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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아드레날린 드라이브!
안현진(LA 통신원) 2011-04-22

또 한편의 걸출한 복싱드라마 <라이츠 아웃> 속 라스베이거스

"알리는 내가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지. 그날 밤 그 링 위에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는 내 영웅이었단다. 그리고 그 라스베이거스 경기는 내가 본 가장 슬픈 광경이었지." _<라이츠 아웃> 시즌1 에피소드9, 에드 로미오

복싱을 다룬 영화 중에는 명작이 많다. 최근작인 <파이터>부터 <분노의 주먹> <알리> <신데렐라 맨>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리고 <록키>에서 시작해서 <록키 발보아>로 이어진 연작까지. 복싱만큼 영화에서 빈번하게 다뤄진 스포츠인 풋볼과 야구가 팀워크로 승리를 이뤄가는 데 반해 복싱은 링 위에 선 한 사람이 전신, 아니 정신을 다해 승리를 쟁취하는 ‘인간승리’의 스포츠다. 그렇기에 감동도 더하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도 많으리라. 하지만 사정없이 글러브를 날리는 상대에 밀려 링의 한쪽 코너에 몰린 복서의 모습을 볼 때면, 저기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가 사지(死地)란 말인가 하곤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나는 복싱 팬이 아니다. 우선 때리고 맞아야 하는 규칙이 싫다. 팬츠와 글러브 한쌍으로 완성되는 유니폼도 단출하다. 누군가가 복싱은 경제가 어려울 때 인기를 얻는 스포츠라고 했는데, 그 아이디어도 불쾌하다. 마지막으로, 헤드기어 없이 경기가 치러진다는 점이 가장 싫다. 내가 기억하는 복서의 승리는, 땀방울과 눈물의 시간을 보상받은 환한 미소가 아니라, 얼이 나간 자리를 피멍이 채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경기는커녕 복싱영화도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백건대 나열한 영화 중에서 실제로 본 영화는 <파이터> 딱 1편이다. 한데 영화는 아니지만 나의 복싱 필모그래피에 한편이 더해졌다. 미국 케이블 채널 <FX>의 <라이츠 아웃>이다.

상투성 속에 빛나는 인간드라마

<라이츠 아웃>은 은퇴한 헤비웨이트급 챔피언 패트릭 ‘라이츠’ 리어리(홀트 맥칼라니)가 링 위로 돌아가는 구불구불한 여정을 기둥 줄거리로 삼은 TV시리즈다. ‘구불구불’을 단서로, 인간극장을 상상하지 말 것, “당신이 그만두지 않으면 내가 그만둘 거예요.” 5년 전, 경기 중 실신해 실려온 패트릭에게 부인 테레사(캐서린 매코맥)가 내밀었던 단호한 으름장 덕분에 링은 떠났지만, 챔피언 벨트의 주인공이었던 그의 삶은 궁상맞지 않다. 넉넉한 은퇴자금으로 가족의 노후대책도 마련했다. 트레이너였던 아버지(스테이시 키치)에게 체육관을 선물했고 집 나간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여동생 마거릿에겐 식당을 선물했다. 매니저로 활동했던 동생 조니(파블로 슈레이버)는 MBA 과정에 보내 자금관리를 맡겼다. 의료보조원이었던 테레사의 의대 진학을 도왔고 토끼 같은 세딸은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호화판까지는 아니어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포츠 스타의 안락한 은퇴였다. 시청자는 링 위의 패트릭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5년 전의 패트릭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리처드 ‘데스로우’ 레이놀즈(빌리 브라운)와의 마지막 경기를 회상할 때뿐이다. 실신한 뒤 스플릿 판정(2:1로 심판 3인의 판정이 갈린 경우)으로 ‘데스로우’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준 이후, 패트릭은 복서가 아니라 아들로, 남편으로, 세딸의 아침밥을 차리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앞치마를 두른 아버지로 5년을 살았다. ‘은퇴한 스포츠 스타를 위한 매뉴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패트릭의 삶일 듯하다. 그는 사교모임에 나가 빙고게임의 숫자를 뽑아주고 수표를 받는다. 카펫 판매점 지역 광고를 찍는다며 싸구려 나일론 가운과 종이왕관을 쓰고 “카펫 킹을 찾아주세요”라는 대사를 훅과 잽을 날리며 읽는다. 홈쇼핑 채널에 출연해서는 “바로 5년 전 그 경기에서 사용했던 글러브”라며 경매에 붙인다. 링을 떠난 그는 조금은 의기소침해 보인다. “이렇게 저렇게 얼굴을 비추면 나중에 해설이라도 할 수 있대.” 그런데, 5년 전 그 경기는 유령이 되어 패트릭의 주위를 늘 맴돈다. 돌아오지 않겠냐고 손짓하고, 유혹한다.

<라이츠 아웃>은 패트릭이 복귀하는 설정의 개연성을 위해 재정난이라는 상투적인 수류탄을 투척한다. 벌여놓은 것이 많아 잃을 것도 많은 남자. 탈세 혐의로 국세청의 조사까지 받게 되자 주저하던 패트릭은 악마와 손을 잡는다. 할 브레넌(빌 어윈)이라는 소문난 갱이 연락해왔는데 그에 응하고 만 것. 언제나, 처음만 힘들다. 한번 진창에 발을 담그자 그 뒤 패트릭의 수렁은 깊어간다. 할을 위해 치과의사의 팔을 부러뜨렸고, 술집에서 비위를 거스른 취객을 때렸으며, 거짓말을 한 큰딸의 방문이 부서져라 두들겼다. 클럽에서 만난 콜걸을 집에 데려다주다가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차 사고를 냈다. 시력감퇴, 방향감각 상실, 기억력 저하, 잦은 분노와 우울증. <라이츠 아웃>의 또 다른 상투성은 ‘권투선수 치매’라는 시한폭탄마저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빠르면 2년, 늦으면 10년, 하지만 추측에 불과해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 앞에서 패트릭은 망연자실해지기보다는 복귀를 서두른다. 가장으로서 그의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챔피언 벨트의 진짜 주인이 ‘데스로우’가 아닌 ‘라이츠’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솔직히 <라이츠 아웃>의 클리셰는 너무 많다. 비열한 프로모터가 있고, 으스대는 도전자가 있으며, 각다귀처럼 들러붙는 혈육, 컴백에 대한 주변의 열망이 그렇다. 하지만 <라이츠 아웃>은 이 클리셰를 눈물 반 콧물 반 멜로드라마로 포장하는 대신에 서늘하게 그리고 건조하게 저속으로 긴장을 쌓아올린다. 사실 <라이츠 아웃>은 복싱드라마의 외피를 쓴 썩 괜찮은 휴먼드라마이고 덜 짜증나는 가족드라마다. 120분 안에 저 많은 클리셰를 우겨넣어야 하는 영화와 달리 <라이츠 아웃>은 13개 에피소드라는 TV시리즈 안에서만 가능한 시간의 속성을 활용해 나를 비롯해 복싱 팬이 아닌 여럿의 지지를 얻었다. 그저 한 복서의 인생역전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복싱을 둘러싼 많은 이슈들- 프로모터의 착취, 도박 경기, 약물 사용, 권투선수 치매, 프로모션의 허와 실- 을 효과적으로 스토리 안에서 녹여낸 점부터가 다르다.

복싱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층층이 쌓여온 긴장이 폭발하는 무대는 라스베이거스의 복싱 경기장이다. ‘도박과 쇼의 도시’에 더해 ‘세계 복싱의 수도’라는 별명도 겸비한 라스베이거스는 기실 복싱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도시다. 수십년간 이른바 빅 매치들은 모두 라스베이거스를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크 타이슨의 그 유명한 ‘귀 사건’ 역시 MGM그랜드가든의 아레나에서 벌어졌다. 패트릭이 ‘데스로우’ 레이놀즈와 5년 만에 마주하는 챔피언십 매치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라이츠 아웃>의 주무대는 뉴저지의 베이온이다. 아버지의 체육관, 여동생의 식당, 그리고 가족의 저택 모두 베이온에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마지막 회에서야 등장한다. 에피소드 12회를 통한 패트릭의 고된 트레이닝과 치매에 대한 불안,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나쁜 결과들은 오직 이 라스베이거스 경기를 값지게 만드는 역경에 불과했다. <라이츠 아웃> 마지막 에피소드가 후반 20분을 경기장면에 고스란히 바치기로 한 결정은 클라이맥스를 위한 당연한 결정이기도 했지만 어느새 몰이해가 연민으로 바뀐 나의 눈에는 링 위에서 수없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야 했던 복서들을 위한 위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데스로우’와 ‘라이츠’의 흥미진진한 경기를 지켜본 내게, 연민이 무슨 말, 아드레날린만 가득했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고백해본다.

호평과 호연에도, <라이츠 아웃>은 4월5일 시즌1을 마지막으로 종영됐다. 한주 전까지 작가이자 총괄제작을 맡은 워런 레이츠가 구체적인 줄거리를 언급하며 시즌2의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쳤으나 시청률을 이길 챔피언은 없었다. 이럴 땐 조금 아쉽다. 프로복서인 친동생을 둔 덕분에 “특정한 리듬과 움직임을 가진 복서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는 홀트 매칼라니는 특히 <라이츠 아웃>의 발견이라고 부를 만한 배우다. 조금 늦은 스포트라이트마저 빼앗긴 매칼라니가 언제 또 이렇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놀 수 있을까, 아니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