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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만난 영화인①] 지아장커 감독, "소재에 알맞은 영화적 언어와 구조를 찾기 위해 항상 노력해왔다"
송경원 2018-05-23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

집대성. 올해 칸영화제를 찾은 거장들의 신작에는 지난 작업들의 축적과 함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도전적인 의지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래서, 동어반복이나 소모가 아닌 지난 시간들의 집대성이다.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는 지아장커의 초기작이 품었던 반항적인 시선과 에너지가 감지된다. 동시에 최근 몇년간 장르영화에 도전 중인 프로젝트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주정>(2013)이 지아장커가 해석한 무협영화의 변주였고, <산하고인>(2015)이 멜로드라마에 대한 지아장커의 화답이었다면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는 장르적으로 필름누아르 혹은 갱스터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화는 중국 특유의 조직인 ‘강호’를 중심으로 조직의 보스 빈(리아오판)과 그의 여자친구 차오(자오타오)의 질기고 기구한 인연의 연대기를 그린다. 두 사람은 17년의 시간 동안 급변하는 중국의 사회 변화 속에서 사랑과 배신, 재회와 이별을 반복한다. 빈을 지키기 위해 5년간 감옥까지 갔다온 차오는 사라져가는 강호의 규칙과 도리를 지키는 여걸이다. 지아장커의 부인이자 영원한 파트너 자오타오에게 바치는 영화라 해도 무방할 만큼 이 영화에서 빛나는 존재는 단연 차오다. 이중적이고 비루한 남자들과 달리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가면서도 전통적인 가치를 지켜내는 건 결국 여성의 몫이다. 탄광촌 출신인 차오는 다통, 펑제, 신장 등 중국의 여러 지역을 떠돌며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소외된 가치들을 복원해나간다. <르몽드>는 “혼돈스럽고 시적이며 강렬하고 불투명하면서도 눈부신 이 작품은 단언컨대 그의 최고작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지아장커는 다시 또 한 계단 올라섰다.

-당신의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그럼에도 초기작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지아장커의 블록버스터’라고 해도 될까.

=글쎄, 재미있는 표현이긴 한데. (웃음) 이제껏 내가 찍은 영화 중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건 사실이다. 특별히 시간적인 흐름도 보여주고 지리적으로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촬영이 길어졌다. 대략 7700km를 여행하며 3개월간 촬영했고 시간 역시 2001년부터 2018년까지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시기별로 그 시대를 잘 나타낼 수 있도록 모든 걸 재창조했기 때문에 솔직히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최대의 제작비를 썼다 하더라도 중국의 다른 프로덕션 산업에 비해서는 중저예산에 속하는 영화다.

-원제는 <강호의 여인>이다. 강호(江湖)는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영화에서는 하나의 조직처럼 묘사된다. 중국인에게, 그리고 영화에서 강호의 의미를 설명한다면.

=강호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실제로 존재하는 중국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강호는 사회 격동기에 힘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서로를 보호하고 생존하기 위해 꾸린 일종의 조직이었다. 이러한 타입의 강호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철학과 가치, 원칙, 행동강령을 공유했다. 그들은 주류 권력과 법에 대항해 독자적인 시스템을 꾸렸다. 나는 강호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에 집착하는 데 매력을 느꼈다. 그건 마치 주류 권력구조와 문화에 대한 도전 같았고 어떻게 영화에 이용할 수 있을지 오래 생각해왔다. 강호는 오랫동안 소설, 문학, 영화에서 소개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80년대 홍콩영화, 특히 오우삼의 영화가 내게 큰 영향을 줬다. 그러던 중 3년 전 새로운 프로젝트를 고민하다 강한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강호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론 강호의 보스 빈과 여자친구 차오의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다.

=빈과 차오는 영화에서 사랑, 배신, 이별, 재회 그리고 다시 헤어짐을 겪는다. 그들은 끝까지 결혼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개인적인 자유를 유지한다. 그 점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임소요>(2002)에서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강호에 연관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는 강호에 관한 지점들을 보여줄 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차용해서 이야기를 늘려나가고 싶었다. <스틸 라이프>(2006) 때도 자오타오의 사랑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그녀의 사연 일부를 삭제할 수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 영화들의 어떤 순간들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봐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 포스터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17년간 큰 변화를 경험한 중국 사회의 풍경을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동시에 잡아낸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선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화는 매우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그 흐름에 속한 사람은 인식하기 쉽지 않다. 17년이라는 긴 흐름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파괴되었는지를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범위다.

-영화에 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시간이 바뀌어도 사람들은 꾸준히 집단체조를 하는데 그 광경이 자못 낯설다. 특히 초반에 등장하는 볼룸댄스는 무척 기괴하다.

=볼룸댄스는 2001년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당시 해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볼룸댄스가 유행했는데, 나는 그것이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느꼈다. 사람들은 볼룸댄스를 하면서 “나는 힙하고 서구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거다. 강호의 마지막 세대이자 주인공 빈의 선배 보스는 빈에게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이런 유행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들의 관점에선 중요한 일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하잘것없다. 그 격차가 기괴하고 쓸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UFO 등 초현실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등 <스틸 라이프>와 기시감이 느껴진다.

=자오타오가 연기한 차오는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중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신장 지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녀는 은하수와 우주, 특히 UFO를 마주한다. 나는 차오의 걸음을 통해서 세계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를 상상하고 싶었다. 중국 밖, 나아가서는 지구 밖의 존재들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절대적으로 믿고 매달리는 세계가 얼마나 하찮고 좁은 것인지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이 우주에서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도 자각할 수 있다.

-<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와 중국 원제인 <강호의 여인> 중 무엇이 더 이 영화를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가.

=모국어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내가 느끼기엔 당연히 중국 제목이 더 적합하다. 하지만 강호를 영어로 번역할 만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스크립트를 쓸 때 화산 앞에서 차오가 빈에게 말한 대사 중 하나를 떠올렸다. 차오는 빈에게 다 타버리고 남은 ‘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성장과 발전 가운데 사라지고 잃어버리고 파괴된 것을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중국 사회의 극적인 변화에 밀려 재가 되어버렸다. 하얀 재는 그들의 순수함을 간접적으로 상징하기에 적당하다.

-<천주정> 등을 기점으로 당신의 영화가 변화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상업적이고 접근이 쉬운 드라마이면서도 지아장커라는 색깔이 뚜렷해졌다.

=나는 소재를 묘사하기 알맞은 영화적 언어와 구조를 찾기 위해 항상 노력해왔다. 이번 영화에선 ‘강호’의 세계를 여행하길 바랐고 강호를 다룬 전통적인 영화들에서 영감을 얻어 초반부에 배치했다. 그러곤 시점을 바꾸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경유한다. 그들이 사회적 흐름에 때론 적응하고 때론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하나의 색깔로 정의하긴 어렵다.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하는지는 결국 관객 각자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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