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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아시나요? (1)

한국영상자료원의 숨은 걸작 5편

지금 당신의 발견을 기다리는 영화들의 목록이 있다. 김수용의 <혈맥>, 조해원의 <불나비>, 최무룡의 <나운규 일생>, 유현목의 <>, 그리고 임권택의 <가깝고도 먼 길>. 감독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제목은 낯선 영화들이다. 그 감독의 알려진 영화들에 비하면 다소 모자라거나 넘치는 영화들이지만 이중에는 모두가 잊고 지낸 걸작도 있고 마니아들의 눈도장을 기다리는 작품도 있다. 어쨌건 손에 닿을 수 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영화들이다. 여기 한국 고전의 상상의 박물관을 뒤지는 5명의 전문가가 비장의 5편을 일러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VOD로 관람 가능한 영화들만 선정했다.

욕망의 속살을 냉정하게 끄집다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

<혈맥>

김수용의 영화세계는 동시대의 김기영, 이만희의 그것에 비해 덜 극적으로 보인다. 김수용, 그 자신이 시스템에 반해 자기 것을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제작자들의 주문에 맞추면서 슬쩍 자기 것을 겹쳐놓는 쪽을 택했다. 대체로 그의 영화는 깔끔하고 맵시 있으며 군더더기가 덜한 만큼 진한 맛도 적다. 나는 그가 제작자의 요구를 받아들인 적응력이 그의 영화를 덜 찰지게 만든 요인이라고 본다. 어떤 한계를 굳이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장인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과 의식은 동시대 한국영화의 평균을 훨씬 넘어서 있다.

110편에 가까운 김수용의 작품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으나 적어도 문예영화와 모던한 스타일리스트로 한정될 수 없는 세계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영화들은 적지 않다(나는 김수용의 초기 코미디영화들도 한국영화사에서 과소평가된 감이 있다고 본다). 지금부터 추천할 <혈맥>은 그가 서민적 일상성을 다루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영화는 그때까지 희극영화 감독으로 은근히 하대받던 김수용이 마음먹고 연출한 리얼리즘 소재의 작품이며 대종상과 부일영화상 등에서 주요 상을 휩쓸었다. 리얼리즘 소재라고 했으나 <오발탄>처럼 스타일은 매우 표현주의적이다. 해방촌 산비탈을 무대로 북한에서 내려온 이북 출신 사람들이 힘겹게 살고 있는 모습을 담은 이 영화는 로케이션과 세트 촬영을 정교하게 이어붙였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한 월남 1세대인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뭐 하나 물려줄 것도 없으면서 출세할 것을 바라는 모습은 당시 유행하던 인정풍속극의 기류와는 한참 떨어져 있다. 아들이 미군부대에 취직해 살 것을 강요하거나 딸이 창을 익혀 돈 잘 버는 기생이 되길 바라는 부모의 열망이 그려지고 그런 부모들에 반항하는 자식세대들의 삶은 그들 나름대로 아무런 지향점도 갖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이 시절의 한국영화 가운데 이처럼 냉정하게 인간들의 욕망을 그려낸 작품은 드문 것으로 기억한다. 김수용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신파조의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속도감있게 흐르는 화면 위로 찌질한 것이 아니라 차마 제대로 응시할 수 없을 만큼 민망한 민낯의 욕망이 각양각색으로 전시된다. 윗세대의 가감없는 생존욕구와 달리 그 다음 세대의 욕망은 무정형이며 부유하고 있다. 그들은 부모세대의 기대를 거부하지만 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결코 인간을 경멸하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그려낸 당대 풍속도의 정확성이 별다른 오차없이 소름끼치게 묘사되어 있다. 영화는 방직공장에 취직한 자식들에게 부모세대가 덕담을 건네는 장면으로 끝난다. 오늘날의 대기업쯤 되는 큰 공장에 취직한 자식들을 흐뭇하게 여기는 부모의 시선을 담은 엔딩의 터무니없는 낙천성은 물론 검열을 의식한 것이겠지만 막 도래한 군사정권의 기세가 늠름하게 화면에 울려퍼진다.

<혈맥>은 영화 매체에 숙련된 김수용의 재능이 만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김승호, 황정순, 김진규, 최남현, 신영균, 최무룡, 신성일, 엄앵란, 조미령 등 배우들의 매력도 대단하다. 날림으로 찍어대던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실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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