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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운명에 대한 집요한 탐구 <북극의 연인들>

남매간의 사랑의 충격 지수 ★ 남매간의 사랑의 독창성 지수 ★★★★ 핀란드 북부 여행충동 지수 ★★★★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세상은 그 둘만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의 현실을 두번 겪는다. 한번은 나의 눈과 마음으로, 다른 한번은 너의 눈과 마음으로. 그렇게 삶을 두번 사는 동안, 우리는 만남과 헤어짐 혹은 희열과 고통이라는 우연이 사실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되묻는다. 그 필연이 사랑을 슬프게 한다. 사랑의 비극은 하나의 현실을 두번 겪는 대신, 두 사람이 마침내 하나의 현실을 눈앞에 두고 마주한 순간 일어나는 법이다.

조숙한 소년 오토(otto)는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둘이 산다. 아버지는 하교시간마다 아들을 데리러 온다. 오토는 우연히 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나(Ana)다. 하지만 아이들을 마중 나온 오토의 아버지와 아나의 어머니가 서로에게 호감을 품게 되고 재혼을 하고 만다. 그때부터 오토의 비밀스러운 감정은 사랑으로 커가고 오토를 죽은 아버지의 환생이라고 믿고 싶어하던 아나 역시 오토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 눈이 먼 오토가 친어머니를 버리고 아버지의 집에 산 지 몇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친어머니는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토는 방황을 거듭하다 가족과 사랑하는 여인을 등지고 집을 나온다.

의붓남매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닳고닳은 소재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서 이 영화가 끌어내는 건 사랑과 운명에 대한 집요한 탐구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라기보다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지극히 영화적인 형식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시작과 영화의 끝은 동일한 장면이다. 소년의 이름과 소녀의 이름 모두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으나 동일하다. 마치 영화가, 아니, 사랑과 삶이 결국은 폐쇄된 회로 혹은 운명 속에 갇힌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진행되는 시간의 반복은 차이의 틈을 만들며 순환한다. 영화는 오토와 아나의 챕터를 번갈아가면서 동일한 상황을 이들 각각의 시선으로 두번 보여준다. 그렇게 했을 때 겹쳐지지 않는 두 마음의 시간들에서 어긋나는 사랑, 말하지 못한 욕망, 그리고 상실감에 허덕이는 삶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정해진 결말을 향해 무조건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마음을 되돌아보며 지금 이 순간을 자꾸만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니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끝이 정해졌을지라도 삶은 설명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녀를 떠나면서 내 운명도 잊어버렸다”, “내 우연은 바닥났다”와 같은 주옥같은 대사들도 인상적이고 이런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과잉된 촬영과 음악도 더없이 적절하다. 북극의 투명한 풍경은 이들의 아름답지만 아픈 사랑처럼 시리다.

tip/ 성인 오토를 연기한 펠레 마르티네즈는 <떼시스>의 호러 영화광 케마와 <오픈 유어 아이즈>의 주인공 친구 펠라요 역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얼굴이다. 성인 아나를 연기한 나즈와 님리 역시 <오픈 유어 아이즈>에 출연했으며 <북극의 연인들> 이후 훌리오 메뎀의 <루시아>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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