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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파란 자전거> 동정심 따윈 필요없어
2007-05-03

<파란자전거>를 본 장애인, 한국영화 속 왜곡된 장애인 캐릭터에 대해 비판하다

영화 <파란자전거>의 주인공 동규는 어릴 적 사고로 한팔을 잃고 의수를 착용한 채 살아가는 장애인이다. 두팔이 온전한 일반 사람들과 달리 한팔이 없다는 자괴감으로 동규의 얼굴에는 늘 수심이 가득하고 허무함이 짙게 물들어 있다. 1시간30분이라는 상영시간 내내 장애의 아픔으로 수심이 가득한 주인공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수년 전 병문안 가서 보았던 한 장애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주인공 동규처럼 20대 청년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지병으로 몸이 약해서 바깥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어 모든 일상생활을 가족의 도움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외부세계와의 소통은 거의 단절된 채 20여년을 살아왔고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인생의 허무함만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파란자전거>의 동규와 병실의 장애인은 얼굴 표정은 비슷하지만 장애 상태나 살아온 환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병실의 장애인은 어려서부터 워낙 심한 장애 탓에 외출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살아왔지만 동규는 한팔을 제외하고는 남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일반인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영화 속 동규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웃는 모습이나 남들과 어울려서 즐겁게 생활을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허무한 표정만 지닌 채로 살아가는 것일까?

왜 항상 장애에 갇힌 불쌍한 사람인 거야?

미국에 가본 일도 없고 그래서 그곳에 사는 인디언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나에게 인디언의 이미지는 어린 시절에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당시는 TV에서 서부영화를 자주 보여줬었는데 영화 속 인디언들은 문명인인 백인들과는 달리 미개했으며 요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정의롭고 착한 백인들을 위협하는 야만인들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디언의 이미지가 바뀐 계기는 성인이 된 뒤 미국 인디언 문화를 다룬 서적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서부영화 속 인디언의 이미지는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힘없는 소수자로 전락한 인디언들의 관점이 아니라 미국사회의 지배계층이고 할리우드를 주무르고 있었던 백인들의 관점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의 주류는 비장애인이고 거의 모든 문화가 그렇겠지만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상업영화도 거의 비장애인들이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비장애인이고 그들의 외모, 성격, 직업 등도 다채롭다. 하지만 비장애인과는 대조적으로 장애인 캐릭터는 수도 적지만 몇몇 특정한 모습으로만 한정되어 있어서 장애인의 삶을 모를 수밖에 없는 관객에게 장애인들은 특정 모습으로만 살아간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외부세계와의 끊임없는 소통이다. 소통은 한쪽의 일방적인 교류나 단순한 사람끼리의 접촉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이해가 바탕에 깔린 대등한 교류를 뜻한다고 볼 때 한국영화 속 비장애인 캐릭터들은 아무리 내성적인 성격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으면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성격 등 인간적인 면 때문이 아니라 장애의 아픔에 갇혀서 가족이나 소수의 주변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불쌍한 존재로만 묘사되고 있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서의 정신지체 장애인은 외부 사람들은 물론 가족과도 전혀 소통을 못하는 인물이고, <오아시스>의 뇌성마비 장애인은 혼자서 벽만 쳐다보거나 거울 장난하는 게 유일한 낙인 한심한 사람으로,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시각장애인은 장애에 갇혀서 몇몇 사람과만 교류하는 답답한 존재로 등장한다. <맨발의 기봉이>와 <허브>의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이장이나 어머니, 어린아이들과 같이 자신의 나이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는 모습으로 등장해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지능이 낮기 때문에 또래와는 소통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후아유> <복수는 나의 것>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청각장애인들과 <안녕! 유에프오>의 시각장애인은 일상생활 속에 만나는 사람은 많지만 장애의 아픔 때문에 혹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소통을 하는 사람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만이 존재한다. <파란자전거>의 동규도 일하고 사랑하고 친구들도 만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장애의 아픔뿐이라고 얘기한다.

영화는 이렇게 장애에 갇혀서 세상과 소통을 제대로 못하는 불쌍한 장애인들을 지켜주고 구원하는 존재는 바로 비장애인이라고 말한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서는 동생이, <오아시스>에서는 전과자가, <사랑따윈 필요없어>에서는 호스트바 제비가, <안녕! 유에프오>에서는 버스기사가, <후아유>에서는 게임개발자가, <맨발의 기봉이>에서는 이장이, <허브>와 <말아톤>에서는 어머니가, <파란자전거>에서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인들이 동규 곁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준다. 이렇듯 한국영화 속의 장애인들은 장애의 아픔에 갇힌 불쌍한 존재이므로 성인이 된 뒤에도 항상 비장애인의 도움이나 사랑이 필요하며 이들의 지원없이는 세상과 소통하기 힘든 의존적인 존재라고 얘기하고 있다.

장애가 있든 없든 사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다

일반인 중에는 자신을 한없이 자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장애의 아픔 때문에 동규처럼 평생을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외부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애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더 많다. 나 역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기 때문에 주변에 알고 지내는 장애인들이 많지만, 한국영화 속의 장애인처럼 장애에 갇혀서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장애인들은 장애의 아픔을 느낄 때도 있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도 받기도 하지만 그것에만 연연해서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지도 않으며 동정심이나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도 아니다. 일반인이 갖가지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듯 장애인들도 똑같이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진들은 장애인에 대한 치열한 연구없이 기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천편일률적인 장애인 캐릭터만을 양산하고 있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외국영화 제작진들은 다양한 모습의 장애인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처럼 장애에 아픔에만 갇혀 있는 캐릭터도 있지만, <포레스트 검프>나 <아이 엠 샘>에서는 지능이 낮은 장애인임에도 비장애인들의 도움없이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는 장애인이 변해서 일반인과 소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장애인을 편견없이 보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꼭 중요한 역이 아니라도 많은 영화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결코 구원이나 동정심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며 장애에만 갇혀 지내는 불쌍한 사람도, 극적인 인간승리의 표본도 아닌 그저 장애를 지닌 채 평범하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얘기하고 있다.

<파란자전거>의 권용국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사실 장애는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극복되지도 않는다”라고 얘기하면서도 정작 작품 속에서의 동규 모습은 장애의 아픔에만 갇혀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불쌍한 장애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감독은 자신이 장애인이라 누구보다 장애인의 심정을 잘 알지만 기존의 한국영화 속의 장애인 이미지가 너무도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한국영화 제작진들의 머릿속에는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디언들처럼 한쪽으로만 치우친 왜곡된 장애인의 이미지가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작진들이 정형화된 장애인 이미지를 버리고 현실의 장애인들의 삶을 치열하게 연구해야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나 살아가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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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승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미디어 모니터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