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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만난 영화인②] <이미지의 책> 장 뤽 고다르 감독 -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들
송경원 2018-05-23

<이미지의 책>

“우리가 작가주의라는 단어를 주장했을 때 ‘작가’를 강조한 게 문제였다. 그보다는 ‘주의’(-ism)를 부각해야 했다. 우리는 누가 좋은 영화를 만드는지를 주장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어떤 요소들이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제71회 칸영화제에 경쟁작으로 출품된 장 뤽 고다르의 <이미지의 책>을 보며 언젠가 고다르가 했던 저 말이 떠올랐다. 50년 전 칸영화제를 중단시키려는 정부를 막아섰던 누벨바그의 선구자는 50년 만에 다시 칸에 돌아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공공분야 개혁에 항의하는 노동절 집회와 시위 등으로 시끄러운 올해에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를 포스터로 내걸고 그의 신작을 경쟁부문에 초청했다는 건 상징적인 행위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것이 단지 과거 영웅에 대한 예우에 불과한 게 아닐지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결과적으로 기우에 불과했다. 고다르는 한시도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아마도 올해 칸에서 가장 파워풀한 영화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이미지의 책>을 고를 것이다. 신작 <이미지의 책>은 고다르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주를 파괴하고 미지의 암흑을 더듬은 끝에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는 종류의 영화다. 정치, 서사, 전체주의 등 기타 불순물로부터 영화를 탈주시키는 일련의 작업은 영화를 향한 의지, 말하자면 ‘-ism’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제목 그대로 이미지 아카이브의 혼합물을 제시하는 <이미지의 책>은 고다르가 <언어와의 작별>(2013)에서 보여줬던 콜라주 작업의 연장에 있으면서도 한 걸음 달라진 시도를 보여준다. 고다르의 콜라주, 그러니까 다른 영화, TV영상, 문자텍스트 등에서 발췌해온 소스들을 모아 편집하는 작업은 사유의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비유하자면 스크린이라는 심연 속에 우주 탄생의 불꽃이 일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영화가 태어난다. 고다르에게 있어 영화는 스크린에 박제되고 고착된 물질이 아니다. 영상의 아카이브들이 충돌하고 고조되어 울려 퍼진 끝에 형태를 잡아가는 개념들, 생각이라는 물질, 영화라는 현상이다.

<이미지의 책>은 서구 세계의 시선으로 생산되어온 이미지들이 어떻게 중동 지역을 예속시켜왔는지 드러낸다. 5개의 챕터(1. 리메이크/ 2.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녁들(파티들)/ 3. 여행의 혼란스러운 바람 속에, (기차) 레일 사이의 꽃들/ 4. 법의 정신/ 5. 중심 지역)로 이뤄진 운동들은 부분적인 마찰을 지속하며 일련의 흐름을 형성한다. (원본과 무관하게) 하나의 조형적 질료로서 분리된 영상, 야수파와 인상파 화가의 색조처럼 뜨겁게 덧씌워진 색조들이 일으키는 불꽃은 하나의 궤적을 남긴다. 역사와 이미지가 결합된 운동의 궤적들. 전작 <언어와의 작별>과 달라진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목소리가 배제됐던 <언어와의 작별>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고다르의 육성이 영상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서로를 공격하고 공명한 끝에 물결을 이뤄내고야 만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의 책>은 제목과 달리 듣는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엔 분명한 방향이 있다. 서구 세계가 아랍 문명에 지속적으로 가해온 환영의 고발과 해체다. 덕분에 전작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이해되고 더욱 강력하게 전이된다.

장 뤽 고다르는 첫 상영행사에서 프로듀서의 입을 빌려 “위대한 영화 제작자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는 말을 전했다. 그 언어를 고스란히 고다르에게 되돌려주겠다. 위대한 영화는 하나의 서사로 결정된 세계, 혹은 전체주의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영화는 규칙을 찢고, 사유를 요구하고, 고정된 시선과 개념을 해체시킨다. “내가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는지는 내 의지에 달린 게 아니다. 많은 부분이 내 팔과 다리, 그리고 눈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열정은 있지만 더이상 상상할 열정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런 부분에서 아직 생각할 열정이 있고 그것이 아직 영화를 만드는 이유다.” 그렇기에 고다르는 과거가 될 수 없다. 68혁명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났지만 ‘어떤 요소들이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탐구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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