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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제임스 건이 캐릭터를 사랑(이라고 쓰고 집착이라고 읽는)하는 방식
송경원 2021-08-18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오락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나왔다. 평점이 좋을 수 있지만 사실 평론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즐거움 외엔 의미가 없기에 가치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굳이, 방구석 키보드워리어가 되어 쓸모없는 의미 부여를 해봤다. 제임스 건 감독도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

모두가 악당인 세상에서 영웅 (안)되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창의적으로 죽인다. 참 많이도 죽인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빛과 그림자는 단 두줄로 요약 가능하다. 창의적으로 죽이는 게 영화의 밝은 부분이라면 많이 죽여 지치게 만드는, 혹은 이제 정이 든다 싶으면 캐릭터를 가차 없이 탈락시키는 게 그림자다(물론 그림자에 열광하는 사람, 분명히 있다). 공으로 벽면 치기를 하고 있는 서번트(마이클 루커)가 어디선가 날아온 새를 공으로 맞혀 죽이는 첫 장면부터 제임스 건은 잔인하리만치 투명하게 영화의 목적지를 고백한다. 어떻게 하면 더 과감히, 더 창의적으로, 기발하고 예상 못한 타이밍에 캐릭터들을 죽일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상쾌하고 웃기게 적들을 죽여나갈 것인가. 누가 누구를 죽이냐는 사실 크게 상관없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수감된 빌런을 자살특공대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 그대로, 선과 악 또는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로 양분되지 않는다. 이건 그냥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장판이다. 마치 악의 없는 농담처럼 재기발랄한 죽음들이 낯선 해변가의 폭죽마냥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해도 좋겠다.

모자라지만 멋진, 모자라서 더 멋진

신기한 건 정신없는 살육의 반복이 불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표현 수위가 낮아서 그런 건 아니다. 총을 쏠 때마다 내장이 스파게티처럼 터지고 뇌수가 분수처럼 솟는 묘사를 평범하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들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묘사 자체가 매우 과장되고 깔끔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이나 전쟁 같은 포화 속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특공대로 선발된 메타휴먼들이 각종 기예를 뽐내며 사람들로부터 생명을 수확하는 장면은 서커스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와 살점이 튄다기보다는 피와 살점처럼 생긴 무언가의 형상을 목격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깔끔하고 예쁜 죽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할리 퀸(마고 로비)의 탈옥 시퀀스, 단독 액션에 할애된 흩날리는 꽃잎들이다. 군인들을 학살하며 사방에 튀는 ‘피보라’는 아마도 정신 나간 할리 퀸의 내적 비전이 투사되어 꽃잎으로 바뀐다. 꽃잎 액션이야말로 그녀의 머릿속이 ‘꽃밭’임을 증명하는 장면이자 캐릭터의 본질을 액션에 버무린 달콤한 사탕 같은 장면이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자살특공대 한명 한명에게 감각적인 액션 비주얼을 선물한다. 문자 그대로 빗속에서 사람을 찢는 킹 샤크(실베스터 스탤론), 모든 대상이 자신을 학대했던 어머니로 보이는 폴카도트맨(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 다양한 형태의 가변형 무기로 적재적소 대응하는 리더 블러드스포트(이드리스 엘바) 등 스토리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캐릭터별 (약간의 전사(前史)와 사연을 버무린) 액션의 퍼레이드가 깨알같이, 앙증맞게 펼쳐진다. 선후를 따지자면 이야기의 결과로 필요한 액션을 했다기보다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상황을 세팅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쉴 새 없는 죽음이 상쾌하게까지 느껴지는 두 번째 이유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본질이 거대한 농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건은 슈퍼히어로의 형식적 껍데기는 물론 장르가 가진 태생적 한계, 혹은 무의식까지 유희의 일부로 전용한다. (악의 없는) 농담에는 몇 가지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그중 핵심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방식, 재인식의 쾌감이다. 팬보이를 자처하는 제임스 건은 코믹스 히어로의 자양분과 B급 장르영화의 특색, 고어한 요소들을 버무려 창조적인 재해석을 시도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에서 우주를 구할 결정적인 순간조차 참지 못하고 댄스 배틀을 벌이는 스타로드의 몸짓은 기발한 농담에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유머와 농담이라는 완충재는 많은 단점과 문제들을 가리는 효과도 있다. 서번트는 등장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해변 침투 미션에 실패하고 어맨다 월러(비올라 데이비스)가 심어놓은 머리가 박살난다. 그때 첫 장면에서 죽었던 새와 똑같이 생긴 다른 새가 날아와 서번트의 터진 머리를 뜯어먹는 장면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정확히 자리를 안내해준다. 말하자면 이건 농담 같은 액션, 액션으로 위장된 농담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카탈로그다. 카탈로그 앞에는 대문짝만 한 이름표가 붙어 있다. ‘"모자라지만 멋져.’

순수한 폭력과 불변의 캐릭터

대부분의 경우 액션의 단순 나열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자극은 반복될수록 무뎌지는 법이고, 짧은 액션들은 한 다발 묶어놓아봤자 방향이 없으면 지루해질 따름이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낀다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만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이를 캐릭터의 다채로움으로 상쇄시키려 애쓴다. 다소 과장하자면 설정집에 가까운 캐릭터 퍼레이드가 재미없다면 굳이 볼 필요도 없는 영화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태평양 어딘가에 홀로 떨어진 섬나라 코르토 몰티즈에서 진행되는 실험이 있고, 실험탑 요툰하임을 박살내고 돌아오면 끝이다. 미국 정부는 메타휴먼 범죄자들을 모아 두개 팀을 꾸리고 침투 작전을 시작한다. 아마도 작전이 실패하거나 비밀이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 처리하기 쉬운 범죄자들로 팀을 구성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막상 모아놓은 메타휴먼들의 목적도 개성도, 팀워크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다. 여기서 팀원들이 어설프게나마 동료애라는 걸 쌓는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게 통상의 패턴이다. 물론 제임스 건도 일정 부분 그 길을 간다. 원치 않은 리더 역을 떠맡은 블러드스포트는 나름의 방식으로 팀원을 챙기고, 인간으로서의 상식을 발휘해 이들을 제정신인 쪽으로 이끈다.

언젠가부터 할리우드 히어로영화에는 팀 배틀이 유행 중이다. 팀 배틀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일단 인원이 늘어나면 히어로의 내면과 고뇌에 깊숙이 파고들 시간적 여지가 없다. 히어로영화에서 능력은 그 자체로 캐릭터의 고뇌를 물리적인 형태로 끄집어낸 정체성이다. 가령 배트맨의 능력은 표면적으로는 각종 장비를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이지만 캐릭터의 본질은 공포다. 공포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내내 고민하던 브루스 웨인은 스스로 어둠이 되어 악당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배트맨>에 유독 테러와 공포를 상징하는 빌런(스케어크로우나 조커)이 다수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블도 비슷하다. <아이언맨>은 너무 많이 아는 지식의 저주, <캡틴 아메리카>는 정의에 대한 고뇌 등이 캐릭터의 중심에 깃들어 있다.

팀 배틀의 경우 이와 같은 스토리텔링을 통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제임스 건은 안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고 대신 슈퍼파워의 기능만을 순수하게 건져 올린다. 렛캐처2(다니엘라 멜키오르)나 폴카도트맨 등은 각자의 입을 통해 아주 짧게 사연을 말하는데, 이건 사실 내면의 탐색과는 전혀 다르다. 차라리 더이상 깊게 파고들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쪽에 가깝다. 슈퍼파워의 기원과 설정을 간략하게 브리핑하고 난 뒤 남는 건 오직 슈퍼파워를 이용한 액션 퍼레이드다.

메타휴먼들은 사실 능력이 애매하다. 블러드스포트는 특수한 장비가 없으면 그냥 잘 훈련된 용병이고, 폴카도트맨은 파괴력 강한 물질을 날릴 수 있지만 육체적으로 허약하다. 피스메이커(존 시나)는 블러드스포트와 포지션이 겹치고, 렛캐처2는 대규모 공격이 가능하지만 대인전에는 취약하다. 할리 퀸은 비실용적인 야구방망이나 휘두르는 정신 나간 장식품 정도로 오해받았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메타휴먼답게 화려한 대인전투를 선보이며 초인성을 과시한다.

본래 능력보다는 결함이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제임스 건은 외과 수술을 하듯 캐릭터에게서 내적 결함 혹은 인간성을 걷어낸다. 오프닝에서 또 다른 자살특공대팀이 무데뽀로 돌진하여 순식간에 전멸당하는 건 이 영화가 얼마나 정신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살하듯 헬기에 달라붙었다가 불에 타죽는 몽갈(메이링 응), 한껏 분위기 잡더니 제대로 활약도 못해보고 당하는 캡틴 부메랑(자이 코트니), 심지어 활약하는 모습 한번 나오지 않는 자벨린(플룰라 보그)은 무쓸모의 미학을 제대로 증명한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오직 각인되는 것은 아이콘으로서의 히어로, 다시 말해 능력과 설정이다. 애매한 능력의 허접함을 한껏 뽐내고 어이없이 퇴장하는 것이야말로 자살특공대라는 미친 상상력의 본질인 셈이다. 코믹스 히어로와 서브컬처에 대한 거대한 농담에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몸을 무겁게 할 뿐이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단체전이 아니라 개별전에 대한 영화다. 각 메타휴먼간에는 나름 상성이 있다. 가령 피스메이커가 마음만 먹으면 렛캐처2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지만 결국 거대 빌런 스타로를 쓰러트리는 건 거의 렛캐처2의 힘이다. 제임스 건 감독은 이들을 원팀으로 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힘을 합쳐야만 물리칠 수 있는 거대한 적을 설정하고, 함께 뭉쳐 인류를 구한다는 원대한 사명을 부여하는 게 보통의 수순이다. 그리고 장담컨대 그건 망하는 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데이비드 에이어의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가 그랬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그런 무게를 과감히 덜어낸다. 이들은 거창한 목표, 각자의 사연도 그다지 필요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 자살특공대에서 그나마 목표 비슷한 거라도 가지고 있는 건 블러드스포트와 피스메이커뿐이다. 두 캐릭터의 능력이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사실 자살특공대에서 감형이란 미끼에 낚인 수감자는 한명도 없다. 블러드스포트는 그나마 딸에 대한 협박에 못 이겨 팀에 합류했으니 상식 선에서 리더를 맡을 자격이 있다. 나머지는 왜 이 위험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영화가 이를 설득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폴카도트맨은 죽기를 바라는 것 같고, 할리 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미친 짓들을 즐긴다. 대화도 통하지 않는 킹 샤크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본능에 이끌려 먹이를 먹고, 그 와중에 최소한의 소통을 한 친구를 보호하는 킹 샤크야말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멤버들의 상태를 정확히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히어로가 킹 샤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들은 성장하지 않는다. 별생각 없지만 매력적인 능력을 지닌 이들이 미국이 저질러놓은 악행 한복판에 떨어져 난장을 벌이는 게 전부다. 계산 없는 낭만, 찌질하지만 멋진 뭔가로 점철된 이 살육의 파티 속에서 성장이나 변화 같은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따위는 발붙일 곳이 없다.

덕심 아래 모든 루저는 평등하다

성장에는 시간이 든다. 변화의 이유와 동기를 제시해야 하고, 변화된 상태를 보여줘야 한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그런 종류의 스토리텔링을 철저히 증발시킨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사람을 찢어죽인다는, 아이콘으로서의 행위다.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상식적인 스토리텔링의 기준에서 이건 명백한 실패다. 액션은 반복되고, 상황은 설득되지 않고, 캐릭터들은 한뼘도 성장하는 일 없이 제멋대로 군다.

그럼에도 이 난장판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실패들이 바로 이 영화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들, 세상의 기준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자기를 굽히거나 세상에 타협하는 일 없이 여전히 ‘루저로서의’ 상태를 고집하는 것.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쾌감은 거기서부터 피어난다. 자살특공대 A팀의 어이없는 전멸은 그야말로 계산 없는 낭만의 물리적인 구현이라 할 만하다. 예정된 실패를 향해 옥쇄하듯 돌진하는 작은 고기 조각들의 반항이라고 해도 좋겠다. 고기 조각의 또 다른 이름은 히어로 장르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온 슈퍼히어로 장르, 코믹북의 이미지를 점토처럼 마구 치대고 주무르며 빚어낸 제임스 건의 창조적 왜곡. 그간 스튜디오의 억압과 영향력 아래에 있던 충동의 원천에서 즐거움을 해방시키는 행위. 한마디로 히어로영화에 대한 거대한 농담.

그런 의미에서 창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사라진 자벨린의 창을 할리 퀸이 이어받는 건 실로 의미심장하다. 총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한 자루 창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벨린은 죽기 직전 대단한 임무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창을 건넨다. 하지만 아무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그의 행적 탓에 상황은 마치 코스튬 플레이어의 망상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똑같이 이해 불가한 기준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한 할리 퀸은 그걸 멋대로 받아들인다. 외부에서 보면 미친 놈끼리 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진실은 알 길 없고, 사실 궁금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자벨린의 창을 휘두르며 스타로를 물리치는 할리 퀸의 모습이 멋지다는 거다.

제임스 건 감독은 자벨린이 멋대로 내뱉고, 할리 퀸이 멋대로 착각한 상황 속에서 끝내 멋진 장면을 발굴해낸다. 할리 퀸이 스타로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건 그 자체로 거대한 농담 같은 상황이자 영화의 정수를 압축한 상징적 행위다. 스타로를 물리쳤으니 할리 퀸과 자살특공대가 세상을 구한 영웅인가.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이건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모험이 아니라 최소한 짐승은 되지 않으려는 이들의 유치찬란한 생존담이다. 지나치게 의미심장하고 엄숙해져가는 히어로물에 대한 위트 있는 풍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하여 갈림길에 선 이야기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는 두개의 쿠키영상이 있다. 하나는 제일 처음 익사한 위즐(숀 건)이 되살아나 숲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영상, 다른 하나는 음모의 주역인 피스메이커가 죽지 않고 치료를 받는 장면이다. 위즐과 피스메이커야말로 가장 극단의 대척점에 선 존재다. 피스메이커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 쓸모와 효용의 화신이다. 스타로를 둘러싼 난장판 속에서 유일하게 사건으로 기능하는 것이 피스메이커와 릭 플래그(조엘 키너먼), 혹은 블러드스포트의 대립이다. 피스메이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평화를 선 긋듯 재단하고 폭력을 남용하는, 미국의 민낯이 압축된 캐릭터다. 그에겐 평화롭게 우주를 떠다니던 스타로를 잡아와 가두고 30년간 실험한 미국의 치부를 감추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 이건 후반부에 밝혀지는 비밀이지만 실은 그다지 비밀이랄 것도 없다. 다들 농담으로 흘려들었을 뿐, 피스메이커는 처음부터 자신은 평화를 위해 아이도 죽일 수 있다고 당당히 밝힌다. 피스메이커의 생존은 이 시리즈를 어떻게든 이어가겠다는 의지이자 이야기의 욕망이다.

반면 위즐은 의미 없음, 쓸모없음을 대변한다. 정확히는 세상에 대한 (혹은 어떤 집단이나 인류로부터)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질문해볼 수 있다.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애매하고 하잘것없는 슈퍼파워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조차 이야기(혹은 권력)가 요구하는 의무와 압박에 불과하다. 위즐은 아무 의미 없이 죽음으로써, 해방되고 자신의 삶을 찾아나간다. 이야기와 의미로부터의 해방. 생각해보면 악역의 사용방식이 이만큼 독특하고 보잘것없는 영화도 없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실비오 루나(후안 디에고 보토)는 어이없이 퇴장하고, 최종 보스인 스타로는 사연을 알고 나면 실로 애잔하다. 모두가 악당인 세상에서 영웅이 되려는 자는 제거되고, 자기 자신으로 남으려는 자들은 생존한다. 존재감 만점의 킹 샤크는 물론이고 슬픈 외계인 스타로, 존재감 제로의 위즐까지 모든 캐릭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반대로 어느 한명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덕심 아래 모든 루저들은 생겨먹은 꼴 그대로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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