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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을 연출한 리처드 도너 감독, 그리고 촬영감독 얀 드봉이 가세해 만든 오락영화. 오랜 세월 경찰로 근무한 로저 머터프는 이제 정년퇴임 날짜를 얼마 안 남기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경찰에서 불법무기가 사라지고 길거리의 갱들이 무기를 들고 설치는 것. 경찰은 사건 용의자로 전직 경찰인 잭 트래비스를 지목한다. <리쎌 웨폰> 시리즈의 세 번째로,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의 콤비 연기가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액션과 코미디가 적당하게 배합되어 있다.
TV영화... <리쎌 웨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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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풍미한 배창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동철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달동네에 ‘검은 장갑’이라 불리는 여인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남편 태섭은 과거에 살인을 한 탓에 도망중인 몸으로 검은 장갑에 생계를 의존한다. 한편, 검은 장갑의 전 남편 주석이 나타나자 세 사람은 갈등을 겪게 된다. 한국적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멜로드라마를 구성한 수작. 김보연, 안성기, 김희라 등이 출연한다.
TV영화... <꼬방동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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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소설을 시리즈의 가이 해밀턴 감독이 영화화했다. 영국의 한 시골마을에 여배우였던 마리나와 그녀의 남편이 찾아온다. 마리나가 연 파티장에서 동네의 한 부인이 독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 마리나는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여배우인 안젤라 랜스버리가 주연으로 열연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록 허드슨, 토니 커티스 등의 스타들이 출연하고 있다.
TV영화... <거울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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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통 관습과 개인의 욕망간의 충돌을 그린 멜로드라마. 5세대 감독의 일원으로 불리는 황지엔신 감독이 만든 범작이다. 1920년대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결혼을 위해 길을 가던 신부가 마적단에 잡힌다. 신랑은 신부를 구하기 위해 애쓰던 중 폭약사건으로 급사한다. 신부를 호위하던 하인 우쾌는 마적단 두목과 목숨을 건 도박 끝에 신부를 무사히 데리고 집으로 오고, 신부는 우쾌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대만과의 합작영화이다.
TV영화... <목인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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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군대 시절 친했던 운전병에게 부탁해서 어렵사리 구한 <씨네21>을 몇번이고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내가 글을….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 컬트’란 이름으로 격주마다 글을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근데 막상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자리에 앉으니, 앞이 깜깜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영화감독 한다고 설친 전력에 비해 너무도 모자란 나의 영화적 지식. 영화적 공력 부족. 그러나 어찌하랴? 이게 나인걸.그래서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그리 대단치도 않고, 그리 특별한 영화를 본 기억도 많지 않다. 다만 좋아하는 영화는 무지 자주 보고, 그 지대한 영향으로 지금까지 영화 하나 붙잡고 살아왔다. 솔직히, 나의 글 실력은 이 글을 읽고 계실 분들이 더 잘 알 것이고, 내 글에서 유명 영화비평가들의 잘 빠진 글을 기대하는 이는 한명도 없을 것이기에 편하게, 아주 편하게 내 인생의 영화들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 좀
유년의 바다에 뜬 보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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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씨네21> 칼럼에 ‘박수 쳤다 치고 떠난다’고 고별사를 날렸던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알다시피 우리 영화사가 제작했다. 코미디와 호러를 뒤섞어 장르영화에 반칙을 날린 이 영화로 그는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고, 명필름은 개성있는 크레디트를 얻었다. 하여튼 가상한 성공작이었다(라고 자부한다). 그와 당연히 두 번째 영화를 만들 줄 알았으나, 김 감독은 봄영화사로 돌연 날아가버렸다. 그 건으로 오정완 대표와 밤늦게 통화를 하면서, 나는 생각없는 싸움닭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얼마 뒤 봄영화사와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을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시사회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웃었고, 과장되게 박수쳤고, 80만명은 볼 거라고 떠벌렸다. 떠나버린 감독이 얄미운 만큼이나 재기발랄한 스타일과 슬픈 정서를 유머로 슬쩍 돌려 이야기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2000년대의 중요한 한국영화가 될 것임이 분명하
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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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기는 칼럼을 쓰라길래 기다렸다는 듯이 “뭐 그러지요”라고 냉큼 대답했다. 뭘 쓸까… 조바심만 내다가 마감이 코앞이지만 주제도 못 정하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씨네21>에 자주 들락거리는 구아무개가 들러 “김지운 칼럼에 선배 이름 나와요”라며 <씨네21>을 펼쳐보였다. 어디 글 내미는 것이 식은땀 나는 끔찍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지운 감독의 코를 꿰 사지로 내몰았던 전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에 뜨끔했다.모름지기 남 괴롭히고 마음 편하게 살기 어렵다더니… 이를 어쩐담. 멀쩡히 한량같이 잘 ‘노는’ 김지운 감독을 꼬드겨 한달에 두번씩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한 건 나의 미필적 고의다. 게다가 궁상맞게 들릴 수도 있는 혼자 사는 남자의 신변잡기까지 떠벌리라고 ‘똥꼬’를 찔러대며 부추기기도 했다.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내가 코꿴 사실을 알고 자기와 똑같은 낭패를 당해도 싸다며 약을 올려도 속수무책이다.사실은, 칼럼을 쓰겠다고 수락한 다음날, 거절해야겠다고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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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많은 게 뒤늦게 발견된다. ‘제국으로서 미국’이 그렇다. 1980년 5월24일,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 거리에 대자보가 붙는다. “미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이 신군부에 압력을 넣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사흘 뒤 광주가 잔인하게 진압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한국인들은 ‘미제국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독재투쟁에서 진보적 변혁운동으로 급격히 전화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의 9할을 가져다준 80년대는 그렇게, 시작했다.미국주도 신자유주의의 총본산이라 설명되는 건물과 미제국주의의 물리적 폭력의 집행처라 설명되는 건물이 공격당했다. 이른바 보복작전이 시작되고도, 누구에 의한 공격인지 분명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 그런 공격을 가할 만한 대상이 너무나 많아서다. 말하자면 미국은 진작부터 그런 공격을 부르고도 남을 만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은 테러로 시작하여 테러로 점철한, 인류 최대의 테러국가다.미국은 일단의 유럽
저능한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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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국영화에서 조명은 아무나 조명기를 들고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김성춘은 이러한 미개척 기술분야에 ‘새로운 빛’을 밝힌 최초의 한국인 조명기사다.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보고 기술 연구의 필요성을 느긴 김성춘은 조선에 순회공연 온 일본의 천승좌(天勝座)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동아(東亞)키네마에서 조명기술을 배운 후 일본 제국(帝國)키네마와 신흥(新興)키네마, 불이야(不二屋)프로덕션에서 활동했다. 1935년에 귀국하여 만든 첫 작품 <살수차>에서 각색·조명·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는 처음으로 80KW의 조명기를 사용하여 크게 화제가 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조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사재를 털어 한국영화기술협회(1955)를 설립했고, 한국영화제작공사(1961)를 설립·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사재를 털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똥기저귀 빨며 일본인에게 영화를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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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던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의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지난 9월15일 도쿄에서 뒤늦게 개봉했다. 영사기사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 1996년 <오카에리>으로 데뷔한 시노자키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이 작품은 2차대전중 태평양의 페리류섬에서 함께 전쟁한 경험이 있는 세명의 70대 남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영화다.미하시 다즈야, 오오키 미노루, 아오키 도미오 등 세명의 남자 배우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일본영화의 황금시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왔고,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 등 명감독 밑에서 연기를 단련시킨 경험이 있다. 우연치않게도 모두 1923년 생. 이들은 21년생인 팔순의 여배우 가자미 아키코와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해외에서도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낭트 3대륙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00년 밴쿠버영화제에서는 용호상을 받았다. 영화는 그밖에도 세계 여러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뒤늦게 도쿄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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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잊게 된다. 렌즈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주었고, 순수한 빛을 갈구하는 나의 노력은 더해갔다.”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느낌을 바르게 해석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것이 촬영감독의 소임이라 여기던 스웨덴 출신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는 이같은 철저한 자기집중 위에 영화의 삶을 세웠다.근 30년 동안 그와 작업 해온 잉그마르 베리만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립지 않지만, 그와 함께 작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라고 자신의 시각이 되어준 닉비스트를 회상한다.1998년 <셀리브리티> 촬영을 끝으로 실어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이제는 초로의 노인으로 묻혀 지내는 스벤 닉비스트의 모습 뒤로 어릴 적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한 작은 소년이 오버랩된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는 것을 죄악
빛의 관찰자, 혹은 이미지의 모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