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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아시나요? (2)

한국영상자료원의 숨은 걸작 5편

진짜 팜프파탈이 왔다

조해원 감독의 <불나비>(1965)

<불나비>

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와 연구원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한국영화사의 숨은 걸작쯤으로 운위되던 일군의 목록이 있었다. 여기서 소개할 <불나비>를 비롯하여 정진우의 <하숙생>, 강범구의 <동굴 속의 애욕>, 이성구의 <지하실의 7인> 등의 몇몇 작품이 그것이다. 이른바 정전이나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고 충분한 조명을 받는다 할지라도 기존 정전과 작가의 명단을 뿌리째 흔들 엄청난 작품들은 아니지만 1960년대 한국 영화사를 풍요롭게 만든, 그냥 묵히기엔 아쉬운 그런 영화들이다. 2008년 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 때 작은 섹션으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한번의 소개로는 한계가 있었던지 여전히 이 영화들은 작품성에 걸맞은 정당한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

<불나비>가 흥미로운 것은 무엇보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영화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팜므파탈’은 다분히 <지옥화>(신상옥)의 쏘냐(최은희)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쏘냐는 물론 막강 팜므파탈이자 악녀계의 원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캐릭터가 1950년대 맹위를 떨치던 미국영화의 정신적 영향력과 기지촌 여성이라는 실존성이 묘하게 결합된, 말하자면 현실과 가상의 조합의 산물이라면 <불나비>의 여주인공 민화진(김지미)은 누아르라는 장르가 만들어낸 완벽한 영화적 존재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민화진은 누아르영화의 전형적인 신비로운 악녀처럼 보인다. 그녀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고, 행동은 설명되지 않으며, 그 녀 주위의 남자들은 모두 죽는다.

미스터리한 여성이 있다면 이 여성을 탐사하는 남성이 있게 마련이다. 탐정이 없는 한국에서 나름의 대안으로 변호사로 설정된 성훈(신영균)의 말투와 복장은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의 판박이다. 특히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누는 여비서와의 우정은 노골적으로 <말타의 매>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설정들은 이제 한국의 영화 장르가 한국적 현실이 아니라 영화라는 스스로의 계보에 토대를 둔, 세계영화의 상호 참조를 따르기 시작한 새로운 경향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이자 아쉬움)는 있다. 범인을 제외한 모든 비밀, 특히 누아르영화의 생명인 ‘여성의 정체’가 너무 빨리 밝혀진다는 것이다. 밝혀진 여성의 정체는 악녀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깝다. 미스터리한 악녀는 신파의 여주인공과 뒤섞인다. 거기에 성훈은 최소한의 거리감도 없이 민화진을 사랑해버림으로써 하드보일드 탐정이 가져야 할 냉철함을 상실한다. 이는 완벽한 악녀나 ‘멜로’ 없는 영화를 당대 한국 관객이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터인데 결국 이들 설정은 말하자면 누아르의 한국화를 위한 약간의 통과의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나비>는 레이먼드 챈들러적인 세계를 한국에서 구현한 가장 그럴듯한 모방작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 모방이란 폄하의 의미가 아니다. 이 영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나리오작가 김강윤이 “멜로나 액션 일색인 방화에 염증을 느껴 기획한 미스터리 시리즈의 제1작”이었다. 모방의 의지와 기성의 것에 대한 염증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관문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원조 격 팜므파탈 영화 <지옥화>에서 조연을 맡았던 조해원의 감독 데뷔작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신인감독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세련된 연출감각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팁 하나. 이 영화의 주제곡 <불나비>는 영화보다 더 유명하다. 가수 김상국이 출연하여 노래도 부르고… 살해당한다!

자기 파괴적 예술가의 초상

최무룡 감독의 <나운규 일생>(1966)

<나운규 일생>

어두운 골목길. 병색이 완연한 사내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불 켜진 문간방의 작은 창을 바라본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어린 소녀의 기침 소리다. 사내는 추위 때문인지 외투 깃을 단단히 여미며 제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다. 우연인지, 아니면 창밖의 기척을 느낀 여자의 직감인지, 생활고에 찌든 행색의 여인이 대문을 열고 나온다. 움찔하는 사내. 여자는 사내를 보고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라 주먹 쥔 손을 가슴으로 모은다. 사내는 나운규로 분한 최무룡이고 그 앞에 선 이는 그의 아내이다. 그는 방금 기생 김지미의 품을 빠져나와 아내와 어린 딸이 살고 있는 초라한 집 앞의 골목에 서 있는 것이다. 얼마 만에 집에 온 것인가? 집에 돈 한푼 보태주지 않는 것은 그렇다치고 병 걸린 어린 딸이 보고 싶어 하니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 가라는 아내에게 나운규는 이렇다 저렇다 따뜻한 안부를 묻기는커녕 싸늘하고 단호하게 발길을 돌려 가버린다. 이럴 거면 왜 왔는가? 어린 딸과 초라한 아내를 뒤로하고 비틀비틀 기생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나운규. 동가식서가숙. 기생집을 전전하며 무일푼으로 삶을 산다. 기생방에 쪼그리고 앉아 시나리오를 쓰고, 기생이 벌어온 화대로 밥을 먹는다.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재능과 열기는 넘쳐나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대에 태어난 나운규는 자신의 작품이 검열에 갈가리 찢겨져 상영조차 힘든 상황에 절망한다. 하지만 그는 투항하지 않고, 자기 영화에 대한 원칙을 버리지 않는다. 그 고집의 대가는 참혹하다. 관객과 제작자는 등을 돌리고, 일제는 더욱 혹독한 검열로 그를 괴롭힌다. 조강지처와 어린 딸을 버리고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패악질을 부려 근본이 없는 황폐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육체에 병마까지 키운다. 나운규는 자신의 불행과 죄의식에 대한 분노를 자신의 육체와 가정을 방기해버리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삶을 방기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삶. 파멸해가는 자신을 보면서도 정신의 칼만은 날카롭게 벼리려 하는 삶. 낭만주의 시대의 퇴폐적인 예술가이다.

이런 종류의 자기 파괴적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설득력을 가졌던 한국영화는 좀처럼 드물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최근의 예다. 영화배우 최무룡은 60년대 중반 자신이 감독을 하고 제작에 나선다. 첫 작품에서 흥행과 평가 모두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은 뒤 만든 이 영화는 군사독재 정권의 혹독한 검열 속에서 영화를 만든 그의 분노와 피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죽했으면 최무룡은 정권의 비위를 맞추는 <북한>(1968)이라는 반공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었을까?

영화 <나운규 일생>에서 최무룡은 영화배우이자 감독, 제작자였던 비운의 예술가 나운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최무룡의 나운규에 대한 감정이입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극중의 나운규는 검열로 망가진 자신의 영화에 분노하며 “운명의 근본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해석이란 또 무엇인가? 신이여! 우리 주먹으로 해결하자” 외치며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마지막 작품이 될 <오몽녀>를 촬영하던 중 피를 토하고, 혼절해서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고 누워 있는 병실에서도 나운규는 “진행! 진행! 내일 촬영 준비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화를 끝내고 싶다”며 기어이 일어난다. 그의 마지막 영화 <오몽녀>를 촬영하기 위해 촬영장으로 들어서서는 “이 나운규의 생명을 절약합시다” 소리치고 레디 고를 외친다. 영화의 라스트 장면을 찍고 “내 가슴이 뽀개진다”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을 거둔다. 영화배우 최무룡이 감독과 주연을 한 <나운규 일생>은 40여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한 예술가의 과잉된 자의식과 분노가 설득력있게 표현된 소중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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