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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여년 전 <무뢰한>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모니터를 부탁한 오승욱 감독에게 뭔가 얘기를 해줬겠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살인범을 쫓는 형사 얘기에 최소한의 액션은 필요하다는 따위의 철없는 충고가 기억날 뿐이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했어도 다 괜한 헛소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쓴 시나리오 행간에서 이 영화의 무드와 제스처를 떠올리지 못했다. 핏빛 잔상을 남겼던 <킬리만자로>(2000)와는 반대 방향에서 강박적으로 적요한 분위기에 매달리는 것으로 의심했을 뿐이다.
오승욱이 오랜 기다림 끝에 스크린에 구현한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그들을 감싼 공간의 분위기는 오승욱이 구상한 스토리가 근사한 맥거핀이었음을 알려준다. 오승욱은 형사 누아르물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에서 ‘억압의 미적 제스처’라고 할 만한 것들을 허다하게 만들어낸다. 그것들이 스토리의 인과를 빼곡 메울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이미 이 영화의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에,
[신 전영객잔] 남는 것은 제스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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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다>의 공동 제작자이자 기획자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 영화를 평할 수 없다. 지난 일년간 어떤 감독보다 오래 박정범 감독을 만났고 대화했던 나는 완성된 영화 <산다>를 보며 비평에 가까운 장르는 자서전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전기적 삶의 전모에 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그토록 이 영화에 매달려 기어코 완성한 심리적 내력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이 영화의 완성에 오랜 시간을 들였다. 거의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시나리오는 여러 번 바뀌었다. 2013년 가을, 박정범이 만든 <두한에게>(인권영화 프로젝트인 옴니버스 장편 <어떤 시선>의 한 에피소드) GV 때문에 CGV압구정에서 그를 만난 날, 나는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프로젝트를 장편으로 전환하는 내 구상을 말해주고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박정범은 선뜻 하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묵혀둔 기획이 있다며 그는 당장이라도 찍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 전영객잔] 노동으로 만든 진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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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은 장례 행렬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두 검은 상복을 입은 무리 가운데 앞줄에 선 중년 남자 오정식(안성기)이 문득 뒤돌아본다. 행렬의 끝에 붉은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 오정식이 상무로 재직 중인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오정식이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여자 추은주(김규리)다. 이 영화는 오정식의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에 대한 기록과 그런 아내를 간호하면서 젊은 여직원을 마음에 뒀던 오정식의 내면의 추이에 관한 묘사다. 원작소설도 비슷한 구성이었지만 원작에서 독백으로 묘사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마음은 훨씬 건조하게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맹렬한 직설화법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때로 돌출하듯이 맹렬한 직설화법으로 오정식의 욕망을 그리는 장면들이다. 현재와 과거가 오가는 가운데, 영화 중반 오정식과 그의 아내가 별장에 가서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참을 수 없이 비루한 느낌을 주는데 차마 연민이라도 할 수
[신 전영객잔] 인생은 치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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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바다괴물이다.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비늘로 온몸이 뒤덮여 있는 최강의 생물체이다. 영화 <리바이어던> 중반 대목에 이 괴물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주인공 콜랴가 극단적 절망 상태에 빠져 가게 앞에서 방금 산 술병을 선 채 들이마시고 있을 때 동네 신부가 가게 문을 나온다. 콜랴는 시비 걸듯 묻는다. “자비롭고 전능한 신은 어디 있습니까?” 설전이 오가는 사이에 신부가 리바이어던을 거론한다. “낚시로 리바이어던을 잡겠느냐? 그 혀를 끈으로 묶을 수 있겠느냐? 그것이 네게 계속 간청하고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그에 비할 존재가 없으니 교만한 자에게 군림하는 왕이다.” 왜 선문답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콜랴에게 신부는 욥기 스토리를 들려준다. “욥의 얘기를 아시오? ‘왜 하필 접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를 불쌍히 여긴 신이 폭풍의 형상으로 그에게 나타나 모든 것을 상세히 말해주셨소.”
모두를 향한 불안과 고통
자신들이
[신 전영객잔] 잡히지 않는 말씀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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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후세인 정권이 정말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후세인이 극단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책임감과 자제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즉, 만약 이라크 군대가 뉴욕을 폭격하고 워싱턴을 포위한다면) 우리가 부시 정권에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수천발의 핵탄두를 포장에 싼 채 보관하기만 할까? 생화학무기들은? 탄저병, 천연두, 그리고 신경가스들은? 미안하게도, 웃음이 터져나오려 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품을 수 있는 미국과 이라크 전쟁의 본질을 통쾌하게 요약하고 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에도 오랫동안 이라크 반군과 전쟁을 치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 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해 전설이 된, 그럼으로써 미국에서 영웅이 된 크리스 카일의 실화를 옮긴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함을 안긴다.
[신 전영객잔] 이스트우드는 이라크전을 똑바로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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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내일을 위한 시간>이 첫 상영되었던 201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적지 않은 관객은 산드라가 이 대사를 하는 순간 일제히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것들은 이례적으로 더 우렁차고 뜨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세상과 영화의 간극을 느끼며 그 박수갈채 속에서 잠시 의문스러워하며 망설였다. 다르덴이라는 진귀한 창작자들이 만들어냈고 우리 사회의 가련하지만 명예로운 한 인물의 초상이 철학적으로 담겨 있는, 하지만 영화적으로 완벽히 동의할 수만은 없는 이 작품에 관한 복잡한 심중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고민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네편의 진술은 각자 서로 뜻이 다르고 별개의 귀결을 지닌 네개의 단상으로 읽혀도 좋고 하나의 글을 위한 네개의 장으로 읽혀도 좋다.
선택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시작해보자.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화두다. 이 영화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신 전영객잔] 영화와 세상의 ‘투명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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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재능 있는 감독 클라우즈는 작고한 감독 빌렘이 20여년 전에 썼던 <말로야 스네이크>를 다시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 그가 중년의 여주인공 헬레나 역으로 점찍어둔 배우는 과거에 헬레나의 상대역 소녀인 시그리드로 분해서 스타덤에 올랐던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다. 마리아의 비서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은 마리아가 클라우즈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길 바라지만, 마리아는 망설인다. 심지어 캐스팅을 수락한 뒤에도 싱그러운 시그리드가 아닌 시그리드의 사랑을 갈구하다 자살을 감행하는 헬레나에게 동화되지 못해 내내 갈등한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는 초라하고 비굴하며 무엇보다 늙어버린 여인이다. 그러나 마리아를 헬레나의 적역이라고 믿는 클라우즈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인물, 달리 말해 결국은 동일인물이며, “시그리드의 20년 후가 헬레나”이므로 마리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설득한다.
그의 논리를 확장하면 <말로야 스네이
[신 전영객잔] 소멸 중인 흘러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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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석에서 독립영화나 학생 실습 작품에서 남용되고 있는 들고 찍기 촬영 스타일에 관해 지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찍은 화면들은 아무렇게 붙여도 다음 컷과 연결되는 데다 화면 내의 운동감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젊은 감독들이 남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내가 말했다. 갑론을박이 오가는 사이 누군가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들>을 예로 들었다. 시종일관 주인공의 가슴팍이나 뒤통수를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그 영화가 6개월 가량 리허설한 영화인 걸 알고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저명한 배우인 그는 매우 사실적으로 연출된 그 영화도 아마 기계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감독이나 배우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걸 현장에서 건져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뛰어나게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의 스크린 형체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씨네21>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마리옹 코티야르는 한달여간 실제 촬영장소에서
[신 전영객잔] 세밀한 예행연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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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액트 오브 킬링>의 충격은 어디서 오는 걸까.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일까? 학살자들의 상상하기 힘든 뻔뻔스러움, 혹은 그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한 나라의 지배자라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 다큐멘터리의 표현과 형식의 기괴함 때문일까? 아마도 그 모두 때문일 것이다. 이 다큐를 말하면서 100만명의 고통과 죽음, 학살자들의 가공할 만한 그리고 변치 않은 잔인성을 괄호 안에 넣는 것은 정당화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괄호를 푸는 순간, 이 작품을 평자로서 말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 사실들 앞에서 평자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말문을 막는 것이 사건 자체의 악마성뿐인가. 달리 말해 현실의 과도한 끔찍함이 비평이라는 행위를 하찮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뿐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충격의 또 다른 진원은 학살자들의 말이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한다. 진담과 궤변, 허언과 농담, 반성과 정당화, 과장과 위장의 말들을 끝
[신 전영객잔] 기록을 압도하는 표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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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 감독의 <목숨>은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최후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환자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의 죽음을 착취하지 않으려 애쓴다. 누군가의 죽음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죽음들 앞에서 우리가 보통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듯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 입장은 좀 다르다. 기껏해야 1시간30여분 동안 누군가의 최후 일상을 들여다본 처지에 그 죽음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잡게 된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그런 감정이 든다. 나는 이게 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목숨>에는 말기 암에 걸린 세 사람이 나온다. 남편이 부도를 맞는 바람에 오랜 기간을 가난과 싸우면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노력했던
[신 전영객잔] 이생을, 잘 살아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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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동일한 배우들을 데리고 매해 일정한 시간 동안 촬영을 해서 그 인물들의 세월을 함께 살아낸 <보이후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인물들의 시간을 내내 공유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여러 인물들의 각기 다른 세계, 그리고 그 세계들의 작지만 지속적인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그중 단 한순간과도 공명하지 못했다고 말할 이가 과연 있을까. 이미 여러 평자들이 이 영화의 무엇이 자신들을 감화시켰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감상기를 제출했다. 아무래도 <보이후드>는 영화비평이 아니라, 보는 이 각자의 기억, 감정,인상을 더욱 환대할 영화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시간의 냉정한 흐름에 대면하는 이 영화의 온기에 충분한 감응을 표현했으니 영화를 보는 동안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얼룩처럼 남겨진 잔상들,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그 느낌에 관해 말해볼 생각이다.
자상하고 친절했던 올리비아의 두 번째 남편, 그러니
[신 전영객잔] 시간은 정말 안온하게 흘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