠.

-촬영현장에서 감독은 사실감을 위해 다소 위험한 몸 연기를 배우가 해주길 바라고, 배우는 내심 안전을 염려하는 상황이 잦을 텐데요. 그때 무술감독이 중재하는 경우도 많을 듯합니다. =주연배우가 다치면 전체 프로덕션이 멈추니까 안전이 우선이죠. 요즘 배우들은 카메라 방향이나 편집을 너무나 잘 알아서 이럴 때는 대역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똑 부러지게 요구해요. 모든 감독은 기본적으로 잔인해요. 당신들이 직접 극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아붙이죠. 편집 다 된 외국영화를 보고 와서 “외화에선 다 하던데?”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예전에 제게 “63빌딩에서 뛰어내려서 착지할 수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본 TV 감독이 있었어요. (좌중 경악) 흠칫 당황했죠. 그러면서 한국 스턴트가 무술사범이지 스턴트라고 할 수 있냐고 하더라고요. 어디 해보자는 마음으로 오토바이 점프 액션을 했는데 그분이 감탄하는 순간 “이겼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정받아 기뻤죠. 평소에 선하다가 촬영만 들어가면 악마로 변하는 스타일이셨는데 뭔가 위험한 걸 하려고 하면 또 갑자기 “기도합시다” 그랬던 기억이 나요. (일동 폭소)

-감독님 스스로 가장 두려운 부상은 무엇인가요? =척추가 협착된 상태라 인공관절을 다섯개 넣어야 한대요. 근육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건데 마비가 오는 게 무섭죠. 항상 고통을 안고 살아와서 그런지 통증에는 면역이 됐는데 역시 심하게 아플 때는 힘들어요.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씨 대역할 때는 진통제에 의지하다가 아침이 되면 약기운이 떨어져 기어가다시피 귀가했죠. 진통제에 의존하는 것이 싫어서, 무술감독 일을 하면서는 끊었어요.

-스턴트맨으로 활동하실 때에는 무조건 몸을 던진다는 전설이 있었잖아요. 그간 자기 관리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제작 환경이 나빠서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어요. 카 스턴트를 할 때 안전롤바라는 장비가 있어요. 차의 천장에 파이프를 대서 충돌했을 때도 쭈그러들지 않게 보호하는 150만∼200만원 하는 그 장비가 없어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어요. 아마 현장에서 보는 그림은 우리나라만큼 박력있는 나라가 없을 텐데 화면에는 잘 안 나와요. 반면 할리우드는 우리처럼 격하게 하지 않는데 화면을 보면 힘이 느껴지죠. 나이를 먹어가며 현장에서 몸을 던지는 일은 줄었어요. (건너편 액션스쿨에서 운동하는 단원들을 가리키며) 우리 애들이 비애가 있어요. 저렇게 발차기 하루 500번 연습해도 주인공이 한방 차면 발 한번 못 써보고 끝이니까. 하지만 대역을 하면 적어도 공격을 할 수 있잖아요? 신이 나고 몸의 느낌도 살아나죠. 지금도 전 대역하고 싶어요.

‘정두홍표 무술’이 생긴다면 그 성분은 한(恨)이겠죠, 하하

-얼마 전 좌담에서 보니까 류승완 감독님은 정두홍 무술감독님이 옆에 있으면 자꾸 놀리고 싶은 충동이 솟는 것 같습니다. =‘톰과 제리’죠. (웃음) 류 감독도 변화해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사이예요. 처음 만났을 때는 나한테 의리 찾는 사람들은 다 가식덩어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을 보고 “정서가 죽인다”고 전화를 했더라고요. 양조위가 누군가를 위해 화살을 막으면서 대신 맞아주는 장면에 열광하던데요. 옛날 같으면, 그렇게 막을 정신 있으면 칼로 쳐내면 되지 않냐고 따졌을 사람이. (일동 폭소) 멋을 알아가는 거지.

-영화 속 액션을 볼 때 관객이 국적을 나누어서 평가하지는 않아요. 한국영화 액션을 <와호장룡>이니 <매트릭스>니 동시대 할리우드나 홍콩영화의 액션과 수평적으로 비교하게 마련인데요. 트렌드에 대한 부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액션에 대해서는 좀더 엄격하게들 보죠. 한국 액션은 왠지 기승전결이 없는 것 같고 싸우나 싶으면 빨리 끝나버리고 합 자체가 상세하지 않은데 할리우드나 홍콩은 동작이 잘 보이니까요. 과거에는 우리 관객이 스케일만 재미있어했는데 이제는 정확하게 동작을 읽는 눈이 발달했어요. 솔직히 액션이 길고 정확해야 드라마와 액션이 같이 나아갈 수 있는데 감독님이나 스탭들은 액션을 길게 찍는 걸 본능적으로 꺼리다보니 현장에서 저와 많이 부딪히죠. 류승완 영화의 액션이 길어 보여도 실상 외화에 비하면 그리 긴 편이 아니에요. 저도 류승완 감독과 찍다보니 기술이 발전했지, 다른 감독들과 드라마에 부속되는 작은 액션만 찍어봤다면 이 정도나 됐을까 자신이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비열한 거리>와 <말죽거리 잔혹사>를 부럽게 봤어요. 액션이 길지만 길다는 말이 안 나오고 드라마와 서로 상승효과를 냈죠. 아무리 액션스쿨에서 백날 비디오를 들고 편집을 해도 현장에서 35mm카메라로 뭘 해보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현장에서 액션을 할 시간을 조금만 더 준다면 우리 무술감독들도 홍콩처럼 본인들의 아이디어를 확장시킬 수 있을 거예요.

-이미 한국 영화계에서 ‘정두홍표 액션’이라는 용어는 통용되고 있어요. 언젠가 ‘정두홍표 무술’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무술의 성분은 무엇일까요? =한(恨)이겠죠? 하하. 기술적으로는 고민중이에요. 이소룡의 절권도처럼 저만의 특화된 무술을 만들고 싶은데 지혜가 모자라요. <본 얼티메이텀>을 보면 액션은 간단명료한데 그렇게 안 보이잖아요? 카메라 메커니즘과 관련된 문제는 나중이고 저는 일단 무술 부분을 연구해야죠. 그런데 영화액션은 워낙 세계화가 돼버렸어요. 이소룡 시대에 비해 영화액션에서‘히트 상품’ 만들기가 어려워진 거예요.

-아시아의 영화액션을 누구보다 유심히 관찰하셨을 텐데요. 신체조건이 그닥 다르지 않은데도 각국의 스타일이 확연히 차이나는 이유를 생각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역사와 민족정서, 문화가 완벽히 다르기 때문이죠. 상대적으로 우리 문화 색깔이 불분명해서 속상해요. 중국은 쿵후, 일본은 사무라이 검도와 가라테가 있죠. 우리에겐 태껸이 있지만 무술 스타일상 <다찌마와리>에서 보신 대로 웃음부터 나잖아요. 긴장하고 싸움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흔들거리면서 “이크, 이크” 하니까.

-한국의 영화액션 하면 생존형 막싸움이 대표적인 이미지잖아요. 한국의 문화와 품성의 어떤 점 때문에 이런 액션이 주류가 된 걸까요? 중국이라고 거리에서 평소에 쿵후로 싸우진 않을 텐데요. =막싸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실생활이잖아요. 실제 역사 말고 영화의 역사만 따지면 중국과 일본은 무술의 문화가 단절이 없었죠. 반면 우리는 액션영화가 10여년간 에로 장르에 시장을 내주면서 딱 끊어졌거든요. 제가 그 과도기에 일을 시작했어요. 방송사에 일하러 가서 돌려차기를 하니까 홍콩 액션을 흉내낸다고 싫어하더라고요. 우리 선배들은 사실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은 환경에서 홍콩식 무술과 카메라 테크닉이 유일한 교과서였거든요. 그런데 저는 홍콩 액션에 대한 거부감을 접하고 나서 일부러 실베스터 스탤론을 좋아하고 개싸움 스타일로 가버린 점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단출한 장비만 쓰고 확연히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액션만 익숙해졌어요. 제 선배 세대가 계속 일을 하셨다면 홍콩, 일본, 타이처럼 세계화된 액션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안타까워요.

-액션 스타가 배출되지 않은 데에는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영향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 화면에서는 주연 외 배우들은 무리지어 싸우고 있다는 정도로 인지되니까요. 한국 배우 가운데 액션 연기에 재능이 있는 배우들을 무술감독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최민수씨는 감정을 수반한 액션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배우예요. 몰입도가 뛰어나죠. <테러리스트> 이후로 액션의 맛을 알고 확 변했어요. 권상우씨와 송승헌씨도 액션이 짧은 시간에 발전했어요. 정우성씨도 그런 예지만 본인이 즐기는 거죠. 류승범씨는 액션하기를 싫어하는데 하면 굉장히 잘해요. 연기를 본능적으로 하듯 액션도 마찬가지예요. 이병헌씨는 이번에 할리우드 가서도 대역이 오히려 더 못하는 바람에 본인이 많이 했다고 해요. 설경구씨, 정재영씨도 잘하고 송강호씨도 감정 표현이 좋죠. <살인의 추억>의 두발 모아차기는 <반칙왕>에서 익힌 건데 <놈놈놈>에도 나오죠. <전우치>의 강동원씨는 요새 액션스쿨에서 훈련 중인데 운동신경이 좋은데다가 <형사 Duelist> 때 춤을 배웠대요. 사흘째부터 와이어를 나보다 더 예쁘게 타더라고요.

-정우성씨와 각별하시죠? 관우가 장비 대하듯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전 우성이 형이라고 불러요. 혼자 있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애어른 같은 동생이에요. <비트>부터 점점 스타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무사>의 여솔이 역부터 창술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래서 <중천>에서도 본래 없던 창 액션을 만들어 넣었죠. 정우성의 창술을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무엇으로 굳히고 싶었어요. 그런데 <놈놈놈>은 서부극이니까 장총을 쓴 거고, 총을 쏘는 멋보다 돌려서 총집에 꽂는 쾌감이 크다는 데에 착안했죠. 사실,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우성이를 걱정했어요. 창이는 기막히게 멋있고 태구도 포스가 느껴지는데 도원은 가끔만 등장하는 것 같아서. 우성이한테 가서 감독님하고 대화 좀 해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감독님한테 문제를 들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까지 그러면 머리아파서 쓰겠냐고 하더라고요. 본인이 태평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챙기게 되죠. 귀시장 장면부터 우성이가 편안해졌죠.

-개인적으로 홍콩식의 과장된 코미디와 액션보다 할리우드의 사실적 액션을 선호하시는 걸로 알아요. 그런데 <와호장룡>이나 <매트릭스> 이후 쿵후가 할리우드 액션을 지배하게 됐으니 조금 허전했겠어요. =프랑스영화도 미국영화도 모두 우슈가 집어삼킨 것 같았죠. 그런데 이른바 중국 무술에는 우리 고유의 발차기가 합성돼 있어요. 성룡의 액션도 쿵후와 태권도 발차기의 합성이죠. 원래 중국 무술에는 직선적 발차기가 없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자신들의 것으로 특화해 선점한 거죠. 한국인들은 발차기를 잘하는데 영화로 볼 때 하체만 갖고 싸우면 그림이 빈약해요. 앵글이 비슷하고 단조롭거든요. 반면 중국인들은 상체 동작이 발달해서 우아하죠. 탁탁 내지르다가 큰 발차기를 한번 하면 시원스럽죠.

-특별히 선호하는 무기가 있습니까? =심플한 거요. (테이블 위를 살피며) 이 빨대도 무기가 돼요. 상대 눈을 툭 찌르면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보다 거리가 단축되어 시간을 벌 수 있죠. 여기 있는 물건 중 제일 흉악한 건 쓰고 계신 볼펜이죠. 제가 좋아하는 조 페시 형이 쓰셨던 만년필이라든가, 하하 그런 사실적인 호신 무기를 좋아해요. 인물이 늘 쌍절곤을 휴대하거나 칼을 찰 순 없잖아요?

-근년 들어서는 인터뷰에서 할리우드 진출의 소망을 전만큼 자주 언급하지 않으시던데요. = 예전에는 진짜 목표가 “타도 홍콩, 고 투 할리우드”였는데 물 건너갔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조금은 남아 있는 희망이 있고, 사람이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아도 가야 할 목표가 있으면 힘을 낼 수 있잖아요. 반드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지웠지만, 힘을 내기 위해 무형의 목표를 세워놓은 거죠.

남들은 저더러 운동에 미쳤다지만 저는 영화에 미친 거예요

-영화에서 서로 치고받는 격투장면을 볼 때면 “저 사람이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엉뚱한 생각을 해요. 액션배우란, 주변 사람들한테도 견디기 쉬운 직업이 아닐 텐데요. =일단 액션스쿨에 지망생이 오면 제 첫 마디도 만류예요. 멋있어서 하려고 왔다는 말을 들으면 “임마, 여기 사람들 현장에서 대우 못 받고 그전에 일단 정두홍이한테 욕먹으면서 해야 돼”라고 말하죠. 따뜻하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너, 어디 아프니? 어떡하냐. 저기 가서 쉬어라”, 이래서는 촬영을 못해요. 아이들이 힘들고 분노할 때 에너지의 150%, 200%가 나오고 그래야만 비로소 화면에 에너지가 꽉 차요. 그게 슬프면 이 직업을 갖지 말아야죠. 아마 지금 <무사> 찍으라면 못할 거예요. 당시 단원들 앉혀놓고 “이 작품으로 꼭 인정받고 할리우드로 가고 싶다. 여기서 너희들이 다쳐도 난 영화 끝날 때까지는 눈 깜짝 않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낮 촬영분이 미흡해 보이면 사막에 집합시켜서 선착순까지 시켰어요. 그러던 어느 날 촬영하다 점심 휴식이었는데 애들이 칼을 안 놓고 덜렁덜렁 들고다녀요. 어서 풀고 쉬라고 했더니 녀석들이 칼을 놓는 게 아니라 손에서 풀어놓는 거예요. 알고 보니 손가락을 맞아 뼈마디가 부어서 칼을 못 잡고 손에다 칭칭 묶어서 연기를 한 거예요. 그때 많이 울컥했어요. 그런 고통과 분노가 <무사>에 들어 있는 거죠.

-요즘도 액션스쿨 훈련생들이 부모의 반대로 도중하차하는 예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경우는 힘든 시기 다 보내고 무술감독으로 데뷔할 시점이 된 친구들이 떠날 때예요.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돼지농장을 물려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아요. 막연히 대안도 없이 반대를 못 이겨 나가는 아이들이 가슴 아프죠. 스턴트라고 하면 부모님들은 “죽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저러다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에요. <놈놈놈>을 하다가 잃은 중현이(故 지중현 무술감독)의 부모님도 그렇게 말리셨대요. 제가 다시 눈물을 흘린 건 아버님 말씀 때문이었어요. 언젠가 중현이가 집에 와서 “아버지 술 한잔 사주세요” 하더래요. 안 그러던 놈이 왜 그러나 했더니 “정두홍 감독님이 오늘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셨어요” 하더래요. (침묵)

-액션의 진정성이라는 말을 가끔 쓰십니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이를테면 연기자도 고통을 느끼는 액션이라거나 하는 단순한 뜻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죠.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진정성을 말하는 거예요.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경우는 와이어를 타도 되지만, 조폭영화에서 와이어를 타고 날아가서 때리면 어색하다는 거예요. 진짜 치고받아서 진정한 액션이 아니라 극화된 액션 안에 감정이 살아 있을 때 진정한 액션이죠. 맥락없는 액션을 위한 액션은 에너지 낭비일 뿐이에요. 외국 관객은 오히려 한국영화 액션 특유의 감정에 민감해요. 제일 가슴 아픈 경우가 영화를 보고난 사람들이 “액션만 돋보인다”고 말할 때예요. 이런 말을 할 때는 분명 뭔가 문제가 있죠.

-정두홍 감독님의 무술팀이 특정한 특수효과팀이나 특수분장팀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일 기회가 공평히 돌아가지 않는다는 불평의 목소리도 있다고 합니다. 들어보셨나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영화도 프로들의 세계잖아요. 한국영화계가 실력도 없는데 가엾다거나 친분이 있다고 일을 시켜주는 여유가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나를 써달라고 로비한 적도 없고 우리 아이들 다치고 죽어가면서 뼈아프게 열심히 노력해왔어요. 그것과 별도로 특수효과팀과 무술팀의 호흡은 확실히 중요해요. <여명의 눈동자>에서 수류탄 터지는 장면을 찍을 때 특효팀에서 기름을 묻어놓고 시멘트라고 거짓말하는 바람에 화상을 입은 적이 있어요. 저는 특수효과회사 데몰리션과 일을 많이 해왔는데, 이분들은 손가락 태워가면서 화약 개발하는 사람들이에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원빈 눈에 폭약이 터져서 들어갔는데 망막 손상을 안 입었어요. 그런 폭약을 만든 거죠. 가보면 다른 곳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돈 벌어서 다시 투자를 해요. 액션스쿨의 스턴트 장비도 마찬가지예요. <씨네21>에서도 ‘정두홍 1인체제’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액션스쿨에만 무술감독 직함을 가진 사람이 열명이 넘고 다른 무술팀도 많아요. 제조업도 아니고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시장 독점이란 말이 적당한가요? 매니지먼트사처럼 끼워팔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에서도 약자의 입장인데 더구나 제작자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소릴 들으면 기가 막혀요.

-무술연기자협회 회장이기도 합니다. 윗세대 무술연기자와 후배 무술연기자들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느끼시나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발을 담그고 있는 공간이 있어요. 거기서 발을 빼는 건 자유지만 일단 담그면 뭔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먹는 걸 해결하는 거죠. 2002년에 영양실조로 낙향한 애도 봤고 가슴에 묻은 연기자들도 있어요. 20년 동안 그런 일을 겪다보면 부지중에 소명의식이 생겨요. 저도 모아놓은 돈이 없고, 액션스쿨도 단원들이 지분을 나눠갖고 있어요. 내년 봄이면 액션스쿨로 인해 진 은행 빚을 원금까지 한달에 4350만원씩 갚아야 하는데 여기서 쫓겨날 각오도 하고 있어요. 손 안에는 힘이 없는데 이뤄야 할 일은 많아요. 제가 못하면 후배들이 이어받아야죠. 스턴트맨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꿈도 있어요. 다들 월세 살고 뼈 부러뜨리며 일해도 제대로 돈을 못 버니까 어울려 사는 단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제가 한국영화를 이끄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 밥만 축내고 싶지는 않아요. 한편으로는 힘있는 제작자들이 본인의 회사만 생각지 말고 조금씩 힘을 모으면 저보다는 훨씬 일이 쉬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손잡으면 원이 작지만 여러 사람이 잡으면 둘레가 커지잖아요.

-감독님은 마음속에 좁은 방이 있어서 몇 사람만 들여놓고 애지중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외면받아도 상처를 받을 것 같고요. =사람들은 애정을 다 주면 그 사람을 무시하고 반대로 말 안 하고 삐쳐 있으면 다가와서 위해주죠. (웃음) 류승완 감독도 같이 영화 만들고 나면 몇달씩 안 만나고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해요. 질릴까봐, 더 오래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서죠. 한국 액션영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내가 찍어놨기 때문에 어떤 상처를 줘도 감내할 수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를 남이라고 여기겠지만 전 가족과 다름없이 생각해요. 짝사랑을 너무 치밀하게 하는 거죠. (웃음) 예전 여자친구가 “너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데에 우선 힘을 쓰라”고 타박하기도 했죠. 지금은 담담해지려고 노력 많이 해요.

-다음에 달려갈 목표가 없으면 시들어져 죽을 것 같은 불안이 몸에 밴 것처럼 보입니다. 움직이고 뭔가를 도모해야만 살아 있다고 실감하시나요? =요즘은 허수아비처럼 껍데기만 움직이지 영혼은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중현이를 잃고 나서부터 그래요. 사고가 있고나서 액션스쿨 사람들도 열명 정도 떠났어요. 누가 그만둔다고 해도 이유를 물은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물어봤어요. 무서워서 그러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고생한 것 아깝지 않느냐고 잡고 싶지만, 이 직업이 위험한데 어떻게 잡아요? 그래서 더욱 괴롭습니다.

-경력이 20년에 가까우니 그래도 예전처럼 “내가 가진 것은 몸밖에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다른 것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것이 지혜여야 할 텐데,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제 콤플렉스예요. 운동능력이 떨어지면 현명함이 늘어서 보완해야 하는데, 정신능력도 약해지니 불안해요. 축적된 노하우야 현장에서 순발력으로 발휘되지만요. 그것마저 없다면 은퇴해야죠. 은퇴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TV고 뭐고 아무것도 놓지 않을 생각이에요. 남들은 저더러 운동에 미쳤다지만 저는 영화에 미친 거예요. 영화가 저를 살려줬고 스턴트와 액션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이 너무나 좋아 지금까지 버틴 거예요. 그런데 나이들어 일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TV나 스크린에서 남이 한 액션장면을 본다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追伸 인터뷰 도중 전화가 울렸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영화학도였다. 촬영감독 지망생인 청년은 정두홍 감독을 만나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로, 다시 파주로 다섯 시간을 헤매서 도착했노라 말했다. 막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로 빼곡히 적은 꼬깃한 한국영화 베스트 목록을 펼쳐 보이고는 견자단과 정두홍이 주연한 영화를 꼭 보고 싶다고 청했다. 정두홍은 지친 팬을 쉬게 하고, 한국영화를 찍고 싶다는 그를 위해 홍경표 촬영감독에게 선뜻 전화를 걸었다. 청년을 배웅한 정두홍 감독은 말했다.“내가 할리우드에 가면 저렇겠죠.”난생처음 만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국의 영화 지망생에게 그는 대뜸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청년의 열띤 말투와 간절한 눈빛, 이마에 맺힌 땀, 몸의 언어만으로 소통은 충분했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이 말은 반드시 보태고 싶다. 정두홍 감독은 내가 아는 한,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제일 다정하게 받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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