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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새 학기 첫날인 3월2일, 신광여고 미술교사 송기복씨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그곳에 있던 안기부 직원들은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송씨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송씨의 지옥문은 그때부터 열렸다. 송씨는 이로부터 116일 뒤까지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구금된 채 온갖 고문과 협박, 그리고 성적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안기부는 9월10일 송기복씨가 포함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한에 체류 중인 송창섭을 정점으로 한 간첩단 29명이 아내 한경희와 딸 송기복, 아들 송기홍, 송기수씨 등 모두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송창섭을 제외한 이들 28명은 지난해 10월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날조된 간첩조작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간첩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반세기를 버텨야 했다.
이 사건으로 송씨 집안은 한마디로 풍비박산났다.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서로의 혐의를 입증하는 거짓증언을 해야 했기에 형기를 마친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가 추천하는 송기복·송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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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 않은 박헌영(1900~55)의 인생은 정말이지 파란만장했다. 그는 경성고보를 졸업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22년 공산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두 차례의 체포 뒤 28년 또다시 러시아로 탈출한다. 32년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출소한 뒤 남한에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8·15 해방 이후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장악했고, 공산당이 불법화되자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정권에 가담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김일성 등에 의해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아 55년 처형당했다.
극적이었던 것은 ‘공식’ 활동만이 아니다. 첫 아내 주세죽이 그가 죽은 줄 알고 동지였던 김단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주세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비비안나와 남한에서 만난 다른 부인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성균관대 교수 임경석이 추천하는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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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9월 스웨덴 스톡홀름 기차역에 조선의 여인 한명이 비장하게 서 있었다. 스물한살 최영숙(1906~32), 스웨덴을 찾은 첫 번째 조선인. 이화학당을 마친 최영숙은 말하자면 ‘마르크스 걸’이었다.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폭넓게 실현하려던 그녀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회운동가 엘렌 케이의 나라 스웨덴으로 무작정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스웨덴어는 가서 배웠다. 그러나 5년 만에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사를 취득하고 그 사이 황태자 도서관 연구 보조원으로 근무할 정도로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다. 숱한 스웨덴 남자들의 구애에도 자신은 조선으로 돌아가 큰일을 해야 하므로 당신의 연애를 받아줄 수 없다고 뿌리쳤다 한다. 아시아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의 정중한 만류에도 그녀는 1931년 11월 귀국했다.
그런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둘이 되어 왔다. 최영숙은 귀국길에 들른 20여개국의 여행지 중 마지막인 인도에서 미스터 로라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의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전봉관이 추천하는 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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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1865~1945)는 구한말과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전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포레스트 검프 같은 존재다. 16살 때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개화 사상에 젖은 그는 그곳에서 익힌 영어 실력으로 1883년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 장군의 통역관이 된다. ‘조선 최초의 영어통역’이었던 그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움직임을 눈앞에서 접하며 국제정치에 눈을 떴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로 지목된 그는 이듬해 피신차 상하이로 건너가 다시 유학생활을 한다. 이어 1888년에는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동서양의 근대문물을 익혔던 그는 갑오개혁이 일어난 뒤인 1895년 귀국해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자강회를 이끌었고, 1916년에는 YMCA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졌고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가 추천하는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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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1786~1856). 주로 추사나 완당이라는 호로 많이 불린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가라는 극찬을 받을 만큼 서예로 널리 알려졌고 그 밖에 시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한편으로 금석학, 고증학, 불교학 등 당대 학문 연구에서도 남다른 연구 성과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생전에 자신의 저술서들을 두 차례나 불태워버려 지금 남은 건 대부분 그의 서신들뿐이라고 한다. 김정희는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관료였다. 34살에 과거에 급제한 뒤 정계에서 크고 작은 벼슬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말년에는 당쟁에 휘말리며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김정희에 관련된 몇 가지 전설이 있는데, 어머니의 뱃속에서 24개월 동안이나 있었다거나 그가 태어나자 집 주변의 산천이 갑자기 생기를 찾았다거나 하는 출생 전설. 또는 그가 여섯살 때 입춘대길이라 써서 대문에 붙인 글씨를 보고 당대의 지식인 박제가가 스스로 이 아이의 스승이 되겠다고 자청했다거나 당시 영의정이었던 체제공이 지나다 이걸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소설가 심윤경이 추천하는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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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가 스물에 장안에 들어가
가을 연꽃처럼 춤을 추자 일만 개의 눈이 서늘했지
들으니 청루에는 말들이 몰려들어
젊은 귀족 자제들 쉴 새가 없다지
호서 상인의 모시는 눈처럼 새하얗고
송도 객주의 운라 비단은 값이 그 얼만가?
술에 취해 화대로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건
운심의 검무와 옥랑의 거문고뿐이라네.
18세기 밀양 출신의 문인 신국빈이 운심(첫 번째 시에서는 연아)의 검무를 보고 묘사한 시라 한다. 무용가이자 당대의 유명 기생이었던 운심은 이 시가 찬탄하는 것처럼 검무의 일인자였다. 원래는 밀양 출신인데 장안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참여시키기 위해 조정이 지방의 기생들을 불러올리는 과정에서 장안에 자리를 잡았고 더 유명해졌다. 운심은 돈과 권력보다는 협객의 의와 통할 줄 아는 협기였다 한다. 연암 박지원은 그녀가 세도가들의 요구에는 춤을 추지 않다가, 광문이라는 한 허름하고 소탈한 거지이자 협객이 요구하니 춤을 추더라는 목격담을 전한다. 또는 운심은 조선 최고의 서예가 중 한 사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성균관대 교수 안대회가 추천하는 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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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검계(劍契)란 지금으로 치면 깡패, 조직폭력배라는 뜻이다. 그런데 검계를 보는 시각차가 좀 있다. 민중 저항적 집단으로 기능했다는 주장도 있고 꼭 그렇기보다는 단순 무뢰배에 더 가까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대체로 양반네들이 꾸려놓은 사회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다는 정도에는 동의가 이뤄지는 것 같다. 검계는 숙종에서 영조, 다시 (정조 때 잠깐 잠잠하다가) 순조 시기에 득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같은 시기에 조정의 철퇴도 가해졌지만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계보를 만들어간다.
그중에서도 검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표철주(또는 표망동이라고도 한다)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표철주는 아직 영조가 제위하기 전 세자일 때 그의 호위무사까지 지냈던 인물인데 노론과 소론의 당쟁 싸움 속에서 자리를 물러나게 됐다 한다. 검계로서 그의 젊은 시절 별명은 ‘황금투구’였을 정도로 많은 부를 주물렀으며 당연히 풍류에 관해서도 일인자였다고 전해진다. 이규상이 영조 때 검계 소탕으로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역사소설가 이수광이 추천하는 표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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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이 서자 출신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대표작의 주인공 홍길동에 비해 저자 허균의 삶이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일 것이다. 허균은 우의정을 지냈던 증조부, 이름난 선비였던 아버지 아래서 태어났다. 누이 난설헌과 함께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었지만 그가 양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서얼들의 친구이자 후원자를 자처했고 천민과 개가한 부인들을 앞장서서 동정했다. 그는 <홍길동전>은 물론이고 다양한 글을 통해 서얼 차별을 비판했고, 천민과 여성들의 삶에 대한 개선책을 고민했다.
시대의 엘리트 허균은 왜 이들 ‘마이너리티’를 옹호했을까. 이이화씨 등 역사학자들은 허균의 어릴 적 스승 이달에게서 그 첫 번째 근원을 찾는다. 이달은 뛰어난 문장에도 불구하고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 술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다. 허균은 어린 날 스승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서얼 차별 문제에 눈을 떴던 것이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역사학자 이이화가 추천하는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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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정(?~1565)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후하지 않은 편이다. 정사는 그를 ‘출세를 위해 권력자를 유혹한 여인’ 또는 ‘윤원형의 아내를 독살한 표독스런 여자’ 정도로 기록하지만, 최근 몇몇 연구는 정난정의 개혁적 성향에 초점을 맞춰 재조명한다. 정난정은 양반 정윤겸과 군영에 속한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종모법(從母法: 양반 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 신분이 다른 남녀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법)에 따라 당연히 천민 신분이었던 정난정은 당시의 실세 윤원형의 첩이 되면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이한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부인인 김씨를 내쫓은 뒤 윤원형의 누이이자 명종을 수렴청정한 문정왕후의 힘을 입어 정처(正妻)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각별히 총애했는데, 그건 정난정이 영리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두 여인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역사는 훗날 인종이 된 세자의 처소에 불붙인 쥐를 집어넣어 화재를 일으킨 주인공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추천하는 정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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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857~?).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라 말기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 그러나 관료로서는 제 뜻을 이루지 못하고 40대에 이미 낙향하여 유람하다가 노년을 초야에 묻고 살았다 한다. 말년을 가야산 해인사에서 지냈는데 신발만 남기고 신선으로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무엇보다 최치원에 관한 한 당나라의 조기 유학길과 이른 장원 급제, 그곳에서 관료로 일한 경험 등이 유명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살에 당나라로 건너간 뒤 피눈물나게 공부하여 당대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혀 돌아온 한반도 역사상 초기 유학파. 당나라에서 사령관의 종사관으로 일할 당시 토황소격문이라는 유명한 글을 작성하여 난을 일으킨 적장 황소를 글로써 제압했다 하여 유명해진다. 그 공로로 중앙에 진출하나 아버지의 위독한 병환을 계기로 사신 자격을 얻어 신라에 일시 귀국하고 그 길로 눌러앉게 된다. 그때가 20대 후반. 하지만 진성여왕 시기 등을 거치며 시대상이 어지러워지자 정계를 떠나 떠도는 지식인의 삶을 살았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역사소설가 김탁환이 추천하는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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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역사 속 인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을 헤쳐나간 인물들의 이야기는 동시대의 삶에서 보여줄 수 없는 스펙터클과 드라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미인도>와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큰 호응을 얻는 데는 사실(史實)과는 다를지라도 신윤복이라는 수수께끼 속 인물이 품고 있는 매력적 이야기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최근의 <청연> <황진이> <역도산> <그때 그사람들>과 머지않아 개봉할 <쌍화점>까지 한국영화가 역사 속에서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이는 이유 또한 그들의 극적인 삶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
<씨네21>이 역사학자와 역사소설가 10명으로부터 ‘영화화할 만한 한국역사 속 인물’ 10인을 추천받은 것도 새로운 역사인물을 발굴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소재를 더욱 넓히고 지나간 시간을 통해 오늘을 비춰보기 위함이다. 최치원, 정난정,
[영화화 추천 역사 속 인물] 수수께끼같은 역사적 인물 10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