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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악당의 향기’에 취해보시라
문석 사진 최성열 2009-01-29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특별섹션 ‘최선의 악인들’ 박찬욱-오승욱-전계수 감독 대담

이번 행사에서 가장 독특한 섹션은 박찬욱, 오승욱 감독이 프로그래밍한 ‘최선의 악인들’이다. 수년 전부터 두 감독이 함께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이 소행사는 영화 속 매력적인 악당과 그 악당을 연기한 뛰어난 배우들을 소개하는 자리. 감독이기에 앞서 영화광의 입장에서 ‘객원 프로그래머’ 역할을 맡은 두 사람이 이번 행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삼거리극장>의 전계수 감독이 ‘객원 대담자’로 가세해 흥미를 더욱 북돋웠다.

전계수: 두분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두 영화를 준비 중이신 것으로 아는데요, 우선 박 감독님의 <박쥐>는 어느 정도 작업을 하셨나요.

박찬욱: 지금 후시녹음을 마쳤고 음악과 CG를 만들고 있어요. 4월 말 개봉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전계수: 사람들의 기대감이 굉장히 크던데,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박찬욱: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규모가 굉장히 큰 영화로 여겨질까봐 걱정이에요. 사실 <박쥐>는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액션신도 거의 없는 영화거든요. 규모보다는 밀도가 중요한 영화라고.

섹션 제목이 왜 ‘최선’인가

오승욱: 저는 <무뢰한> 시나리오를 다시 쓰는 중이에요. 지난해부터 준비했는데 여건이 안 맞아서 잠시 덮어두고 <복수>라는 영화를 준비했어요. 한국전쟁 직후 미군부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규모가 크다보니 투자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무뢰한>을 끄집어냈는데, HD카메라를 사용해 10억원 미만의 저예산으로 찍을 생각이에요. 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에서 두편의 영화에 지도교수로 참여했는데, 그렇게 해보니 많은 돈을 안 들이고도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배우를 포함해서 10명의 스탭과 길거리에 나가 찍는 ‘스트리트 무비’가 될 것 같아요.

전계수: 저도 새 영화를 준비 중인데, 하정우씨가 캐스팅됐고요, 지금은 여배우를 캐스팅 중이에요.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인데 스크루볼코미디까지는 아니지만 대사가 굉장히 많아요. 시나리오도 다른 영화보다 훨씬 두꺼워요. 배우들도 다른 영화보다 1.5배는 대사를 빨리 해야 하고, 편집도 빠르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까 박 감독님은 ‘규모보다 밀도’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반대예요. 밀도보다는 스펙터클, 그러니까 대사의 스펙터클로 승부하는 영화죠. (웃음)

오승욱: 제목이 뭐예요?

전계수: 가제로 정한 것이 <러브 픽션>이에요. 사랑 이야기이고 또 소설이 나와요. <사랑 소설>이라고 하면 너무 밋밋할 것 같아서 일단 그렇게 지어놓았는데 충무로는 ‘러브’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흥행이 안된다는 속설이 있더라고요. (웃음)

오승욱: 나는 <사랑 소설>이 좋은데. 유치하면서도 좋아요.

박찬욱: 그게 좋다는 말이야, 나쁘다는 말이야? (웃음)

전계수: 이제 영화제 이야기를 해보죠. 아까 기자회견 때 박 감독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 섹션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하셨다고 말하시던데요.

박찬욱: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듯이 술자리에서 시작됐죠. (웃음)

오승욱: 언젠가 술을 마시면서 배우 얘기가 나왔는데, 각자 좋아하는 배우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전부 매력있는 악당들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캐릭터 중심의 영화들을 모아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됐죠.

전계수: 우선 제목이 좋은 것 같아요. ‘최선의 악인들’. 아이러니하잖아요. 그런데 왜 ‘최선’인가요.

박찬욱: 악당으로서의 역할을 최고로 잘한 캐릭터를 모아놓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어요.

오승욱: 그래? 난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했는데. 나는 ‘최선’이라는 의미를 그야말로 착할 선(善)으로 해석했거든. 그래서 악당으로서 가져서는 안될 면모를 갖고 있는 악당을 의미하는 줄 알았지.

착한 일만 하면 위선의 향기가 솔솔?

박찬욱: 악당이라는 게 나쁜 놈을 의미하는데 최선의 악당이라고 하면 진짜 나쁜 거 아니겠어. 덜 나쁜 놈은 최악의 악당이겠지.

전계수: 그런데 그런 악당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박찬욱: 다들 그렇지 않나요. 우리만 그런가? 하여간 나는 선한 인물만 보이는 영화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전계수: 그래도 주인공이 선인인 영화가 더 많잖아요.

박찬욱: 그렇다 해도 그들의 선을 빛내주기 위한 상대방은 존재하잖아요.

오승욱: 그리고 악당이야말로 사람 같잖아요. 어떤 인물이 너무 착하게 생각하고 착한 일만 하면 그 안에서는 위선의 향기가 솔솔 풍기잖아요. 그리고 악한에게서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더 끌리게 되지 않을까.

전계수: 6편의 작품 리스트를 보니 다채롭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승욱: 이들 영화가 최종 선정된 과정을 설명하자면 참 길어요. 처음에 열몇편의 영화를 꼽았는데, 거의 영미권 영화더라고요. 아니 악당들 나오는 영화는 왜 죄다 영미영화인 거야. 생각해보면 유럽영화 속 매력적인 악당은 여성 캐릭터가 많더라고요. 하여간 애초의 리스트를 서울아트시네마에 보냈는데 프린트가 수급되지 않는 영화가 너무 많더라고요.

전계수: 애초에는 어떤 영화들을 소개하고 싶으셨나요?

박찬욱: 우리가 공통으로 꼽았던 영화가 있는데, 그게 마이클 리치 감독의 <프라임 컷>이에요. 진 해크먼과 리 마빈이 둘 다 악당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프린트가 없어서 못 틀게 돼 너무 아쉬워요.

오승욱: 그 영화에 아주 재밌는 장면이 있어요. 진 해크먼이 총을 맞고 돼지우리에 빠져요. 진 해크먼은 리 마빈에게 우리 둘 다 비슷한 놈들인데 남자답게 깨끗이 죽여달라고 부탁하죠. 그런데 리 마빈은 웃기지 마, 하면서 그냥 가버려요. 그걸 보면서 와 저거 진짜 악당이구나 했죠. (웃음)

<프라임 컷> 못 틀어 아쉬움 남아

박찬욱: ‘프라임 컷’이라는 게 여러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좋은 고기 부위로 만든 소시지를 의미하거든요. 사람 고기로 소시지를 만들죠.

전계수: 아, 마블링이 잔뜩 들어가 있는…. (일동 폭소)

박찬욱: 와아, 전 감독 추임새가 장난 아닌데. (웃음)

오승욱: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도 보여주고 싶은 영화였어요. 알다시피 <7인의 사무라이>를 서부극으로 리메이크한 건데 7인이 모두 악당이니까.

박찬욱: 악당들의 백화점인 셈이지. 그런데 그것도 프린트가 없더라고요.

오승욱: 로버트 알드리치의 <북극의 제왕>도 소개하려고 했던 영화예요. 어니스트 보그나인이 악당으로 나오거든요. 사실 우리가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 배우, 즉 악당 전문 배우를 중심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미국영화가 주가 됐던 것 같아요. 어니스트 보그나인, 잭 팰런스, 찰스 브론슨, 진 해크먼, 리처드 위드마크, 로버트 라이언 등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프린트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아요.

박찬욱: 그중 위드마크와 라이언만 건진 셈이지. 나중에 다시 크게 할 때 그 사람들을 다 모아보자고.

오승욱: 아쉬운 작품 얘기만 해도 1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은데, 찰스 브론슨이 나온 르네 클레망의 <빗 속의 방문객>이나 로버트 라이언, 어니스트 보그나인과 리 마빈이 함께 나오는 존 스터지스의 <배드 데이 블랙 록>, 숀 코너리가 악당으로 등장하는 시드니 루멧의 <앤더슨 테이프>도 틀고 싶었고….

박찬욱: 릴리아나 카바니의 <나이트 포터>도 아쉽고, 클라우스 킨스키의 악당 연기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고.

전계수: 결국 프린트 수급이 가능한 영화 중 선택한 셈인데, 완성된 라인업에는 어떤 맥락이 있나요.

박찬욱: 내 경우엔 맥락이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다양한 악당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넓은 의미에서의 악당인 거죠. <퍼제션>의 이자벨 아자니는 아픈 사람이죠. 그런데 누구보다 악마적인 모습을 보여주니까. <그랜드 뷔페>의 네 주인공도 악한이라기보다 타락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죠. 하지만 타락도 윤리의 부재 상태라는 면에서는 악의 한 형태니까. <밤 그리고 도시>는 리처드 위드마크를 소개하고 싶어서 선정했어요. 우리가 그동안 꾸준한 노력으로 리 마빈을 악당으로 어느 정도 정착시켰는데(웃음), 신인배우를 소개하는 의미에서. 이 영화 속 위드마크는 완전한 악마라기보다 좀 비열하달까 그런 정도죠. 사실 너무 악마스러우면 재미가 없어요.

이자벨 아자니, 정말 대단하지

오승욱: 악당이 악마화되고 추상화되는 순간, 관객은 흥미를 잃어버려요. 그 악은 실체가 불분명한 존재니까.

박찬욱: 훌륭한 영화이긴 하지만, 그래서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는 이번 프로그램과 어울리지 않는 거죠.

전계수: 그렇다면 오승욱 감독님의 프로그래밍에는 어떤 맥락이 있나요.

오승욱: 저는 그런 것을 조금 생각한 것 같아요.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악의 기운에 휘말려 악당이 되는데 그 안에서 이상한 논리와 윤리를 만들고, 그게 아킬레스건이 돼서 파멸되는 이야기라는 면이 공통점일 거예요.

박찬욱: 오 감독이 꼽은 영화 중에서 <겟 카터>는 지금 관객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예요. 마이클 케인이 주인공인데, 젊은 관객은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의 집사 정도로만 기억하잖아요. 이 영화를 보면 그 매력에 깜짝 놀랄 거야.

오승욱: 박 감독이 꼽은 <퍼제션>의 이자벨 아자니도 대단하지.

박찬욱: 이 영화는 감독이 아자니와 사귀던 시절에 만들었는데, 아자니를 정서적인 궁지에 몰아넣고 학대해가면서 만든 영화지.

오승욱: 배우보다는 감독이 더 악당 같네.

전계수: 사실 저는 아자니를 아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어요.

박찬욱, 오승욱: (눈을 크게 뜨며) 오, 그래?

전계수: 지난해 10월에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유라시아영화제에서요. 인권영화 <시선 1318>가 초청돼서 거기에 참여했던 이현승, 김태용, 방은진, 윤성호 감독님과 함께 갔는데, 아자니가 게스트로 참석했더라고요. 그런데 아자니 때문에 저희 기자회견이 두번이나 취소되고 연기됐어요. 애초 기자회견이 잡혔는데 하필 그때 아자니가 와서 기자들이 다 그쪽으로 갔어요. 그래서 다음날 다시 기자회견을 하려는데, 그전에 했던 아자니 인터뷰가 너무 길어져서 기자들이 다 밥먹으러 갔다는 거예요. (웃음)

박찬욱: 그런데 어땠어요, 직접 보니.

전계수: 사실 제가 공개하면 안될 것 같은 아자니의 굴욕사진을 몇개 갖고 있는데, 많이 망가졌어요. 얼굴은 어떻게 했는지 30대 후반의 모습을 유지하는데, 몸이….

오승욱: 잠깐. 그만 듣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기억 속 이미지가 지워질 것 같아. (웃음)

박찬욱: <퍼제션>에서는 아자니에 가려졌지만 샘 닐의 연기도 좋죠. 연기를 말하자면 <그랜드 뷔페>도 대단하죠.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 미셸 피콜리, 필립 누아레, 우고 토나치처럼 당대 유럽의 최고 배우들이 함께 나오니까. 우리로 치면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김윤석이 한 영화에 나온 셈이죠. 그래서 이 영화는 남자배우들이 와서 봐줬으면 좋겠어요. <퍼제션>은 여자배우들이 봐주고.

전계수: <박쥐>의 김옥빈씨도 보러 오겠네요.

박찬욱: 옥빈이는 DVD로 보여줬어요. 그것을 보고 느낌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요즘 우리 배우들을 보면 가만히 있는 내면연기나 절제된 연기만 좋아하고 그게 연기의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연기가 필요한 영화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게 싫어요.

김옥빈에겐 <퍼제션>, 임수정에겐 <백야>

전계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배우들은 몸을 쓰는 게 너무 부자연스럽잖아요. 몸을 보여줄 수 없다 보니 클로즈업으로 찍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표정으로만 하는 게 연기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박찬욱: 옥빈이에게 <퍼제션>을 보여준 것도 그런 자극을 받으라는 의미였어요. <미쓰 홍당무> 때는 공효진에게 <카비리아의 밤>을 보라고 했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때 임수정에게 <백야>를 보여준 것도 그런 의미죠.

전계수: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고전영화를 좋아하는 배우들도 많더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김효진씨도 엄청난 영화광이에요.

박찬욱: 이번에 시네마 엔젤이 선택한 <무셰트>는 이나영씨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영씨가 선택했다더라고요. 특이한 영화를 좋아하는 배우도 많은 것 같아요. 임수정씨가 샘 페킨파의 <팻 개럴과 빌리 더 키드>를 좋아할 줄이야. 김옥빈이 존 휴스턴의 <팻시티>를 좋아할 줄이야.

오승욱: 그리고 문소리가 존 카사베츠의 <영향력 아래의 여자>를 좋아할 줄이야.

박찬욱: 재밌는 게 스타들을 데려와보면 시네마테크 관객은 스타들에게 사인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감독들에게만 몰리지. 그게 시네마테크 관객의 자존심 같아요. 그리고 또 너무 덤벼들면 배우들이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배려도 있는 것 같아.

오승욱: 우리만 악당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전계수 감독도 다음다음 영화로 악당이 나오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계수: 일단 제목을 정해놓았는데, <악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오만>이에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오는 소설 속 구절이에요.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어요. 저는 평생에 걸쳐서 악한을 다뤄보고 싶은데 일단 처음에는 부모나 친구처럼 개인적 차원의 나쁜 짓을 하는 악당을 그리고, 다음에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나쁜 놈을, 그 다음에는 역사적 차원에서의 나쁜 놈을 다루고 싶어요. ‘악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은 오만’이라는 말처럼 어떤 사람이 악한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담겠죠.

박찬욱: 본인이 프로그래밍한 영화 말고 이번 영화제에서 보고 싶은 작품과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뭔가요.

전계수: 제가 악한에 관심이 많다보니 이 ‘최선의 악인들’을 다 볼 계획이에요. 보지는 못했지만 제목이 마음에 드는 <열대병>을 추천하고 싶고요.

박찬욱: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한 <탐욕>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추천작은 아까 말했던 <겟 카터>.

오승욱: 나는 <분노의 포도>를 보고 싶고 추천하고 싶어요. 대공황이 배경인데, 이 영화는 바로 지금 봐야 해요. 이 MB시대에…. (웃음)

박찬욱이 추천하는 3편의 영화

<그랜드뷔페>, 비위 약하면 보지 마

우선 <밤 그리고 도시>에서는 무엇보다 리처드 위드마크의 매력에 주목해달라. <이중노출> <패닉 인 더 스트리트> <사우스 스트리트의 소매치기> 등에서 악당 연기를 해왔던 그는 지금 세대에겐 낯선 존재일 것. 비정한 세계에 내몰린 악당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멋진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퍼제션>의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은 워낙 광기어린 영화를 만들기로 유명하지만, 이 영화는 그중에서도 정점에 해당한다. 여기서 아자니는 표면적으로는 정신병자이지만 악마에 사로잡힌 여성으로 등장해 혼신의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 그건 줄랍스키의 학대에 가까운 연출에서 비롯된 것(프랑스 기자에게 듣자하니 아자니에게 이 영화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건 결례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이긴 하지만. <그랜드 뷔페>는 네명의 부르주아들이 죽을 때까지 먹자, 다시 말해 먹어서 죽자는 연대감으로 별장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네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초점을 맞춰달라. 이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떠들썩한 파티를 열더라도 결국 죽음은 혼자서 맞이하는 것이라는 진실이 절절하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아, 워낙 괴상한 장면이 많이 나오니 비위가 약한 분들은 보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오승욱이 추천하는 3편의 영화

<구멍>의 이상한 감동

<겟 카터>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아가는 한 갱의 이야기다. 여기서 마이클 케인이 휘두르는 거친 폭력에는 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자기가 언제부터 형과 조카를 사랑했다고. 감정이입을 할 구석이 없는 캐릭터인데도 마음이 끌리는 건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케인이 자기가 행사하는 폭력에 도취되는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다. 자크 베케르의 <구멍>은 감옥에 갇힌 중죄인들이 탈옥을 감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를 감히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에 버금가는 감옥영화에 꼽고 싶다. 다섯명의 악인들이 넓은 어깨를 부딪혀가며 땅을 파는 모습이 주는 이상한 감동과 긴장감이 두드러진다.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로버트 라이언에 대한 애정으로 선택했다. <피아노를 쏴라> <다크 패시지> 등의 원작자 데이비드 구디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울퉁불퉁하기는 하지만 악당이라는 존재가 결국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해 유년기에 머물고 있는 남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 영화가 <EBS>에서 방영됐을 때 동료인 허진호 감독이 <킬리만자로>를 준비하던 나를 위해 녹화해준 개인적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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