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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스크린에 진실을 새기고, 배우 이선균의 영화적 순간들
김소미 사진 백종헌 2024-01-05

어느 배우를 배우로서 기억하기. 지금 그를 추모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2023년 12월27일,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이선균이 남긴 작품과 캐릭터들을 돌아본다.

이선균은 21세기와 함께 한국영화에 등장했다. 1975년생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1기 출신인 이선균은 2001년 졸업 후 영화계에 뛰어들어 2002년부터 10여편 가까이 상업영화 단역 출연으로 분주한 초심자의 시절을 보냈다. 2004년작 <알포인트> <인어공주>를 기점으로 업계의 물망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비슷한 시기 TV단막극의 인기 속에서 <MBC 베스트극장> <KBS 드라마시티>의 단골 배우로도 눈도장을 찍었다. 2007년은 성실히 도움닫기한 자에게 커다란 지렛대가 주어진 해였다. <하얀거탑>의 진중한 내과의 최도영과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여심을 사로잡은 음악가 최한성으로 연달아 주목받은 이선균은 방송가 루키에서 일약 주연급으로 도약했다. 그를 스크린 배우로 각인시킨 이는 홍상수 감독이다. <밤과낮>(2008)에서 파리의 북한 유학생으로 홍상수 세계에 첫 등장해 <첩첩산중>(2009, 단편), <옥희의 영화>(2010)로 정유미와의 긴 인연을 시작했다. 이선균의 등장은 그 치기는 여전하지만 마초성은 한결 줄어든 홍상수 영화 속 ‘젊은 남성’의 세대교체를 알렸다.

<사과>(2008)에서는 오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한 뒤 훗날 돌아와 재회를 청하는 남자의 미스터리를, <파주>(2009)에서는 운동권 출신으로 철거대책위원회에서 일하며 처제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금기를 그렸다. 대사의 말맛을 극대화하는 일상적 연기의 진가를 보여주었던 <파스타>의 ‘솊’ 역할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단역으로 데뷔해 엘리트, 찌질한 백수, 예술가, 로맨틱 가이를 아우르는 드넓은 그의 스펙트럼이 각인되기까지 이선균의 2000년대 행보는 이 배우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그의 영면을 기도하며 발표한 추모사대로 이선균은 “한 계단, 한 계단 단단히 자기의 소임을 다하며 힘차게 정상의 계단을 올랐다. 그가 그간 쌓아올린 작품들 이력만 보아도 그 어디에도 하루아침에라는 게 없었다.” 둘, 이선균의 출현은 한국영화가 늘 과대표하는 남성성- 조폭, 범죄자, 사이코, 가부장, 형사, 군인, 재벌- 에서 벗어나, 일상에 발붙인 도시인으로서의 남성주인공을 재현하려는 욕망과도 맞물렸다. 그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와 ‘올드보이’들 이후, 스크린에서 익숙하지만 한끗 색다른 한국 남성 캐릭터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배우였다.

이유 있는 빈틈

최민식송강호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연극 무대에서 시작해 스크린으로 도약한 선배 세대들이 뿜어낸 야수적인 아우라와는 거리가 있는 배우다. 이선균을 만든 것은 오히려 위용과 과장의 기술을 뺀 연기다. 미더운 이의 넓고 깊은 저음이었다가 발뺌하며 눙치는 남자의 그것으로 돌변하는 특유의 목소리는 이선균의 한끗 힘뺀 자세를 대변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는 “한량을 꿈꾸는 인간”다운 털털함의 소유자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을 때 날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연기였어요. 연기가 무조건 목표는 아니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김성훈 감독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준 <끝까지 간다>(2013)에서 시종일관 비리와 수난에 휘말리는 경찰 고건수의 상황은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다지 현실적이지도 소박하지 않았으나, 배우 이선균의 존재만큼은 리얼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때로 연출자가 밀도 있게 장악한 꽉 짜인 장면의 ‘폼’을 깨트려 한방을 만들었다. 로맨스에는 날것의 민망함을, 까칠함에는 위악의 뉘앙스를, 장르적으로 과장된 상황에는 현실의 지리멸렬함을 입히는 재주가 배우 이선균에겐 있었다.

<하얀거탑> 이후 이어진 전문직 배역들- <골든타임> <PMC: 더 벙커>의 의사, <끝까지 간다>와 <악질경찰>의 경찰, <성난 변호사>의 변호사, <검사내전>의 검사- 을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엘리트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지 않는 그의 편안한 분위기가 인물의 내면적 취약함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순간들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등장과 함께 일상의 외연을 끌어오는 연기 스타일은 그를 곧잘 좋은 앙상블 파트너로도 불리게 했다. <화차>의 김민희,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임수정, <미옥>의 김혜수, <>의 정유미 옆에는 이선균이 있었다. 한때 그는 ‘여성배우들을 잘 받쳐주는’ 드문 남자배우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적확했던 것은 뻔한 칭찬에 관한 이선균의 반응이다. “그렇게 쓰여진 작품을 선택했고 감독의 비전과 대본의 지시에 잘 따랐다.” 영화의 뒤편에서 그는 재능이 넘치치만 아직 무명인 동료들을 열렬히 추천하는 배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성과에 대해서는 작품을 넘어서서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쩨쩨한 로맨스> 이후 <씨네21>에 7번의 커버 스타로 등장할 동안 그의 솔직함은 초지일관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캐릭터는 <나의 아저씨>인 듯싶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에도 꺼지지 않는 온기는 남아 있음을 밝혀낸 이 조용한 드라마에서 이선균이 연기한 평범한 직장인 박동훈은 제목과 달리 누구의 아저씨도 되지 않는 자리에 남는다. <나의 아저씨>가 단단한 지지와 일각의 거부감을 동시에 불러낸 작품이라는 점을 돌이켜볼 때, 박동훈이란 인물이 이선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역시 그간 이 배우가 걸어온 궤적과 나란히 놓인다. 동훈과 지안(아이유)은 서로를 구원하나, 둘은 서로 “편안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를 놓아준다. 키다리 아저씨 서사의 전형과 뗄 수 없으나 결코 그 전형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감동을 주는 <나의 아저씨>는 “180도 달라질 순 없어도 늘 전작보다 5도, 10도 변해보고 싶다”던 배우의 소망과도 맞닿아 있다. <기생충>은 이선균으로 하여금 봉준호 영화의 자본가라는 낯선 포지션으로 봉준호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모험의 여정이었고, 김지운 감독과는 애플 오리지널 최초의 한국 드라마인 <Dr.브레인>에서 자신과 타인의 뇌를 동기화하는 천재 과학자를 연기하면서 사뭇 슬픈 정념도 꺼내어 보여주었다. 변성현의 <킹메이커>(2022)는 일면 이선균이라는 배우에 관한 영화도 된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건져올리는 이 영화에서 이선균은 킹메이커에게 허락된 오롯한 존재감을 증명해 보인다. 지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코미디로 기억되는 작품들, <임금님의 사건수첩>과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컬트 <킬링 로맨스> 또한 이선균이 자신을 그다지 포장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배우라는 점에 근거해 빛을 보게 된 결과물들이다. 어떤 관객들에게 이선균은 영원한 홍상수의 학생으로도 남을 것이다.

<옥희의 영화> 속 진구는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함께 나이 들어갔다. 15분의 길고 긴 롱테이크에서 “끝까지 파고, 파고, 파고 들어봐야 뭐가 중요한지 아는 거잖아요”라고 외치던 이 배우의 혈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2023년 <>으로 재회한 이선균, 정유미 콤비를 만나러 극장에 다녀온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비보를 듣게 됐다. 배우의 유작은 현대사의 격동을 통과하는 군인을 연기한 추창민 감독의 <행복의 나라>, 대교 위에서 위협적인 개 실험체를 마주한 청와대 행정관 역을 맡은 <탈출: PROJECT SILENCE>다. 이선균은 등장 이후 마지막까지 배우로서 부지런했다. 일기를 쓰듯 한줄 한줄 자신의 전통과 차이를 써내려가면서 이어질 다음 장의 역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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