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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나서 가장 긴 자취를 남기는 것은 하나의 장소다. 함께 걸었던 거리, 영화를 보았던 극장, 커피를 마셨던 카페…. 이별 뒤에도 그곳을 지날 때면 무심결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떨쳐버리고자 애를 써야 했던 순간들이 있다. <500일의 썸머>는 바로 그 사랑의 장소들에 관한 영화다. 무엇보다 LA라는 도시의 풍경과 정취, 우리가 잘 몰랐던 LA의 근대 건축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무대인 LA 다운타운은 사실 오랫동안 범죄의 온상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후 2003년 대대적인 재개발 붐이 일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촬영된 최근의 영화들은 주로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이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같은, 포스트모던 건축의 아이콘이 된 빌딩들을 스크린에 옮기곤 했다. <500일의 썸머>는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모던의 정서와 낭만을 기록한다. 톰과 썸머가 만난 지 95일째 되는 날, 본격적으로 LA 근대 건축의 면모가 소개
기억의 자극제와 그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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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구도심, 인천역과 청관거리 일부가 이 영화의 중심공간이다. 구도심이라? 화려했던 과거가 연상되지 않는 쇠락한 거리 풍경, 그것은 이 영화의 제작연도인 2001년이나 10년이 지난 현재나 별반 다르지 않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 노출되는 시간의 코드로만 보면 동시대 인천의 공간은 송도를 중심으로 한 경제자유구역의 초반 개발 무드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작은 것들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던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시선이 인천의 구도심을 향하고 있는 것은 ‘큰 계획’에 대한 조용한 저항의지로 읽혔다. 개봉 초반, 이 영화가 관객 일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은 설정 인물의 성장소설적 구성이 강하게 다가온다는 인상이 짙었던 까닭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작은’ 영화는 초반 부진을 털고 세간의 화제작으로 반짝 떠오른다. 이 영화 얘기가 인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번져 급기야 공직자들이 대거 착석한 가운데 인천에서 재개봉되는 해프닝을 겪는다.
소녀들의 우울한 잿빛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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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으로 <건축학개론>을 준비하면서 영화 속 ‘좋은 공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하고 또 건축가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긍정적이기보다 반대의 경우로 작용해 아쉬움이 남았다. 영화를 논하기 전, 한국에서의 집은 본연의 가치를 잃고, 교환가치로만 인정받아왔다. 좋은 벽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주는 세상. 왜곡된 가치는 영화에 그대로 적용됐고, 화려한 치장이 곧 좋은 영화 공간으로 받아들여져왔다.
인상적인 공간을 구현한 작품으로 내가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꼽는 이유는 그래서 명확해진다. 두 작품의 공간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서가 숨쉰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자고 있는 정원(한석규)의 장면. 햇빛이 비치면서 그가 누워 있는 바닥의 마루 결이 살아 있는 공간. 또 정원이 마당에서 파를 다듬을 때, 하수구로 들어가는 물을 따라잡는 클로즈업
그 남자가 사는 곳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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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007 시리즈와 <배트맨> 시리즈는 이 물음에 각각 다른 답을 하고 있다. 007 시리즈가 즉물적이고 유려한 선형적인 형태와 은색 톤을 주조로 한 기계미학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건축의 순백을 유쾌함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배트맨> 시리즈는 시카고 창으로 대표되는 고층 빌딩군과 그 그늘로 펼쳐지는 포스트모던 클래시즘 건축의 우울을 보여준다. 007 시리즈에서는 모두가, 모든 것이, 유쾌하다. 건물의 창도 유쾌하고, 소파도 유쾌하며, 가장 은밀해야 할 첩보부의 사무실도 창은 없지만 전체가 알루미늄이나 제물치장 콘크리트의 순수함으로 빛난다. 가장 음침해야 할 악당까지도 순진한 유쾌함을 보여주고, 심지어 그는 모더니즘 건축의 결벽증을 성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 유쾌함을, 이 순결함을 오염시키는 존재가 바로 제임스 본드다(그래서 나는 악당 편이 된다). 007 시리즈에서 건축은, 모더니즘의 영원불멸을 구가한다. 반면에 <배트맨>
모더니즘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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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어느 늦은 겨울밤, 작업실에서 몇몇 친구와 함께 옹기종기 담요를 둘러쓰고 비디오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듯 거친 화질과 음질을 구현하는 영화 한편이 시작됐다. 제목은 <시계태엽 오렌지>.
난 당시 건축과 3학년 학생이었다. 뭔가 세상은 건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믿었던,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시기다. 당연히 영화를 보는 시선도 그랬다. 영화의 얼개와 건축의 프로세스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영화 속 공간이 설계 작업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훌륭한 영화도 언어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자막이 없었기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늦은 시각의 압박까지 겹치는 바람에 나는 초반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환청처럼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갑자기 정신을 확 들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고급주택의 장면이었다. 마치 처참한 강간신을 적나라하게 보이고자 설계한 것
잠이 확 깨는 ‘화면발’의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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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를 설계할 건축학도 아리아드네를 처음으로 데려간 꿈속 공간은, 말 그대로 현실이 아닌 꿈속, 즉 가상공간이라는 기대답게 중력을 무시한 엄청난 도시로 표현된다. 아리아드네에게 설명하는 ‘펜로즈의 계단’뿐만 아니라 ‘킥’, ‘토뎀’, ‘투영체’와 같은 용어까지, 아니 ‘미로’라는 단어까지, 이 영화는 여태껏 상상하지 못했던 가상공간적 볼거리로 기대감까지 갖게 한다. 그러나 총상당한 피셔를 위해 다시 한번 꿈의 아래 레벨로 간 곳, 바로 코브가 부인 멜과 함께 50년 동안 만들었다는 도시는 사람이 배제된 적막감으로 사이버 이미지를 만들 뿐이다.
사실 도입부에서 그려진 꿈이라는 가상공간은 전제된 상상력답게 그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현실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 되어버린 설원 요새까지의 가상공간은 언뜻 사이-파이(Sci-Fi)영화에서 흔히 봐왔던 무중력을 호텔 복도에 펼쳐 놓았을 뿐이고 사이토를 구해와야 할 림보와 같은 매력적인 공간표현마저 너무도 평이하게 그려졌으니 말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진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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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기억 속의 첫 <샤이닝>은 굉장히 어두운 영화였다. 몇 차례의 비디오 카피의 결과물이 낡은 프로젝터의 뿌연 조도를 통해 영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 오버룩의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져나오는 피가 복도를 가득 채우는 장면은 정말 어둡고 검게 느껴졌다. 잭이 도끼를 들고 아들 대니를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쫓아가는 미로공원의 장면은 너무 어두워 스테디캠의 존재감만 겨우 느낄 수 있는 새까만 장면이었다. 그 이후 다시 보게 된 좋은 화질의 <샤이닝>은 시각적으로 그리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오버룩 호텔의 곳곳은 귀신이 나타날 때도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조명 아래서 플랫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밝은 조도의 영화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에게 <샤이닝>은 아주 어두운 공간감을 보여준 영화라고 기억된다. <샤이닝>은 요즘의 공포영화들이 과도한 어둠을 통해 표피적인 어둠을 추구하는 데 비해, 어떤 외부의 소음도 차단된 적막의 고립
텅빈 호텔이 토해내는 지독한 고립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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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는 회화사에서 주로 간송학파를 중심으로 널리 회자되어 온 것이지만, 진경건축이나 진경영화라는 단어는 생소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실제 컨텍스트를 창작의 배경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키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진경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진경 창작인인 봉준호 감독이 <마더>에서 또 보여줬다.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도시라면 으레 있을 법한 산비탈의 한 동네. 감독의 전작인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아파트처럼 하나도 특이할 것 없는 장소다. 하지만 장소와 스토리가 갖는 관계의 수상한 점성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높아만 간다. 도준 엄마에게 진태가 한 말, “동네가 이상해. 꼭 연극 무대 같아”는 그 끈끈함에 대한 결정적 표현이다. 그리고 사건의 단서 또한 좁은 골목길에서 불편하게 붙어 있는 건물간의 교차하는 시선 속에 존재한다. 결국 그 이야기는,
모든 동네에는 전설이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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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2회를 맞이했다. 11월11일부터 오는 17일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영화를 통해 건축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국내외 현대 건축의 흐름을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건축은 사회와 역사, 문화와 자연,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어우르는 매개로 존재한다. <씨네21>은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제시한 건축과 스크린의 상관관계를 영화 속 공간과 캐릭터로 규정해 보았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 스크린 속 공간은 이 가상의 세계를 현실화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공간을 분석하는 순간, 캐릭터는 프레임 안에서 실제의 인물로 둔갑한다. 영화 속, 인물이 존재하는 각각의 점들을 연결하는 순간, 그를 규정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물론, 그의 행동, 그의 사정을 모두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거대한 도시도, 거리의 풍경도, 건축물도, 또 가상으로 만든 미래의 모습도 모두 영화 속 공간에 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 속에 구현된 공간에 관한 좋은 예는 무엇일
프레임 안에서 탄생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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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제작환경에선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장르영화의 장점이라면 장르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밀반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웃음) 나는 <렛미인>의 스웨덴 원작 소설과 영화 모두를 보면서 뱀파이어 이야기 안에 담긴 청소년기의 고통과 보편적인 고독을 느꼈다. 나는 <렛미인>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맷 리브스) 제작 당시부터 찬반양론을 일으켰던 할리우드 버전 <렛미인>이 드디어 공개됐다. <클로버필드>로 호러스릴러의 총아가 된 맷 리브스가 과연 이 시적이고 내밀한 뱀파이어 성장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영화를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맷 리브스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원작과 무척 닮은 듯하지만 많이 다르기도 한 할리우드 <렛미인>의 주요 특징들을 살펴본다.
리메이크의 운명은 언제나 잔인하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거대 예산으로 빅스타를 고용하여 만든 리메이
레이건 시대 미국의 서늘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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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이가 들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노래방에서 더이상 신곡을 찾지 않고 익숙하게 아는 노래번호를 누르고 있을 때, 어느새 오래된 노래만 부르던 삼촌의 예전 표정을 내가 짓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었던 시기도 있었다. 하나 이제는 시간에 밀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새로운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처지다. 익숙하게 쓰던 다른 사이트들을 잠시 접고 낯선 페이스북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런 위기감 때문이었다.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어려워도 배워야 하는 것, 이른바 살아남기라고 할까. 아직은 내 손의 연장처럼 생각되던 것이 아닌 까닭에 느껴지는 타자의 감각. 나는 여전히 그 위에서 페이스북을 대한다.
그 자식이 친구신청하면 어쩌지
그런 만큼 <소셜 네트워크>의 첫 장면에서 감정이입되는 것은 천재 마크 저커버그가 아닌 그의 여자친구 에리카다. 그녀는 지금의 나처럼 혹은 첫 장면의 폭풍 같은 대사들을 따라가느라 당황하는 당신
끊임없는 친구 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