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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의 직구 승부, 이번엔 스트라이크
강병진 2011-01-25

충주 성심학교의 청각장애 야구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글러브>

<실미도> 이후 강우석 감독의 캐치프레이즈는 ‘언제나 도전’이었다. <공공의 적2>와 <한반도> <이끼>에 이르기까지 규모의 확장과 장르에 대한 시도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강우석은 “이번에 안되면 나는 끝”이라거나, “이번이 가장 가혹한 시험대”였다고 말해왔다. 17번째 작품인 <이끼>는 그중 가장 가혹한 실험이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은 지난해 2월 <이끼>의 마무리 촬영을 하던 도중 18번째 영화 <글러브> 연출을 발표했다. <글러브>는 청각장애인으로 구성된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장애와 스포츠를 통한 휴먼영화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그의 최근작과 멀리 있는 듯 보였지만 지난 1월10일 공개된 <글러브>는 시험에서 해방된 강우석 감독이 자신의 주무기를 마음껏 펼친 영화로 드러났다. 도전을 외치기 이전의 영화들, 다시 말해 웃음과 감동을 주된 테마로 삼았던 그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글러브>는 강우석 감독의 본질적인 취향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글러브>의 정서적 감동을 강우석의 영화에서 찾아본 한편, 그에게 직접 물었다. <글러브>는 당신의 최선입니까?

비평가들은 강우석의 영화를 직구로 비유해왔다. 이야기의 끝이 어디든 간에 에둘러가지 않는 직설적인 화법에 빗댄 표현이다. 하지만 그는 <실미도>를 만든 이후, 또 다른 투구법에 관심을 돌렸다. 화법은 여전히 직구에 가까웠지만 공이 닿는 지점이 달라졌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1기와 2기로 나눌 때, 데뷔작인 <달콤한 신부들>부터 <실미도>까지 1기의 영화들이 웃음과 감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공공의 적2>부터 <이끼>까지 2기의 작품은 메시지의 설파와 장르적 도전을 최종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1기의 대표작이 <공공의 적>이라면, 2기의 대표작은 (비평과 흥행의 성과와 상관없이) <한반도>다. 강철중은 가는 곳마다 웃음을 터트렸고, 역사학자 최민재는 말을 할 때마다 설교의 강박을 갖고 있었다. 강우석 감독의 18번째 작품인 <글러브>는 1기에 해당할 법한 영화다. 웃음과 감동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명확한 직구로 승부한다. 어쩌면 강우석의 1기에 해당하는 영화들이 품고 있던 요소들, 그의 본질적인 취향이 집약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러브>의 주요 테마는 장애와 스포츠다. 청각장애인으로 구성된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지향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성심학교 야구부는 2002년 창단 뒤 지금까지 매년 봉황기, 대붕기, 회장기 등 전국대회에 출전했지만 아직도 1승을 거두지 못한 팀이다. 선수가 모자라 참가를 못한 경우도 있고 어렵게 출전했으나 콜드패를 당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청각장애를 가진 선수들은 타격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없고, 수화를 통해 작전을 지시받을 수밖에 없으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수들간의 콜사인을 주고받을 수 없다. 장애와 스포츠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강력한 소재이다. 한쪽 다리를 잃은 잠수부의 장애극복 드라마인 <맨 오브 오너>나 호킨스씨병을 앓는 야구팀 후보 포수를 주인공으로 한 로버트 드 니로의 <대야망>도 있다. 한국영화로는 <말아톤>과 <날아라 허동구>가 있다. 특히 이 두편의 영화는 장애의 극복을 감동의 뇌관으로 심지 않고, 스포츠를 성장의 통로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글러브> 또한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지향하지 않는다.

영화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실화에 퇴물 직전의 야구선수가 겪는 성장담을 포개놓았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였던 김상남(정재영)에게 영광은 한때의 일이다. 지금 그는 음주와 싸움을 일삼는 사고뭉치 ‘먹튀’로 전락해 있다.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그를 위해 매니저인 철수(조진웅)는 어렵사리 재기의 기회를 마련한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임시코치 자리다. 몇달 정도 눌러 있다보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꼼수였지만, 상남이 대충 쉬어갈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실력도 없고, 교체할 선수도 없을 만큼 적은 선수에,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할 수 없는 야구부의 목표는 ‘어이없게도’ 전국대회 1승이다. 상남은 아이들의 불가능한 도전을 무시하지만, 곧 그들의 모습에서 야구에 미쳐 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한다. <글러브>의 감정적 울림은 상남과 아이들이 야구를 향한 솔직한 열망을 드러내는 순간에서 터진다. 시나리오상에서는 눈물을 연속적으로 터트리기에 충분할 선수들 개개인의 사연이 담겨 있었으나, 강우석 감독은 사연의 상당 부분을 쳐내고 오로지 그 순간만을 향해 감정선을 지탱하고 있다. 강박적인 유머코드나 관객을 향한 강요에 가까운 주장은 끼어들 틈이 없다.

강우석 감독이 이미 풀어본 문제들

장애인 이전에 학교라는 공간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글러브>는 먼저 강우석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연상시킨다. 입시공부를 해야 하니 체육시간을 줄여달라는 학부모의 성화나 어차피 장애인은 야구로 먹고살 수 없으니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는 <글러브> 속 학교 운영진의 주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입시공부를 강요받거나 장애를 인정해야만 하는 학생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글러브>가 가진 스포츠의 테마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전혀 다른 차원의 강우석 영화를 상기시킨다. 남성들의 육체적 충돌과 변화, 그들의 연대를 그린다는 점에서 <글러브>와 가장 유사한 영화는 <실미도>로 보인다. 상남을 따라 산등성이를 겨우 달리던 아이들이 상남을 따라잡을 만큼 몸의 변화를 겪는 장면은 <실미도>와 판박이다. 그런가 하면 교장에게 무릎을 꿇고 야구를 하게 해달라는 아이들의 결연한 태도는 “꼭 가고 싶습니다! 보내주십시오!”를 외치던 실미도 대원들의 구도와 비슷하다. 손가락이 부어올라 터져버릴 때까지 공을 던져도 “꼭 이기고 싶다”고 간청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또한 죽더라도 이름을 남기려 하는 <실미도>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글러브>는 몸의 감각을 믿는 강우석 감독의 기질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남루한 인생을 살던 남자들이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몸을 부대끼고 전사로 거듭나고, 강철중이 육체적인 지각으로 살인마를 지목했듯, 강우석은 사람이라면 몸과 마음의 변화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찾아오며 그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감각이라고 믿는다. 주요 캐릭터가 청각장애자인 <글러브>에서는 그 믿음이 더 직설적이다. 극중의 상남이 코치로서 먼저 하는 말은 “너희들이 흘린 땀만 믿으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는 테크닉 이전에 몸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르친다. 강팀과 연습경기를 주선한 뒤, 0 대 32의 쓰라린 패배를 안긴 상남은 아이들을 이끌고 약 100km의 길을 뛴다. 널브러진 아이들에게 그는 “남들에게 이상하게 들릴까봐 겁먹지 말고, 분한 만큼 억울한 만큼 소리를 지르라”고 외친다. 패배의 분노에 몸서리치던 아이들은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이때부터 이들은 야구단을 해체하려는 학교에 맞서고, 좋아하는 소녀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두 영화의 감정적인 정서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글러브>가 여러모로 강우석 감독이 이미 풀어본 시험문제에 가까운 영화라는 인상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놓은 답은 같지만, 관객에게 전하는 울림의 색깔은 다르다.

스포츠 정신으로 보는 사회적 예의

관계의 묘사를 통해 감정을 전하는 방식과 함께 <글러브>는 강우석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예의가 드러나는 영화다.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해온 예의란 이를테면,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는 것(<공공의 적>)이고, 필요없다고 함부로 사람을 버리면 안되는 것(<실미도>)이며, 남의 것을 제 것이라고 억지 부리면 안된다는 것(<한반도>) 등이다. 페어플레이와 어떤 경기든 최선을 요구하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그의 생각은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극중에서 상남은 성심학교 아이들을 일부러 봐주려고 하는 상대팀 선수들에게 분노한다. 이때 상대팀의 감독 또한 자기 선수들을 챙기려 하지 않고, 그에게 알아서 혼내라는 식으로 자리를 내준다.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부분이지만, 이 장면에서 엿보이는 스포츠 정신의 단호함은 꽤 멋스럽다. 물론 이를 운동선수들의 마초적 기질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우석에게 예의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남성성은 어느 시대나 상관없이 꼭 지켜야 할 미덕이다. 상남과 아이들의 관계 외에 <글러브>의 또 다른 축은 상남과 매니저 철수의 관계다. 철수는 구단과 팬으로부터 버림받은 상남의 재기를 위해 살려보겠다고 KBO부터 메이저리그 관계자를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한다. 한때 그 역시 고교 시절 최고의 야구선수였던 철수는 투수인 상남과 학교의 승리를 위해 몸을 던지다 부상을 당했던 과거가 있다. 그때부터 자신의 영웅인 상남의 매니저를 자처한 그와 미안함과 죄책감을 둘 다 가진 상남의 관계는 꽤 비중있는 감동을 전한다. 언뜻 <라디오 스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지만 이들의 관계 또한 “남자라면 나눠먹고 함께 가야 한다”는 강우석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부분으로 보인다. 파트너십을 자랑했던 <투캅스>의 두 형사, 그리고 <공공의 적> 시리즈를 이어온 강철중과 엄 반장(강신일)의 관계, “너 혼자 멋진 척하는 걸 볼 수 없다”며 함께 죽음을 선택한 <실미도>의 인찬(설경구)과 상필(정재영)처럼 강우석의 영화에서 두 남자는 언제나 두 남녀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했으니 말이다.

<글러브>는 아마도 강우석의 작품 가운데 가장 밝고 씩씩한 기운을 품고 있는 영화일 것이다. 아이들은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웃는다. 힘들어도 참고, 장애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물론 시종일관 씩씩한 에너지를 전하는 것이 현대 대중영화에 걸맞은 세련된 방식은 아니다. 선수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종종 뻣뻣해 보이고, 극중의 야구경기는 오로지 경기의 흐름에만 집중한다. 영화의 정점에 해당하는 마지막 야구경기조차 실제 관중이 별로 없는 고교대회의 특성을 반영해 텅 빈 관중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글러브>는 그런 담백함이 장애인의 스포츠 도전이라는 영화의 테마와 맞닿아 있는 영화다. 어느 때부턴가 강우석의 인장처럼 보였던 일장연설의 순간이 없다는 점도 2기 영화들에 비해 부담이 덜하다. <실미도> 이후 강우석은 언제나 과욕의 도전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글러브>는 강우석 본인의 승부사 기질을 내려놓고 대중영화 감독으로서의 태도를 되찾은 작품이다. 관객과 가장 친숙하고,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던 강우석 감독이 돌아왔다. 공 끝이 꽤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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