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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폭력묘사가 아닌 그 효과의 무시무시한 공허함 <악마를 보았다>
김혜리 2010-08-18

복수의 서사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당한 만큼 갚아주려면 필요한 고통의 저울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서 멈춰야 할 것인가. <악마를 보았다>의 김수현(이병헌)은, 사랑하는 약혼녀를 토막 살해한 병적인 연쇄살인범 장경철(최민식)에게 사형은 너무 관대하고 무기징역은 지나치게 태평한 벌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오랜 시간 많은 양의 고통을 준다는 사적 평결을 내리고 단호히 집행한다. 국정원 경호요원답게 GPS 캡슐을 이용해 경철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수현은, 경철이 강간과 상해를 저지르는 현장마다 나타나 죽지 않을 만큼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다음 응징까지 버틸 수 있도록 돈까지 찔러주고 사라진다. 수현의 분노는 너무도 뜨거워서 진범이 누군지 모를 때도 용의자들을 찾아가 호되게 폭행해 제 발로 경찰을 찾아가게 만든다. 어차피 악인들이니까. <악마를 보았다>의 맞수인 두 인물은 대조적이다. 김수현은 고도로 훈련된 전투력과 절제된 말과 표정, 정연한 움직임을 보인다. 반면 장경철은 어떤 특별한 전략적 머리도 걸출한 육체적 능력도 없는 둔중한 몸의 중년 남자다. 상투적인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그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폐일언하고 달려드는 막무가내 폭력성과 예측불허함이다. 그는 생각이라는 걸 전혀 하지 않으며 숨이 붙어 있는 희생자의 비명에서 희열을 느낀다.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순회한 김지운 감독은, <달콤한 인생>부터 해당 장르의 가능성을 소진한다기보다 장르를 대표하는 아이콘적 이미지를 음미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연출이 생동하는 장르가, 도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 코미디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허를 찌르는 블랙유머는 여전히 그의 장기여서 <악마를 보았다>가 재미를 주는 부분도 그런 대목이다). 김지운의 재능은 <조용한 가족>이나 <장화, 홍련>처럼 영화적 공간이 ‘집’일 때 안정적으로 발휘된다.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처럼 추격의 서사가 결부될 경우, 김지운 감독은 아주 막연하고 알맹이가 텅 빈 추상적 목표를 유일한 동력으로 설정하고 영화가 자동기계처럼 움직이게 한다. <악마를 보았다>는 특정 장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영화이고 이야기의 동력이 복수라는 선명한 내용을 갖고 있으나 추격의 서스펜스가 희미한 것은 마찬가지다. 대신 들어서는 것은 무대화된 폭력의 연쇄다. 경철은 이어질 시퀀스에서 끔찍하게 맞아도 싼 악행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수현에게 벌을 받는다. 그리고 수현이 아닌 다음 희생자에게 응전의 폭력을 행사한다. 수현은 반드시 누군가가 경철에게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나타나는데, 그가 경철을 애초부터 감금해서 고문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꼬리를 무는 유혈의 풍경 안에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을 향한 거의 의도적인 눈짓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한 혁명을 꿈꾸는 무장단체와 아킬레스건, <올드보이>의 천사날개와 혀, <친절한 금자씨>의 섹스와 느린 응징을 관객은 다시 만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거나 상상할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와 그의 적대자에게는 따로 동기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의식한 듯 영화에도 “완전 개싸이코구나.” “미친 거야?”와 같은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상태와 개별 상황의 동기는 납득돼야 한다. 이에 최민식과 이병헌은 사실주의적 연기를 애써 견지한다. 이병헌은 눈밑 떨림까지 조절할 만큼 감정을 세분하고 최민식은 존재감과 기교를 발휘한다(단, 최민식에게는 그가 텅 빈 눈을 결코 가질 수 없는 배우라는 난점이 있다). 액션이 중심인 영화치고 <악마를 보았다>의 숏은 배우의 얼굴에 큰 비중을 싣는다. 그럼에도 악마성과 복수에 대한 개론을 동어 반복하는 대사는 배우들을 도와주지 못한다. 장르적으로 호러와 가장 가까운 이 영화에서 추리과정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때로 알아야 할 정보를 모르거나 몰라야 할 정보를 아는 것처럼 움직이는 인물들의 동선은 몰입을 방해한다.

김지운은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을 선호하는 감독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떻게’의 관심은 기발한 ‘형틀’의 고안으로 집중된 느낌이다. 이 이야기는 타인의 목숨과 존엄성을 장깃말로 삼은 게임으로 비화하는데, 이는 장르영화 안에서조차 남용되면 재미가 반감되는 위험한 설계다.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전형적인 대사와 작위적 상황이 궁극적으로 휘발성 자극을 위해 배열된 것으로 보인다. 끔찍하지만 진실의 일단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 않는다. <악마를 보았다>의 악마는 잔혹한 폭력묘사가 아니라 그 효과의 무시무시한 공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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