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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커터칼을 금지하라

<혈적자: 황제암살단> <원티드> <사선에서> 등으로 살펴본 암살자의 도(道)

<혈적자: 황제암살단>

나이프 마니아인 친구가 있었다. 체격은 작지만 험악하게 생긴 청년이 허름한 아저씨 점퍼를 입고 인사동과 황학동을 돌며 칼날을 살피고 있노라면 상인들은 저런 인간에게 칼을 팔아도 되는가, 돈 몇푼에 양심을 넘기는 거 아닌가, 고뇌하는 얼굴이 되곤 했다. 착하게 생긴 내가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아유, 아저씨, 괜찮아요. 이런 쪼끄만 칼로 사람 죽일 것도 아니고.” 그러자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죽일 수 있어.” 넌 눈치도 없냐. 감히 친구를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좌판을 정리하는 아저씨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오래전 그 애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작고 평범한 싸움이 일어났다. 맞은 아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마침 주머니에 있던 주머니칼을 꺼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때린 아이를 한번 찔렀는데…. “즉사했어.” 뭐라고. “엄청난 우연으로 어딘지도 모르면서 정확하게 급소를 찌른 거지. … 마치 킬러처럼.” 친구는 침통하게 말했다.

그랬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정치 세력을 등에 업고 치밀한 계획하에 혼자 미국 대사를 죽이러 가면서 총도 아니고 폭탄도 아니고 과도와 커터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는 뉴스를. 과도는 찌르는 용도요 커터칼은 베는 용도일 터이니, 작다고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주머니칼로도 사람은 죽는다, 엄청난 우연이긴 했지만.

<원티드>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는 암살자들을 믿을 일이 아니다. 일단 현실에선 첨단 무기는 필요 없다. 제목 때문에 그 목표가 헷갈리는 <혈적자: 황제암살단>(사실은 황제‘의’ 암살단, 황제는 죽이지 않는다)은 조총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치명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쓰기엔 매우 거추장스러운 무기가 특징인 암살단인데, 바퀴를 칼날 위에서 굴리다가 철제 채찍으로 감아 던진 다음 사람 목에 걸어 내장된 칼날로 목을 베는 4단계 공정을 거쳐 작업을 한다. 거, 문외한이 보기에는 검이나 활이 더 편해 보이오만…, 아님 과도라든지. 게다가 이거 챙챙챙 소리 난다고. 몰래 하니까 그늘 암(暗), 암살일 텐데, 엄청 시끄러워.

또한 현실에선 암살단까지도 필요 없다. 혼자 적진에 침입해도 근거리에 접근, 암살 대상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데, 그 상처가 어찌나 치명적이었던지 수십명이 모여 부채춤을 추며 하늘의 마음을 움직여야 치유된다고 믿어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부채춤은 잔칫날에나 추는 걸로 알고 있던 내 상식의 허를 찔렸다.) 중국의 운명이 걸렸다더니 고작 여덟명이 모여 쑨원 암살을 막겠다는 <8인: 최후의 결사단>을 보자. 눈썹 없는 얼굴과 곧게 뻗은 검은 머리카락이 모나리자를 닮은 유학파 염 장군이 정예군 수십명을 풀었는데도 인력거 끄는 청년과 두부장수, 사랑 타령하는 노숙자 등이 모인 오합지졸에 막혀 쑨원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한다. 중국 경제가 어려웠다던데 괜히 인건비만 많이 들고. 현실이 이럴진대 재능이나 훈련이라고 필요할 리가 없다.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났으나 10년 넘게 숲속에 고립되어 킬러 훈련을 받은 <한나>의 한나는 무엇을 위해 청춘을 허비했던가, 심장 박동이 1분에 400회가 넘는다는 이유로(그러니까, 그게 일종의 초능력이라는데…) 천년 전통의 암살단에 영입된 <원티드>의 웨슬리는 무엇을 위해 훈련이랍시고 주먹과 통돼지 시체로 얻어터졌단 말인가, 북한 몇번 갔다오면 되는 것을. 같은 북한에서도 <쉬리>의 이방희는 몇년 동안 죽도록 훈련받던데,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더니, 어째 현실이 영화보다 만만하다.

그렇다면 예리한 두뇌라고 필요할 것인가, 그럴 리가. <300>의 제라드 버틀러가 안타깝게도 몸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암살자로 나오는 (슬퍼하거나 당황할 관객을 위해 체포되는 장면에서 딱 한번 맥락 없이 웃통을 벗기는 한다) 영화 <모범시민>은 폭격기까지 동원하고도 놓친 사냥감을 첨단 기술로 잡는 암살의 ‘두뇌’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아내와 딸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돈 벌고 땅 사고 사냥감의 동태를 파악하는 동시에 무기를 준비하며 기다리다 보니 세월은 유수와도 같더라. 반면 미국 대사를 죽이겠다고 10년 동안 과도와 커터칼을 갈거나 첨단 과도와 커터칼을 개발했을 리는 없으니 역시 암살은 속전속결이다.

<사선에서>

전직 대통령 경호원인 영화 <사선에서>의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따르면 경호원의 사명이란 대신 총알을 맞는 거라고 한다. 암살범을 잡는 것보다 경호하는 대상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그날 미국 대사 대신 칼을 맞은 사람은 없고 범인은 대번에 잡혔다고 하여 대로변에서 석고대죄하는 사람이 경호원인 줄 알았더니, 요모조모 뜯어봐도 그냥 동네 아저씨로 보이는 어르신이 잘못했다고 빌고 있어서 당황했다. 요즘 경호원은 운동 안 하나. 하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경호실장도 (나이 많은) 주진모가 연기했었지, 그냥 동네 아저씨. 근데 경호원도 아니고 배후 세력도 아니고 암살범 형님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다시 한번 사과는 본인이나 관계자가 하는 거라 믿고 살았던 상식의 허를 찔렸다.

다행히 미 대사는 부채춤의 신력과 김치의 효험이 도우사 건강하게 퇴원했다. 이제 남은 것은 테러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뿐. 이를 위해 검찰과 경찰이 함께 뛰는 대규모 특별수사팀도 꾸렸다고 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초동수사 단계에서부터 검경 공조 체제를 가동한 경우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6년 5월에 피습됐을 때에도 검찰과 경찰은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수사를 벌였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및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비슷한 수사 체제가 가동됐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에 버금가는 당시 피습 사건에 사용된 무기는 커터칼. 거 봐, 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이제 과도와 커터칼 사용만 금지하면 한반도에는 테러 없는 태평성대가 열릴 것이다.

<사선에서>

얼굴 깔고 슈트만 입으면?

과도보다는 못해도, 암살자에게 도움이 되는 두세 가지 무기

철면피

<사선에서>의 암살범 미치 리어리(존 말코비치)는 머리도 좋지만 손재주 또한 뛰어나서 암살에 사용할 총을 직접 만든다. 세련된 화이트 색상에 클러치에도 들어갈 듯한 아담한 사이즈. 변장술 또한 출중하여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뻔뻔함이다. 한때 CIA 엘리트가 긴 금발에 청커버와 청바지로 통일한 패션으로 나다니려면 웬만큼 낯이 두껍지 않고는 못할 짓이다.

<원티드>

역사와 전통

천년 전 직조공들이 결성한 <원티드>의 암살단. 베 짜던 직조공들이 무슨 수로 암살 기술을 익혔으며, 그 중세 시대에 인간의 평균 심장 박동수는 어찌 측정하여 분당 400회 이상의 초능력자들만 골라 뽑았는지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자. 총알이 직선으로만 나간다는 건 선입견일 뿐, 원래 총알은 휘어지기 마련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입증하니, 이것이 천년을 쌓아온 지혜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원티드> 깡패들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본인들은 ‘신사’라고 주장하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또한 역사와 전통의 조직이다. 원탁에 앉았다고 무조건 기사, 슈트만 입었다고 무조건 신사.

<루퍼>

꿀보직

<루퍼>의 ‘루퍼’는 미래의 갱단이 타임머신을 태워 과거로 보낸 표적을 처단하는 직업이다. 사실은 이게 진짜 꿀보직이다. 미래에서 손발 묶고 두건 씌우고 사례금까지 함께 포장해 보낸 표적을 시간 맞춰 나가 장총으로 쏘기만 하면 된다. 이건 하늘이 내린 보직이 아닌가, 나도 하겠다. 단점이 있다면 계약이 해지된 순간부터 30년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이 험한 세상, 30년 더 살면 됐지 뭐 얼마나 더 살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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