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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밤'은 왜 아이들을 불안정한 이주의 상황 속으로 던져놓았나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최근 주목받은 독립영화에선 아이와 이주, 여성감독이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그 공통점의 배경을 생각해봤다.

앙상한 기억의 시절

김보라의 <벌새>(2019), 윤가은의 <우리집>(2020), 윤단비의 <남매의 여름밤>(2020), 정연경의 <나를 구하지 마세요>(2020) 등 최근 한국 독립영화는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공교롭게도 이들 작품은 여성감독이 연출했다. 이 리스트에 이지형, 김솔이 공동 연출한 <흩어진 밤>까지 더하면, 국내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화제가 된 독립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아이’와 ‘여성감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환의 <박화영>(2018)과 <어른들은 몰라요>(2021) 등을 함께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일단 제외하려 한다).

그런데 이들 작품들은 ‘이주’의 상황을 아이들이 헤쳐가야 하는 어떤 현실적 위기와 곧잘 연결시키곤 한다. <남매의 여름밤>이 노스탤지어라는 정서를 통해 그 위기를 중화시킨다면, <흩어진 밤>은 어떤 보호막도 없이 그 위기와 마주해야 하는 아이들을 그린다.

아이들, 여성 서사의 또 다른 변주

<남매의 여름밤>과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집을 떠나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할아버지 집이, <나를 구하지 말아요>에서는 혼잡한 번화가의 원룸이 아이에게 새로운 서식지로 주어진다. <흩어진 밤>은 집을 떠나기 직전의 아이들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수민(문승아)과 진호(최준우)는 부모가 이혼을 하면 누구와 살아야 할지 고민스럽다. 여러 경우의 수를 따지며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 계산하지만, 알고 보면 전혀 필요 없는 짓이다. 어차피 선택은 부모의 몫이니까. 그렇게 아이들은 낯선 상황에 던져진다.

모든 이동하는 것들에는 뿌리가 없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뿌리가 뽑혔거나. 우리가 한 장소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토대가 집이라는 점에서, 집을 잃고 어디론가 이주해야 하는 처지의 아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고 이들 영화가 그렇게 낯선 상황에 던져진 아이들을 미시적으로 관찰한다는 점은 그냥 지나치기 힘든 이들 영화의 특징이다. <흩어진 밤>에서 이주는 단지 집을 옮기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배제된 존재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는다. 정착의 결정권을 갖지 못한 주변부의 삶.

<흩어진 밤>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다고 해도 그것이 아이들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시선의 주체라기보다는 주어진 사건에 반응하는 쪽에 더 가깝고, <흩어진 밤>은 아이들을 사건 속으로 툭하니 던져놓고 그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하는 질문은,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가 왜 아이들을 불안정한 이주의 상황 속으로 던져놓는 것을 반복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배제되어가는 자기를 발견하는 위기를 겪는 것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들 영화에서 반복되는 이주의 상황은 아이들이 실제로 마주하는 심리적인 현실이기보다는, 어른들이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아이들에게 투영한 결과에 더 가깝다. 아이들은 자신이 유발하지 않은 결과를 마주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직면한다. 아이들은 하나의 결과(경제적 어려움이나 부모의 이혼 등)로서 어쩔 수 없이 이주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지만, 그들은 그 사태에 그 어떤 원인도 제공한 적이 없다.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적 상황의 부조리함이야말로 주변부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 늘 마주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 아닌가. 그러니까 아이들은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를 통해 거대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이주하는 삶’이라는 메타포는 이들 영화 모두를 여성감독이 연출했다는 것과 무관한 것일까? 아이들이라는 주변부의 존재를 바라보며 이들을 영화의 중심에 놓으려는 시도야말로 이들 영화가 여성 서사의 또 다른 변주로서 자리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닐까?

<흩어진 밤>은 <남매의 여름밤> 속 유사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바라본다. <남매의 여름밤>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집은 지금은 사라진, 그렇기에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의 무언가를 물질화한 장소다. 달리 말해, 그것은 실제의 장소라기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기억했었음을 일깨우는 매개체고, 이러한 면에서 <남매의 여름밤>을 두고 ‘기억을 기억하려는 영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현재의 시간에 과거의 공간, 또는 현재의 공간에 과거의 시간을 천연덕스럽게 이어붙이며 현재와 과거를 공명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추억은 현재의 비관적 상황을 흐릿하게 보이도록 하는 베일로 완성된다. 할아버지의 집은 집 잃은 남루한 현실을 추억으로 대체한다.

하지만 <흩어진 밤>에는 이러한 베일이 없다.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집이 주어질 테지만, 그 현실을 가려줄 베일로서의 과거가 없다. <흩어진 밤>에는 부모의 연애 시절에 두 사람이 나눈 편지가 등장하지만 한없이 거리가 멀어진 관계를 더 부각할 뿐이다. 더군다나 진호가 푸념으로 늘어놓듯이, 항상 두 아이의 소풍 장소였던 박물관 역시 추억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의 기억을 위해 존재하는 박물관이 진호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의 장소가 된 것이다. 할머니의 등장은 가족간의 싸움을 더 부추기고 생일 선물로 받은 인형은 분풀이를 위한 샌드백이 되어야 한다.

판타지 없는 집

언젠간 성인이 될 진호와 수민에게는 이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할 시간과 장소가 없다. 박물관에서 아빠가 수민에게 들려준 설명을 빌리자면, 아이들에게는 신석기적인 정착의 공간이 없다. 그래서 한때나마 정착했던 곳에 대한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앙상한 기억의 초라함.

진호는 파일럿이 되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동하는 삶을 원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정착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처럼 보인다. 그들의 미래에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순간적으로 추락하는 진호의 드론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불안이 흐른다. <흩어진 밤>은 아이들이 자신들을 찾으러 온 부모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진(또는 숨은) 장소를 보여주며 끝맺는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꽉 막힌 벽이다. 그들은 ‘차라리’ 사라지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자신들을 지움으로써 누군가의 추억이나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닌 평생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대상이 되려는 시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움으로 떠올릴 수 있는 노스탤지어의 판타지를 부숴버리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인지도 모르겠다.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벽만큼이나 암담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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