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셀 자서전> 버트런드 러셀 지음 l 송은경 옮김 l 사회평론 펴냄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한 시대를 살펴보는 것과 같을 때, 그 사람을 사상가라 부르며 그 사람의 생각을 사상이라 일컫는다. 버트런드 러셀의 삶과 사상은 바로 그런 드문 경우, 즉 시대를 집약한 축도이자 시대를 감지하는 중추였다. 정직과 솔직함이라는 자서전의 필수 덕목을 완전에 가깝게 갖춘 이 책, 그래서 회고록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고추냉이 맛처럼 알싸한 러셀 특유의 표현과 위트를 감상하면서 20세기를 조감할 수 있다.
케인스, G. E. 무어, 비트겐슈타인, D. H. 로렌스, 조지프 콘래드, A. N. 화이트헤드, T. S. 엘리엇, 아인슈타인 등 많은 거장들과 교유했던 내용도 놓칠 수 없다. 그는 20세기 영국 지성계 네트워크의 명실상부한 허브였다. 백작,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문필가, 반전운동가, 스캔들 메이커, 노벨문학상 수상자. 러셀의 삶은 가로지
<씨네21>의 추석 선물세트 [1] - 국내외 전기소설 8편
-
박해일, 고수희, 윤제문, 엄효섭 등 길러낸 연극연출가 박근형
그의 연극에는 _ 돌발적인 상상력과 웃음이 있다
4년 전 연극연출가 박근형(41)이 들려준 일화. 집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그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받고 오른손으로는 무심코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계속 돌렸다. 그것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어머니의 젖꼭지였다.
박근형의 연극은 뒷골목과 일상의 어두운 그늘, 가족의 신화 뒤에 숨어 있는 애증을 우습고도 슬프게 담아낸다. 위의 일화는 그의 연극이 갖는 놀라운 폭발력과 웃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임순례, 봉준호, 김지운, 박찬욱 감독 등이 그의 공연 때마다 슬그머니 뒷자리를 차지하고 배우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듯한 눈빛, 정식 연극 교육에서 닦은 세련된 화술과는 거리가 먼 시장 좌판의 언어들, 신문 사회면에서나 봤음직한 우스꽝스럽고 전도된 가족 관계를 태연히 보여주는 꾸밈없는 연기…. 그의 연극은 영화계에서는 주목받는 또래 연출가 집단 가운데서 가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6] - 박근형
-
그의 대사에는 _ 한국어의 질박하면서도 찰진 호흡이 있다
연기 못지 않게 오태석이 강조하는 것은 호흡과 대사다. 극단 목화 배우들은 가장 편하고 정확하게 한국어를 발음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정은표는 “배우로 하여금 숨을 제대로 쉬게 하고, 따라서 우리말 고유의 리듬이 잘 살아난다. 목화 배우들의 공통점이라면 제대로 말을 잘 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태석 연극의 무한한 상상력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대도 배우에겐 큰 가르침이자 도전으로 다가온다. 관객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배우들은 허겁지겁 그 엄청난 사유의 공간을 자신의 연기로 메꿔야 한다. “그만한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동원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상상력과 분석력이 없으면 도태된다. 독종이 될수밖에 없고 영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정원중의 지적이다.
그러나 허리라고 부를 만한 중견배우들이 하나둘 TV, 영화로 빠져나가고 연극학도들이 연극보다는 영화와 방송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보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5] - 오태석
-
박영규, 손병호, 성지루, 임원희 등 길러낸 연극연출가 오태석
“임 형(임상수 감독)이 (영화에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배우들을) 많이 데려가서 써서 그런지 밖에서 평가가 좋아.”
“저야… 죄송할 따름이죠. 목화 배우들은 TV든 영화든 어딜 가서도 유연해요.”
9월3일 막 오른 극단 목화의 <백마강 달밤에>가 끝난 뒤 대학로의 카페 장. 극단 목화의 수장 오태석(64) 과 임상수 감독이 맥주 잔을 두고 마주 앉아서 나눈 말의 일부다. 대학생 때부터 오태석 연극의 골수팬이 된 임상수 감독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을 ‘한국 공연예술계가 낳은 5대 천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연극에 나온 정진각, 정원중, 성지루 등을 일찌감치 자신의 영화에 쓸 배우로 눈여겨봐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태석, 1962년 데뷔 뒤 어느덧 42년의 연극 인생이다. <태> <춘풍의 처> <부자유친> <비닐하우스> 등 대표작만 꼽아도 두손이 모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4] - 오태석
-
-
주변 사람들이 최형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정확성’. 직면한 문제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답을 주는 교습이 그렇고, 언제나 ‘왜’를 질문하면서 연기의 동기를 찾아가는 연출이 그렇다. 그가 어느 정도 기본이 된 배우에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가 대본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다. 위대한 작품은 인간과 인생을 꿰뚫는 작가가 며칠 밤을 새워서 모든 장면을 공들여 쓴 것들이고, 그 자체가 엄청난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과거나 행동의 동기는 대본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동기는 희미해선 안 된다. 악착같이 그것을 이루려는 힘이 좋은 연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를 왜 원하느냐에 따라 연기는 달라진다. 돈 때문인지, 외모 때문인지, 그 원인에 따라 그가 취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 아닌가. 정답은 대본에서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이 인간이 왜 이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3] - 최형인
-
설경구, 배두나, 이영애, 임은경 등 길러낸 연기전문가 최형인
아트(art)는 본래 기술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은 창조력의 위대함이 아니라, 부단히 갈고닦아야 하는 정진(精進)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다. 배우고 연마해야 하는 기술은 일면, 예술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신비로움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가라 부르는 사람들, 순간의 상상과 우연한 감성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떤 경지에 오르기까지 취해야 하는 끊임없는 노력은 기술과 예술이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연기 또한 마찬가지. 배우들은 꾸준한 훈련을 통해 숱한 자세를 갖춰야 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인데, 이것은 단언컨대 세심하게 단련된 기술이 필요한 과정이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기라는 마술은, 전적으로 배우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2] - 최형인
-
배우를 만드는 사람들, 최형인, 오태석, 박근형을 만나다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를 거쳐 미국의 리 스트라스버그와 엘리아 카잔 감독의 액터즈 스튜디오에서 만개한 배우 연기술의 계보는 듣기만 해도 황홀하다. 말론 브랜도부터 폴 뉴먼,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로 이어지는 빛나는 이름들. 오늘도 많은 배우지망생들과 스타들이 연기에 대한 목마름으로 액터즈 스튜디오를 찾는다.
한국에도 액터즈 스튜디오 못지않은 연기학교가 있다. 따로 간판을 내건 학교는 아니지만 이 연기학교의 교장은 배우 교육의 전문가 최형인(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겸 한양레퍼토리 대표)이다. 설경구를 비롯 숱한 충무로 배우를 길렀고, 이영애 등 스타급 배우들이 그를 찾아 연기의 숨결을 다시 배운다. 최형인 못지 않게 뛰어난 연기 스승들이 있으니 이들은 대학로를 온몸으로 버티고 서있는 연극연출가들이다. 42년 간 파격의 상상력과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로 자신만의 연극세계를 만든 오태석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1]
-
△ 도쿄 시부야의 미니시어터를 대표하는 ‘유로 스페이스’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상영하고 있었다. 유로 스페이스는 상영뿐 아니라 영화의 제작, 배급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어서 사무실 한켠에는 갖가지 영화들의 영상자료로 빼곡히 차 있다.
도쿄 시부야는 대중문화의 요람이다. 대중음악의 든든한 저변을 이루는 시설 좋은 라이브 클럽들이 몰려 있고, 시네마테크와 미니시어터가 집중해 있다. 도쿄의 시네마테크가 10여곳이라면, 미니시어터는 29개 극장 40개 스크린에 이르고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시부야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부야역을 바라보고 있는 ‘유로 스페이스’는 멀티플렉스가 아직 점령하지 못한 도쿄를 사수하고 있는 미니시어터의 대표주자다. 2개 상영관 중 한곳에서 <고양이를 부탁해>가 상영되고 있었다. 지배인 마사토 호조가 “시네마테크 부산의 사무국장 등 2명이 극장 프로그래밍을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조금 전 다녀갔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지배인은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5]
-
△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라퓨타 아사가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이름과 디자인을 따왔다.
다양한 컨셉의 묘를 살린 도쿄의 시네마테크
도쿄 변두리라고들 하지만 신주쿠에서 전철로 딱 10분 걸렸을 뿐이다. 아사가야역에서 5분이나 걸었을까, 조용한 주택가 한가운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가 툭 나타났다. 만화 속 공간을 현실로 옮겨온 ‘라퓨타 아사가야’의 입구는 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처럼 꾸며졌다. 일본 고전영화의 흑백 포스터를 붙여놓은 게시판도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나마 비바람에 탈색돼 초현실적 느낌까지 준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 마당에선 예쁜 연못이 손님을 맞는다. ‘주인장’ 사이타니 료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중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 같다. 맘 좋게 생긴 그 아저씨는 ‘나는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 다 알지’ 하는 듯한 엷은 미소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공간이 주는 친밀한 매력과 그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4]
-
△ 파리 시내의 다양한 멀티플렉스 상영관들. 거대 배급사인 고몽과 UCG가 미국 배급사들과 협력하에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두 멀티플렉스 체인은 한달에 약 25유로만 내면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무제한 카드’를 발급하면서 가난한 시네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중복된 영화가 없는 진짜 ‘멀티’플렉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출발했으니, 이제는 생미셸 지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트시네마를 돌아볼 차례였다. 많은 장소를 들러야 하니 크레페로 든든하게 배를 채워놓고서는 샤틀레의 메트로역으로 향했다. 샤틀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라데팡스처럼, 새로운 파리의 상징으로 건설된 도심의 오아시스다. 지하에는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그 위는 나무들이 우거진 인공적인 숲이 자리잡았다. 문제는 이곳이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강간과 마약거래 등 온갖 범죄로 들끓는 사각지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미테랑 전 대통령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진행시켰던 국책사업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3]
-
△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낡은 지금의 보금자리를 접고 파리의 ‘51 뤼 드 베르시’에 위치하고 있는 구 미국문화원 건물로 이사할 예정이다. 지금 한창 리모델링 중인 건물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 이 새로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건물 속에는 4개의 상영간과 도서관, 식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이 다양하게 들어서게 된다.
변함없는 작은 기쁨이 있는 곳, 파리의 시네마테크
“파리는 작은 도시예요.” 통역을 도와주던 현지진행요원이 건넨 말이었다. “파리에서 볼 만한 지역은 여의도 안에 다 집어넣을 수도 있을걸요.” 과연 그렇다. 센강에 도도하게 떠 있는 시테섬을 중심으로 ‘당신이 파리에서 보아야 할 대부분의 것’들이 손에 잡힐 듯이 모여 있다. 교외지역을 모두 포함한 대(大)파리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는 서울 인구의 1/3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포옹하고 있는 조그마한 도시다. 그러나 이 작은 도시는 세계지도에다 ‘예술의 도읍’이라 이름붙여도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