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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영화는 제자리걸음… 독립장편은 저변 확대에 성공했죠 (2)

2011년 상반기 한국영화 결산 - 남다은·안시환·장병원… 전영객잔 논객 3인 대담

장병원_올해 상반기를 전반적으로 돌아보면, 제도권 밖에서 만들어진 비주류영화, 독립영화라는 틀로 묶을 수 있는 일련의 영화 중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주로 나왔던 것 같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독립장편영화의 올해 상반기 선전을 일종의 역학관계에 따른 현상으로 본다. 말하자면 충무로의 기성 상업영화, 제도권 영화 중 창조적인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았거나 주목할 만한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기성 충무로영화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관객의 의지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독립영화들이 선전했다는 것은 반대로 한국영화의 제도권, 기성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그 허약한 토대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시환_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 상반기를 돌아보면 최근 몇년간 이렇게 아무런 기대 없이 상반기가 끝난 경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독립영화 진영에서 나온 몇편의 영화, <혜화,동> <파수꾼> <무산일기> <짐승의 끝>은 확실히 일반 주류영화와 다른 시도를 하며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했다고 본다. 하지만 올해 새롭게 주목받은 감독들이 과거의 선배들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역량을 유지하며 메인 스트림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지금의 산업구조에서는 새로운 감독들의 신선한 시도를 허용하는 폭에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남다은_주류영화를 전제로 얘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앞서 얘기한 작품을 만든 젊은 감독들이 주류영화계에 변화를 가져오거나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나로서는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파수꾼>을 예외로 두자면, 그들이 상업화된 쪽에서도 자신의 화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곡사 형제의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주목받은 영화들이 미학적으로 새로운 시도나 화법을 구사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다만 독립장편영화 시장의 저변이 다양화되고 안정된 토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쟁점도 매력도 있는 <무산일기>

안시환_<무산일기>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무산일기>는 분명 쟁점도, 미덕도 있는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과대평가 받은 영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전승철이란 인물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극적 요소를 거치며 상투적인 느낌으로 변해버린 듯한 아쉬움을 유발하는 작품이었다. <무산일기>가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점이 이 영화를 평가하는 데 일종의 착시현상을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고 본다. 냉정하게 말하면 국내보다는 해외영화제에서 상당히 관심받을 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한편으로, 이 영화를 두고 다르덴 형제의 영화미학을 많이 말하는데, 다르덴 형제와 <무산일기>를 곧장 결합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이창동을 개입시키는 게 <무산일기>의 미학을 얘기할 때는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무산일기>는 다르덴의 미학과 표면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핸드헬드 촬영 기법을 사용한다거나 인물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는 태도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런 기술적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다르덴 형제가 영화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요소들을 <무산일기>가 얼마나 구현해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의구심이 든다.

남다은_<무산일기>의 미학을 지난해와 지지난해 개봉하고 주목받았던 독립장편영화들, 이를테면 <사람을 찾습니다> <똥파리> <애니멀 타운> 등과 연관해 함께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핸드헬드, 롱테이크 촬영 기법이 이런 영화들의 인장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너무 과잉이거나 너무 공허하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을 받는 걸까 생각해보니 이 영화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거칠게 이 영화들의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타자, 폭력, 죽음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요즘은 거기에 ‘동물’이라는 키워드가 덧붙여졌지만. 어쨌거나 이들 영화가 타자를 재현하는 윤리에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이 영화는 타자들을 장르로 소비하지 않겠다, 인위적으로 드라마화하지 않겠다, 카메라가 인물들 앞으로 먼저 나가서 인물을 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영화가 타자의 세계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개입을 할 수 없다는 믿음을 형상화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핸드헬드나 롱테이크 기법도 그런 맥락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타자의 일상을 관찰하는 데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태도와 타자를 영화적인 활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충돌한다는 데 있다. 일종의 궁지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흔한 방식으로 폭력이나 죽음, 상투적인 사건을 개입시켜 타자를 타자로서 드러내도록 하고 있다. <빗자루, 금붕어 되다>나 <애니멀 타운>을 보면 놀랄 만큼 집요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따라가던 영화가, 타자가 폭발할 때는 상투적인 사건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개입시키고 있다. 그런 사건을 개입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미학으로 그 공백을 채운다. 이런 현상을 서사의 실패, 이야기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얘기해볼 수도 있을 텐데, 여하튼 <무산일기>가 특이했던 점은 영화적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상투적 사건을 배제하려 애쓰다가, 강아지 백구를 죽이고 거기서 멈추지 않나. 그러므로 이 영화는 미학으로 사건의 공백을 채우는 경우다.

<무산일기>

장병원_<무산일기> <파수꾼> <혜화,동> 세편을 놓고 본다면 <무산일기>가 다르덴의 스타일에 가장 가깝다고 본다. <무산일기>는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나 <로제타>처럼 핸드헬드 촬영을 사용하는데, 이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미스터리 같은 것이다. 이들 영화는 상당히 갈등이 진행되어 있는 상황에서부터 시작한다. 관객은 사건에 완전히 이입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굉장히 모호하고, 심리적으로 영화에 동기화되지 않은 상태로 들떠 있는 카메라를 따라간다. 하지만 이미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의 입장에서 보면 핸드헬드는 인물의 동요하고 흔들리는 심리상태에 밀착되어 있는 촬영 기법이다. 보는 사람은 혼란스럽고, 영화 속 인물에겐 밀착되어 있는 그 촬영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이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이라면, <무산일기>는 그런 이질감을 잘 전달하는 것 같다.

남다은_카메라의 스타일과 서사가 긴밀하게 연동되고 있다는 의견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카메라와 서사가 긴밀하게 연동되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서사적 실패 혹은 실패라기보다 중단이나 포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무산일기>는 서사가 더 나아가야 할 지점에서 영화를 중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구의 죽음을 영화의 마지막에 배치해놓고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을 곤충 관찰하듯이 밀고 나가지만, 더 다뤘어야 할 백구의 죽음 이후를 다루지 않는다. 정작 다뤄야 할 부분들을 이 영화가 피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안시환_<무산일기>는 특이하게도 초반부와 후반부의 구성이 다르다고 봤다. 아까 장병원씨도 얼핏 얘기했는데, 영화의 초반부에는 주인공 전승철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밀어붙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극적인 요소가 개입된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이 분열되었다는 느낌이다. 관객이 <무산일기>를 사실주의적인 영화라고 하는데, 초반부엔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어느새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영화로 변해버린다. 내가 불편했던 부분은 미리 극적인 구성요소를 다 만들어놓은 다음, 이 극적 요소에 어울릴 만한 에피소드를 영화 초반부의 일화로 선택해 그것이 전승철의 모습인 것처럼 역으로 구성했다는 점이었다.

장병원_영화 속 강아지 백구의 죽음 이후 어떤 부분이 더 나왔어야 한다고 보나.

남다은_<무산일기>는 주인공을 피해자, 희생자, 타자의 위치에 놓고 끝까지 몰아붙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과 유일하게 가까운 대상(백구)이 죽은 건데, 그 이후에 전승철이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아갈 것인지, 전승철에게 어떤 언어의 도구를 주어서 영화적으로 언어화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시환_비슷한 생각이다. 엔딩 부분에서 감독이 판단을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입장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겠다. 하지만 백구의 죽음 이후 멈춘 이 영화를 두고 다르덴 형제의 엔딩, 이창동 감독의 엔딩과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감독이 어떤 판단을 관객에게 원하는지 느끼지 못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런 판단을 회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산일기>에는 감독의 판단이 내재해 있는지, 그게 관객에게 잘 전달된 것인지, 혼란스럽다.

한국 독립영화의 현재, <파수꾼>과 <혜화,동>

안시환_개인적으로 상반기에 나왔던 독립장편영화 중 <파수꾼>을 주목할 만한 영화로 꼽고 싶다. 누군가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오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초점이 아버지에서 친구로 넘어가는 방식, 이야기에 오해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방식들이 그랬다. 처음에 영화가 시작되면 소년의 아버지로 보였던 사람이 아들의 죽음과 관련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고,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나. 그 과정을 보면 분명 아버지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어느 순간 그 아버지가 사라진다. 이것이 내러티브적인 장점일지 단점일지 모호했지만, 이야기의 조사자 자체를 바꿔나가면서도 이야기를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는 힘은 분명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남다은_개인적으로 <파수꾼>이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기존의 남성 성장영화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기존의 남성 성장영화에선 이야기의 핵심이 사회에 대한 분노나 가부장제에 대한 반항으로 나아가지 않나. <파수꾼>은 이러한 ‘핵심’이 없는 대신, 핵심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이 굉장히 섬세하게 드러나고 있단 점에서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일례로 <사랑니>가 대중에게 지지받지 못했던 이유에는 구조적 복잡함도 있었지만, 그 구조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을 관객이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구조가 모든 이야기를 포괄하고 있지만, 구조가 핵심으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그 구조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기존의 남자 성장영화와 비교했을 때 신선했다.

장병원_<파수꾼>의 구조와 정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흔히 한국영화에서 내러티브라고 하면 영화의 내용, 즉 이야기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파수꾼>에서는 그러한 한국적인 내러티브에 대한 방식을 타파하고 극복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보였고 내게는 그런 점이 굉장히 혁신적으로 다가왔다. 이야기의 감성, 영화의 형식이나 스타일, 더 중요하게는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에 대한 태도나 철학도 그런 구조가 만들어낸 거라고 본다. 구조와 구조 이외의 것들을 분리하지 않고 연동하고 결부해 하나의 영화로 엮어나가려는 태도나 방법론을 찾았다는 것이 <파수꾼>의 주목해야 할 지점이라 생각한다. 이야기 자체를 놓고 보면 굉장히 평범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지만, 그런 소재나 이야기를 아주 창조적인 방식으로 조합하고 배열해 비범한 이야기가 된 경우다. 예컨대 영화에서 실제로 주인공 기태가 그 여학생에게 상처가 될 말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처럼 미해결된 요소들이 많이 있기에 영화가 중요한 부분은 봉합시켰음에도 열린 상태로 끝나게 된 거다. 꽉 짜인 구조 안에 느슨함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아까 안시환씨가 말했던, 아버지가 사라지는 부분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적인 드라마 구조에선 아버지가 사라진다는 것이 이야기의 흠결이나 문제로 보였을 텐데, 이 영화에서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은 건 관객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선택해 그걸 연결지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안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 있도록 이야기가 구축돼 있다는 점 때문이다.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나 서사의 방법과 견주어보면, 일종의 정보를 제공하고 보는 사람들이 중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다시 말해 관용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파수꾼>은 혁신적인 측면이 있다.

남다은_올해 상반기 주목받은 독립영화 중 <혜화,동>이 이야기의 새로움은 하나도 없지만 가장 감흥을 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른 영화들이 어떤 지점에서 끝나는지 보자. <파수꾼>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향수화하며 끝나고 <무산일기>는 멈춰버리고 <짐승의 끝>은 뭔지 잘 모르겠고 <애니멀 타운>은 다 죽어버린다. <혜화,동>은 주인공 여자가 플래시백이 아니라 후진을 해 보듬어 안아야 할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향해가며 끝난다는 점에서 형식과 내용을 떠나 다른 영화에 비해 정서적인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병원_<혜화,동>에서 중요한 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인데, 이런 방식을 채택하는 게 과거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예전에는 관습적으로 플래시백을 쓰거나 특정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마련해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그런데 <혜화,동>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할 때 그 연결고리가 되는 매듭들을 관습적인 플래시백을 쓰지 않고 굉장히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할머니가 새끼줄을 잡고 화장실에 가는 장면이 있다. 이때 할머니의 손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며 과거와 현재를 그 손으로 연결한다. 고전적 방식으로 편집할 때는 과거와 현재 장면의 형태, 시선, 액션을 일치시키는데, <혜화,동>의 ‘손’은 과거와 현재 장면에서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건 <혜화,동>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다. 영화 자체의 호흡은 굉장히 느리고 완만한 리듬이지만, 혜화가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려올 때 유괴를 암시하는 부분 등 몇몇 장면은 서스펜스영화, 장르영화처럼 연출됐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한국영화계를 돌아보면 패배나 무력감의 정서를 전반적인 기조로 깔고 있는 작품이 많은데, 그건 비단 올해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주로 화제가 되는 영화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활달하고 활기찬 세계관을 반영하기보다는 슬픈 정서에 기반하고 있었고, 구조적으로 무기력하고 실천의 무력함을 반영한 영화가 대다수를 이루는 게 최근 몇 년간의 경향인 것 같다. 그런데 <혜화,동>이 친밀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제시하는 낯간지럽지 않은 건강성 때문이다.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자기 방식의 이야기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혜화,동>의 민용근 감독은 정서적인 섬세함과 건강함,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남다은_이 시대의 비극을 다룰 때 상업영화는 주인공이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한다. 반면 독립영화는 비극이 벌어진 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지옥 같은 삶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혜화,동>의 마지막 장면이 위로를 전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앞으로의 영화들은 <혜화,동>처럼 정서적 무력감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앞서 계속 언급했던, 사건 이후의 지지부진한 삶을 전시하며 타자의 행위는 제거해버리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타자의 삶을 그 정도도 못 보여주는 영화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정서적 무력감을 보여주는 것이 아예 주제가 되어버린 영화들도 있으니까.

안시환_무력함, 무능함의 정서를 독립영화에만 적용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부터 주인공을 어쩔 수 없는 난관에 툭 던져놓고 가학적으로 즐기려는 태도들이 상업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달리 말하면 인물이 적대자로부터 선택권을 빼앗기고 리액션만 할 수 있는, 주인공이 상황을 스스로 개척하는 게 아니라 이끌려가는 상황이 계속 등장해왔다.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래도 독립장편영화에서는 상업영화처럼 가학적으로 그 무력함을 대하려는 태도를 느끼진 않았다. <혜화,동>을 예로 들어 보겠다. 이 영화의 엔딩은 굉장히 순진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싫지 않았던 정도다. 혜화가 후진기어를 넣어 한수에게 가는 장면은 굉장히 낯설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혜화가 떠나거나 아무 동작도 못하고 멈췄을 때 끝났을 거다. 그런데 혜화가 후진기어를 넣었을 때, 굉장히 순진한 결말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거기에 싫지 않은 감정이 든 거다. 이 영화에 내가 설득됐다는 방증일 거다. 무력함에서 벗어나려고 이런 엔딩 장면을 선택했을 것인데 그때 엔딩의 정서는 순진함을 택하는 거다. 이건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무력함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독립영화들이 제대로 발견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으니까.

임권택과 장률에 대해

장병원_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가 없는 상반기였다. 하지만 임권택과 장률이 있었다. <달빛 길어올리기>와 <두만강>에 대해서 말해보자. 실제로 ‘전영객잔’ 지면에서도 다룬 적이 없거나 많지 않다.

남다은_<달빛 길어올리기>를 보고 나서 내가 뭔가를 영화에서 놓쳤거나 영화가 얘기를 하다 말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곰곰이 생각하니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늘 볼 수 있던 ‘대상’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지를 예로 들면, 한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장인이 나와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장인을 거쳐 한지의 세계로 이르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다리’가 이 영화에는 없다는 것이다. 전직 한지공예가 효경(예지원)이 그 교량 역할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다. 그런 점 때문인지, 어떤 식으로든 감정 이입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질적인 느낌을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결합한 이 영화의 구조와 함께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결합이 이질적이면서도 서로 충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두개의 충돌 때문에 괴이한 느낌을 충분히 전달받기는 하는데,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서글픔이나 고통이나 예술적인 경지 등에 관해서는 영화가 아예 다루기를 거부했다는 인상도 받았다.

<달빛 길어올리기>

안시환_이 영화가 <취화선> 같은 영화였다면 예지원씨가 연기하는 효경이란 인물이 영화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지의 상황이란, 불구가 되었거나 사라진 문화인 것이다. 알레고리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이 영화는 효경이란 인물을 통해 현재 한지가 처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가 ‘한지의 세계를 다룬다’고 말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겠지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사라진 한지의 세계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다룬다’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 시작점이 한지를 만드는 장인 자체가 아니라 장인이 존재할 수 없는 현실적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영화 같다. 그래서 필용이나 효경 같은 매개자의 역할이 <취화선>의 장승업이라든가 <서편제>의 송화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장병원_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합일되는 장면들이었다. 처음에 다큐멘터리는 프레임이 있는 TV 화면 속이나,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의 카메라에 담기는 식으로 영화에서 보여진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를 담았던 프레임이 사라지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와 합일되는 장면이 있다. 임권택 감독은 그 이전에도 <춘향뎐> <서편제> 등을 통해 다른 예술의 세계를 어떻게 영화 안에 담을 것인지 고민해왔다. 예를 들면 <서편제>에서는 그것이 판소리의 세계였고, <취화선>에서는 그림의 세계였다. <달빛 길어올리기>도 임권택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한지라는 하나의 세계를 영화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이 느껴진다. 지원이 찍었던 한지 다큐멘터리가 그대로 다큐 시사회의 한 장면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보면 <달빛 길어올리기>라는 영화와 지원의 한지 다큐가 합일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장면이 마치 <춘향뎐>에서 판소리를 시연하며 판소리 내부의 세계와 바깥의 영화가 합일됐던 순간처럼 느껴졌다. 필용이 지원과 자동차를 타고 달빛이 비추는 밤길을 가는 장면이나 필용이 집에서 창호문을 열었을 때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장면처럼 한지 안에 담긴 세계를 영화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고심한 장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춘향뎐>만큼 전면적이고 일관성있게 영화를 지배한다는 느낌은 덜했지만. 한지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룩을 어떻게 영화로 가져올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는 거다.

안시환_임권택 감독의 디지털 활용에 대한 부분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제까지 봐왔던 디지털영화의 색감과 <달빛 길어올리기>의 색감은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줬다. 다큐멘터리와 서사적 극영화를 어떻게 합일시킬 것인가 하는 지점과 함께 임권택 감독 자신이 과거에 늘 사용했던 필름과는 다른, 디지털영화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이 영화 속에 드러났다고 본다. 모든 장면이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몇몇 장면은 분명 기존의 디지털 영상이 보여주지 못했던 다른 색감과 질감을 구현해냈다. 디지털영화가 일반적으로 가벼운 느낌을 준다면, <달빛 길어올리기>는 일반적인 디지털영화보다는 묵직하면서도 일반 필름영화보다는 가벼운 느낌이 있다. 어쨌거나 기존 디지털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남다은_특히 달빛이 나오는 장면들에서 방금 말한 그 다른 느낌들을 받았다.

장병원_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오랜 주제였던 장인의 세계를 여전히 다루면서도 새로운 매체인 디지털카메라로 담아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면서 어떤 출발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그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장병원_<두만강>에 대해서는 남다은씨가 ‘전영객잔’에 글을 쓴 적이 있다.

남다은_할 말은 그때 다 했다. <두만강>에는 분명히 쟁점이 있고 그 쟁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거란 점에 대해서도 썼다. 여전히 이 영화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주인공 아이의 죽음, 도식성과 관념성 등이 이 영화의 쟁점이다. 장률 감독은 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왔지만 <두만강>은 그 자신의 고향에 대한 기억이다. 고향에 대한 감정들은 이미 지나간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실체로의 고향이 아니라, 원래는 물질적인 것임에도 지금은 추상적인 느낌으로서의 고향이다. 장률 감독은 고향이라는 그 복합적인 존재를 실체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장률 감독의 분열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아이의 죽음이나 순이가 겁탈당하는 장면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너무 과도한 순교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순교가 무언가를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봤을 때, 이 영화에서 아이의 죽음은 뭔가를 대신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이 영화가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진행되다가 아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주체의 입장에 놓고 시작했다는 생각이다.

<두만강>

장병원_모든 면에서 상당히 치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아이를 형상화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창호가 마지막에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이 느닷없고 별안간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볼 수 없는 지점도 있다고 봤다. ‘별안간’이라는 인상은 아이의 죽음이 어떤 특정한 사건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에 온 것일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창호가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암시는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창호의 죽음은 사건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일종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인간적인 교분이나 선의는 사라지고 관계는 파탄이 나며 서로에게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마을의 상황. 이처럼 전체적으로 암울한 죽음의 기운들이 영화 전반을 감싸고 있다. 그 결과로 아이가 죽은 것이다. 아이가 죽게 된 사건의 동기는 없지만, 심리적으로 암시는 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다. 아이의 죽음이 갑작스럽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 자체가 <두만강>의 방법론이나 결론을 해하거나 윤리적으로 문제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독일영년>에서 보면 아이가 갑자기 추락해서 죽지 않나. <두만강>을 보며 <독일영년>의 마지막 장면이 계속 겹쳤는데, 인물이 내면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정황상 충분히 죽음을 택할 이유는 있는 거다.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나 갈등구조에 이입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죽음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시환_창호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미 전조가 있었고, 중반부엔 배신의 모티브가 작용하고 그 결과로서 창호가 죽음을 택했다고 얘기했는데 나는 조금 다른 관점이다. 장률 감독의 관심이 죽음의 전조를 보여주는 데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가 현재를 잊어야만 과거를 더 그리워할 수 있고, 그 까닭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년의 죽음을 구조적으로 끼워넣은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다보니 창호의 죽음을 가혹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한 태도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장률 감독이 설정한 현재적 세계의 상황을 소년이 구현하기 위해 느닷없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한 게 아닌가 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라면 여전히 개운하지 않다.

남성적 향수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써니>

남다은_오늘의 대담을 상반기 최고 흥행작인 <써니>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보자. <써니>의 흥행은, 알려진 것처럼 과거 시절을 지금 여기로 불러와서 모든 정치성을 배제하고 그때 그 시절을 반복하는 그 쾌감이 크게 작동한 결과였을 것이다. <추격자> 이후 양산된 장르영화들에 대한 실망감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고. 연관된 의문이 한 가지 있다. <모비딕>처럼 자기 파괴적일 정도로 좌충우돌하는, 영웅까진 아니더라도 개인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매력적이기도 한 장르영화가 나왔을 때, 현재 대중은 여기에 철저히 냉소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가령 <추격자>보다 더 센 장르영화가 나오지 않는다면, 대중은 차라리 코미디영화, 캐릭터영화, 단편적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영화를 선호하는 것 같다. <써니>와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흥행도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두편 모두 시트콤의 서사다.

장병원_<써니>를 보면, 주인공들은 현재 누리는 이 생활이 넌더리가 나서 과거로 돌아가지만 실제로 과거로 돌아가보면 무엇이 없다. 아주 단조로운 형태의 유대감과 연대감, 칠공주의 자매애 정도만 있다. 그런데 관객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일종의 보상으로 보려 하는 퇴행심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써니>에는 과정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과거에 ‘써니’ 멤버로 활동했던 인물 중 나미(유호정)와 춘화(진희경)의 현재와 나머지 다섯 멤버의 현재는 좀 다르다. 각자 나름의 문제가 있지만,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면 어떤 제도화나 틀 없이 아주 단순한 형태의 유대의식만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과정이나 공감대나 설득 없이 과거로 건너뛰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해도 그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 저의에 깔린 의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조다시 청바지나 총천연색 촌티 나는 의상으로 과거를 향수하게 한 다음, 현재의 결핍을 보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를 착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대중에게는 오히려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안시환_나는 <써니>를 이전 향수영화와는 구별해서 보고 싶다. 2000년대 초반 향수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공백기가 있은 다음 <써니>가 등장했다. <써니>가 똘똘한 상업영화처럼 보인 이유는 과거 시절에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시절을 재현한 문화나 상품에 호소한 영화, 즉 기억에 대한 기억을 호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써니>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관객이 다양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주요 관객층인 20대뿐만 아니라 30, 40대 관객에게도 흡입력이 있다고 하더라. 먼저 80년대 시절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문화적인 보상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리 ‘소녀시대’를 즐기는 척해도 소녀시대가 나의 문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웃음) 그런 상황에서 <나는 가수다>나 <쎄시봉> 같은 프로그램들이 유행하는 것 같다. 한때 문화의 주류였으나 지금은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문화적인 보상으로 <써니>가 기능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써니>가 80년대 문화나 상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설정이 아닌 영화라는 것이다. 상업적인 성공 여부를 떠나서 과거의 향수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전략의 영화라고 본다.

장병원_<써니>는 남자들의 세계를 재현하는 특정화된 코드- 패싸움이나 욕- 등을 통해 쾌감을 준다. 자매애를 보여주는 방식이 남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감독이 남자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상업적으로 효과적인 코드였다는 얘기도 된다. 오히려 이 영화가 대중에 호응받고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남성적 코드를 가져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남다은_그러면서도 피 흘리는 장면이나 수컷들의 쟁탈전은 다 제거하고 노래와 춤을 끼워넣어 관객이 보기 편하고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 거다.

장병원_이상형이었던 왕자 같은 남자를 첫사랑쯤으로 좋아하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만난다는 설정 또한 전형적으로 남성화된 코드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남성화되었다고 말하는 건 영화적으로 관습화된 패턴이라는 거다. 예컨대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권상우와 한가인의 관계도 그렇다. 대상화되고 이미지로 존재하는 로맨스의 대상과, 그를 바라보며 가까이 가려 했지만 배신을 당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찾게 되는, 후일담처럼 소식을 전하는 그런 방식이 한국영화 속에 패턴화되어 있는데, <써니>는 그걸 그대로 가져와 여자주인공을 통해 똑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성의 방식이란 대체 어떤 걸까 궁금해졌다.

남다은_사실 그게 바로 미지의 영역이다. <고양이를 부탁해> 정도밖에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다. 아마 남자 성장영화처럼 여자 성장영화가 몇편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써니>에 대중이 열광할 것 같진 않다. 이처럼 여성 성장영화가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전략을 잘 쓴 영화이긴 하다.

안시환_이런 예로 <써니>를 정리해보면 어떨까. 재밌는 게, <써니>에서 짝사랑하던 오빠가 나미에게 이어폰을 꽂아주는 장면을 보면서 젊은 관객은 <라붐>이 아니라 <라붐>을 흉내낸 지오다노 광고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만약 감독이 <라붐>만을 상기하고 그 장면을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젊은 관객은 이미 코드를 알고 웃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써니>는 80년대의 재현보다도 그 시대를 다룬 상품들을 어떻게 적절히 활용할 것인지에 더 중요한 초점을 둔 영화다. 기존의 남성 향수영화들을 <써니>가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지적하면서 오늘 좌담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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