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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새로운 챕터를 쓰다
이주현 사진 오계옥 2015-05-27

<간신> 민규동 감독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 민규동 감독의 작품엔 은근한 도발이 있다. 민규동 감독의 7번째 장편영화이자 그의 첫 번째 사극인 <간신>은 도발을 넘어 광기로 점철된 영화다. 연산군 11년, 채홍사로 임명돼 왕에게 조선 팔도 1만명의 여인을 바쳤던 간신 임숭재의 이야기인 <간신>은 소재부터 표현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는 작품이다. 만든 이의 각오가 단단히 느껴지는 영화랄까. 제작 과정 역시 험난해 영화를 찍으며 살이 쏙 빠졌다는 민규동 감독을 언론시사회 다음 날 만났다.

-2년 전 <끝과 시작>(2013)으로 인터뷰했을 당시, 차기작으로 무법천지의 해방공간을 배경으로 한 액션 누아르를 준비 중이라 했다. 그런데 7번째 장편은 사극 <간신>이 됐다.

=1949년의 이야기와 1954년의 이야기, 두편의 시대극 시나리오를 썼었다. <1949>라고 가제를 붙인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까지 들어갔지만 다음 기회로 넘겨야 했다. <간신>은 한국영화 시나리오마켓 심사 때 봤던 작품이다. 이야기의 가능성을 봤고 수필름에서 시나리오를 구입했다.

-이윤성 작가가 쓴 <간신>의 초고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나.

=연산군의 이야기 자체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채홍사의 이야기, 1만명의 여성이 왕에게 끌려온 ‘홀로코스트’에 가까운 이야기가 왜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들의 이야기가 터부시되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뭘까, 그런 질문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주된 플롯은 왕과 간신의 이야기지만 당대의 소품으로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메인 플롯에 같이 얽혀야 된다고 생각했다.

-갑자사화로 사람들이 처형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슬로모션으로 폭력이 행해지는 순간을 담아낸다. 오프닝 시퀀스의 이 희극적인 톤은 좀 의외였다.

=굳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갑자사화를 너무 모르더라. 영화를 모니터하러 온 20대 대학생들 중엔 장녹수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웃음) 앞으로 간신들이 행할 정치적 행각을 최소한의 수위로 미리 보여주고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철퇴로 쳐죽이고, 때려서 죽인 이야기는 실제 실록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또 연산군처럼 익숙한 인물을 다룰 때 기존의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이야기를 다룬다면 다시 다뤄야 하는 이유가 드러나야 하는데, 오프닝에서부터 다르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멜랑콜리아>(2011)나 <안티크라이스트>(2009)를 보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초당 1천 프레임의 촬영이 가능한 팬텀카메라를 이용해 초고속으로 특정 순간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시도할 수 있었다.

-내레이션이 아니라 판소리의 창으로 해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채홍이라는) 삭제된 흑역사를 누군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조롱하고 풍자하면 어떨까 싶었다. 영화에선 소리(唱)를 통해 채홍의 과정이나 살육의 카니발을 흥겹게 이야기한다. 전혀 흥겨운 장면이 아닌데 얼씨구, 지화자 하는 소리를 한다. ‘너무 슬퍼요’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너무 신난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아이로니컬한 풍자가 간신의 시점에서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간신>은 섹스와 폭력, 두 가지 충동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영화인데, 이야기한 것처럼 극단적 상황을 아이로니컬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많다. 과연 관객이 이 아이러니를 얼마나 즐길 수 있을지 우려도 되는데.

=안정적으로, 고만고만하게 이 이야기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자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명징한 상업영화를 잘 못 만들기도 하고. (웃음) 게다가 요즘 관객의 눈높이를 생각하면, 그들이 영화 속의 불편한 폭력을 직시하고, 과거의 악행이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은유를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인물의 관계도 안에서 흥미로운 짝은, 연산군(김강우)과 임숭재(주지훈)와 더불어 단희(임지연)와 설중매(이유영)였다. 단희와 설중매의 경우 경쟁자의 구도로만 그리지 않아 좋았다.

=여성의 몸이 영화에서 폭력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노출 자체가 상업적 소구점이 되는 것이 싫었다. 영화가 정서적으로 밝은 욕망을 그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게는 그 지점이 무척 민감하고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흥청(궁중에 들어간 운평)들의 혹독한 수련 과정을 다큐멘터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세운 영화 속 원칙이 왕과 흥청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거였다. 또 하나는 영화에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중매와 단희는 서로가 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지만, 끝내는 자신들의 분노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그 각성이 있다면, 혹독한 과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단희와 설중매의 마지막 ‘결승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게는 발가벗은 두 여자가 왕의 칼과 맞선 그 순간의 이미지가 중요했다.

-노출은 많지만 ‘궁극의 교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9금’ 사극을 기대한 관객은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야릇한 정사 신을 기대하고 극장에 온 사람이라면 ‘간신’에게 농락당하는 거지. (웃음) 실제로 궁녀 1천명을 거느리고 다녔던 연산군에게 여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여자를 욕망하는 연산군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로부터 제대로 분리과정을 겪지 못한 미성숙한 연산군에겐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대상이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연산군은 자신의 광기를 예술적 광기로 바꿔버린다. 단희와 설중매의 결승전을 지켜보던 때에도 성적 자극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예술적 영감으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결국 흥청들은 로마 황제의 만족을 위해 싸웠던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신세인 거다. 검투사들이 검술에 취미가 있어 싸운 게 아닌 것처럼, ‘결승전’에서의 두 사람도 동성끼리 얽히지만 난투극을 벌이는 것과 같다. 그런 묘한 장면이 관객에게 배신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를 배반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그 선물 안 받으려나? (웃음)

-영화에서 또 하나 강렬한 장면은 연산군의 최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감정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무척 하드코어하게 그렸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이상 사극은 결말이 정해져 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연산군 역시 워낙 많이 다뤄진 인물이라 왕의 최후를 새롭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제껏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왕에 대한 모독, 광기로 날뛴 최고 권력자의 끝이 어디까지일 수 있는지 그 응징의 이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소품을 만들다 대작을 하게 됐다는 표현을 했는데, 규모가 큰 영화를 찍어보니 어떻던가.

=이번 영화가 예산 압박은 최고였다. 8억원의 저예산영화였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예산에 허덕였다. <명량>(2014)보다 100억원쯤 적고, <역린>(2014)보다 20억~30억원쯤 적은 예산으로 찍었다. 사극치고는 초저예산이어서, 가능한 조건 안에서 최선을 찾아야만 했다. 콘티 작업은 세번이나 했다. 촬영 두달 전부터 스탭들과 콘티를 공유해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시뮬레이션했다. 현장에서의 미션 중 하나는 ‘12명의 보조출연으로 330명을 표현하라’였고, 촬영 계획표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찍는다’고 써놓았다. 주어진 대로, 신의 뜻대로 찍어 완성한 영화다. (웃음) 시간과 효율과 예산과의 끝없는 싸움이었다.

-여러모로 초심을 일깨운 작품이겠다.

=울고 싶은 사연 하나 없는 영화가 어디 있겠나. 작은 영화는 작은 영화대로, 큰 영화는 큰 영화대로 각자의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주로 모던한 드라마를 만들어온 터라 감독 민규동에게 기대할 수 있는 장르영화 중 가장 마지막 선택지가 사극이 아닐까 싶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같은 대사,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괜히 왕이 그 말을 잘라먹고 대사를 치게끔 했다. 사극의 고착화된 인사와 매너들이 싫더라. 사극을 하면서 제일 걱정했던 건, 사극의 토대가 남자들이 기록한 남자들의 이야기인데 내가 남자들의 사관을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부실한 남자인 내가 말이다. (웃음)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았나.

=물론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경제사를 제일 좋아했다. 사실 경제사가 인류사다. 인간이 어떻게 사냥을 시작했고 계급사회가 이루어졌고 남녀차별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니까. 역사는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필터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의 개인을 다룬 고전영화들도 좋아하고.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만들고 두 번째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내놓기까지는 6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최근엔 1~2년에 한편씩 꾸준히 영화를 내놓고 있다. 어느덧 부지런한 다작 감독이 된 듯하다.

=징크스가 돼버린 것 같은데, 준비하던 영화는 원하는 시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항상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작품을 하게 되더라. 묘하게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 김치를 한창 숙성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깍두기 요리를 내놓는 격이랄까. 지금도 준비해둔 이야기는 많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순간에 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프롤로그를 쓰고 있다. 아직 메인 챕터는 쓰지 못한 채. <간신>으로 새로운 챕터를 썼다는 느낌은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프롤로그 같다. 프롤로그라도 재밌어야 사람들이 메인을 볼 텐데.

-확실히 <간신>은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는 지점에 놓인 작품 같다.

=그 챕터 하지 말까? (웃음) 이 챕터로 계속 가도 좋을지 어떨지 얘기해달라.

-개인적으로는 <내 아내의 모든 것>과 같은 작품을 좋아하지만, 얼마나 더 낯선 파격의 길로 들어서게 될지 궁금하다.

=정신을 차려야 할까? 더 미쳐야 할까? 계속 고민 중이고 더 찾고 있다.

-<간신> 이후에 들어갈 차기작은 뭐가 될 것 같나.

=우선 <럭키보이>란 작품이 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에서 소개한 작품인데, 한국전쟁 당시 마릴린 먼로를 만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먼로라는 창을 통해 혼돈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려 한다. 앞서 말한 <1949>도 계속 준비할 테고, 그사이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다.

<간신>의 후반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민규동 감독은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스탭의 연락에 답을 해야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엔 일반 시사 뒤 관객과의 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분명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을 텐데도 민규동 감독은 피곤한 내색 없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인터뷰의 흐름이 잠시 끊겨도 질문을 재차 확인하는 법이 없었다. 입담과 친절도 여전했다. 터질 듯한 광기를 품고 있는 영화 <간신>을 만든 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민규동 감독은 한결같이 차분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그의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영화를 향한) 욕망이 궁금해졌다. 메인 챕터를 써내려갈 그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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