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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한국영화의 역사가 새겨진 배우 안성기의 60년 연기 인생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7-04-12

데뷔 60년, 배우 안성기의 궤적을 따라가는 건 우리에겐 게을리할 수 없는 중차대한 일이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가 시작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시대별로 나누기만 해도, 1980년대 이장호, 배창호 감독이 주도한 한국영화의 뉴웨이브, 사회비판적 영화들의 흐름이 보이고, 임권택 감독의 방대한 영화 세계를 모자이크할 수 있으며, 1990년대 충무로의 흐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국민배우’라는 수식, 트레이드 마크가 된 주름진 환한 미소의 얼굴이 아마, 안성기라는 배우를 규정할 수 있는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단어일 것이다. 지금도 배우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어떤 전형성으로도 엮이지 않은 채 변화하고 전진하고 있다. 아직 안성기의 얼굴에서는 찾아야 할 것이 많다. ‘데뷔 60년’이라는 숫자를, 그저 한 템포 쉬어가는 정도로 인지해 달라는 배우의 당부가, 앞으로 그의 계획이자 다짐처럼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씨네21> 창간 22주년을 기념하며 데뷔 60년을 맞은 배우 안성기에게 만남을 청했다. 마침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에 관해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부)의 소개글도 함께 수록한다.

-60년이라는 숫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요. 그간의 연기 생활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게 꿈인가 싶기도 하고. 정말 실감이 안 나는 숫자네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는 영화제(‘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도 내가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합니다. 보통 회고 형식의 기획전을 하면 이제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이 대상이 되는데. 그전과 달리 절대적인 활동 시간은 적겠지만 그래도 나는 앞으로 계속 활동을 할 건데. 그러니 이번 영화제를 미래에도 활동을 하는 긴 과정 중에서 배우 안성기가 또 새롭게 변해가는 과정의 한 단계 정도라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봐주면 좋을 것 같아요.

-배우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는 건 곧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IPTV, VOD 서비스로 접할 수 없는 작품들이 상당수인데요.

=그래서 과거에는 판권을 두고 밀짚모자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그처럼 허술했단 얘기겠죠. (웃음) 당시는 지금처럼 한국영상자료원이 있어 관리를 하지도 않았고, 제작사들도 모두 영세한 구조였죠. 요즘은 보존에 대한 가치와 개념도 확실해졌지만 이전만 해도 그런 인식은 상당히 희박했던 거죠. 투자자나 제작자 개인이 애정을 가지고 보존하려고 한 것 말고는 거의 유실되었지 싶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에서 천진한 아들 역할이 떠오르는데요. 아역배우 시절 참여한 작품만 70여편에 달합니다. 그런 보존 문제로 인해 귀여운 ‘소년 안성기’를 보는 기회를 놓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말 어릴 때 연기한 필름은 온전하게 남은 게 거의 없어요. 그땐 개구쟁이 이미지로만 나온 게 많았고, 주·조연 정도의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아버지(배우 안성기의 부친 안화영 선생은 세경영화사에서 기획자로 일했다.-편집자)가 제작한 작품도 없어졌네요. <모자초>(1962)라는 영화였는데, 조미령 여사가 폐병에 걸린 남편을 대신해 아이들을 키우는 내용이었어요. 전영선씨와 내가 아역으로 나왔고. 어린 시절 많은 감독들과 작업했는데 그 작품을 이제 다시 못 보는게 저도 안타깝죠. 작품이 남아 있어야 사후에도 감독을 평가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까요. 김기영 감독만 해도 지금은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초기 작품들을 보면 리얼리즘 영화가 많아서, 또 다른 면을 조명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런 작품들은 이제 볼 수 없으니.

-참여했던 작품의 흔적들을 개인적으로는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갖고 있다면 한국영상자료원 못지않은 보고가 아닐까 싶은데요.

=제가 참여했던 작품들의 스틸은 전부 집에 보관하고 있어요. <모자초>도 스틸로는 갖고 있어요. 출연한 작품들의 시나리오도 박스에 다 모아놓았는데, 100편은 이미 훌쩍 넘었고, 양이 상당히 많아서 꺼낼 엄두가 나질 않네요. 요즘은 영화 찍어도 대본을 제대로 안 줘요. 당일에 페이퍼로 주기도 하고, 메일로도 받고 그러다, 나중에 그걸 제본해서 만들고 그러는데, 예전엔 촬영 시작할 때 책으로 줬죠. 그걸로 연습을 하니까, 그 책에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장면은 어떤 의미인지 그런 걸 빼곡하게 메모해 놓았어요. 촬영하는 내내 들고 다니니 책이 너덜너덜하게 낡고 그랬죠. (웃음)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 때가 <황혼열차>에서였어요. 고 김기영 감독의 작품으로, 연기를 처음으로 경험한 ‘사건’이었죠.

=연기는 무슨, 그땐 아무것도 몰랐어요. (웃음) 김기영 감독이 <황혼열차>를 찍으면서 아역배우가 필요하다고 한 거예요. 우리 아버지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텐데, 아버지가 김기영 감독과 친구였는데 급한 김에 나를 데려다 썼어요. 그게 잘됐는지 주변에 소문이 나고 양주남 감독의 <모정>(1958)에도 출연하면서 그렇게 아역 시절에 70여편을 찍었어요. 그때 내가 5살이었는데 연기를 뭘 알아서 했겠어요. 데려다놓고 하라니까 그냥 한 거지. 지금도 생각나는 건, 어릴 때는 초저녁 잠이 많아 촬영 때 조는 경우가 많았어요. ‘레디 고’하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참고 있다가, 막상 ‘고’할 때 고개가 푹 떨어지는 거예요. 그럼 제작진이 깨우려고 초콜릿도 사주고 그랬었죠. 그때 애먹었던 것 중 하나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웃는 거는 잘되는데 우는 연기를 잘 못했어요. 울라고 하면 그렇게 울음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살짝 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요. 그럼 아픈 김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죠. 지금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 그 상황을 영악하게 헤쳐나간 것 같네. (웃음)

-배우가 무엇인지는 몰랐어도,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데 익숙했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연기 활동에 대해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어느 날 신인이 돼서 갑자기 유명세를 치른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인지하는 때부터 모두가 날 알아봤던 거예요. 어딜 가나 사람들의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끼던 시절이었죠. 그러다보니 심리적으로도 자신감이 상당히 컸어요. 성격도 지금과 달리 상당히 외향적이었고. 그런 개구쟁이 이미지가 당시 영화에 반영된 것 같네요.

-연기를 그만두려고 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20대까지는 작정하고 연기를 아예 접었다고 했는데요.

=다른 아역들, 예를 들어 <꼬마신랑> 시리즈로 유명한 김정훈을 보면 정말 귀여움도 많이 받고 연기도 잘하는데, 나는 내가 봐도 엉성하다 싶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아역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자라면서 그 이미지나 느낌이 계속 남아서 성인 연기자로는 실패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요. 많은 아역 출신 배우들이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죠. 아역으로서 내 이미지는 중학생 때까지였던 것 같아요. 얼굴도 동그랗고 키도 반에서 중간보다 작아서 귀여운 이미지였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얼굴도 길어지고 키도 갑자기 확 컸어요. 그렇게 사춘기를 거치면서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싫고 쑥스러움도 많이 타고 성격도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가더라고요.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작품 섭외가 거의 없었어요. 하이틴물이 붐일 때였는데, 내 이미지는 아역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으니. 그러다보니 연기와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나 스스로도 자유롭게 살고 싶단 생각도 들고. 애초에 영화에 모든 걸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니 딱히 미련도 없었어요. 평범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학도 영화 전공이 아니라 베트남어과(한국외국어대학교)로 간 거였죠.

-배우로서의 의지, 배우로 업을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된 건가요. 특히 베트남어를 전공으로 한, 연기와 상관없는 일을 계획하고 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베트남전쟁 종군 사진기자 필립 존스 그리피스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 <벌레의 눈물>(감독 정희도·이세영, 2016)에서는 재능기부로 내레이션을 할 정도로 베트남 하면 배우 안성기가 떠오르는데요.

=당시만 해도 한국은 군사정권의 분위기 탓에 군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지만 해외는 달랐어요. 장교가 되어 베트남에 갈 요량으로 육군학생군사학교(ROTC)까지 갔죠. 그런데 군 복무 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현실적으로 전공을 살릴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때 ‘뭘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국 영화가 떠오르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이니 나보다 잘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자신감을 가지고 해보자’라고 스스로 암시를 한 거죠. 물론 어릴 때 카메라 앞에 선 경험은 있지만 전공자는 아니니 기본적인 이론도 몰랐고, 영화도 많이 접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걸 만회하려고 한 2년은 무진 애를 썼어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도 한 학기 다녀보고, 시나리오도 써봤죠. 당시는 영화를 많이 볼 수 없는 시절이었는데, 프랑스문화원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일주일에 두세번은 가서 해외영화들을 접했어요. 그때부터 몸을 만들려고 운동도 열심히 했고, 그게 습관이 돼서 아직도 하루 한 시간은 운동을 하고 있어요. 안 하면 몸이 편칠 않고.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 정도 연기할 준비가 된 것 같다는 자신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오랜 휴지기 후 복귀라, 활동을 재개하고 나서 성인 연기자로 자리잡을 때까지 고충도 있었을 텐데요.

=아버지가 기획을 하실 때였으니, <병사와 아가씨들>(1977)이라는 계몽영화에 출연시켜주었어요. ‘아역 출신 배우 안성기 성인으로 데뷔하다’ 이런 기사가 나가기도 했는데, 영화계에 있는 사람만 안성기가 다시 연기하네 했지, 관객에게는 전혀 인지가 안 됐죠. 이후 흥행영화 두세편에 조연으로 출연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도 거의 없으니 잘했네, 못했네 이런 평가도 받지 못했죠. ‘영화라는 게 참 힘들구나’라고 느낀 것도 그즈음이었어요. 그땐 나 개인이 안 풀린다, 이런 걸 떠나 영화계 자체의 풍토가 쉽지 않던 때였어요.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고, 한국영화 쿼터를 따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되는 기획영화들이나 반공영화, 계몽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던 때였어요. 하고 싶은 영화에 대한 갈증은 커가고, 현실은 안 따라주고, 그럴 때였죠.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이 전환점이 됐죠. 배우 안성기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었습니다. 다방에서 배창호 감독을 만나서 작품을 하게 됐다는 캐스팅 일화가 인상적이었는데요.

=광화문 서울신문사 뒤, 지금 한국프레스센터 근처에 성궁다방이라고 있었어요. 언론인들이 거기 많이 왔어요. 이장호 감독이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정지되었다가 해금된 후 여기저기 인사 다닐 때였죠. 그때 나는 거기서 대학 동창들을 자주 만나곤 했어요. 그런데 화장실에 가다가 배창호 감독이랑 만나고 ‘어어, 너 뭐냐’ 이렇게 된 거예요. 배창호 감독이 당시 이장호 감독 조연출 하던 시절이었어요. 이장호 감독은 나를 봐왔을 텐데 그때까지 나는 이장호 감독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고 막연하게 같이 작업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어요. 새롭고 젊은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다가,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되고 급속도로 친해지면서 <바람불어 좋은 날>까지 하게 된 거예요.

<라디오 스타>

-<바람불어 좋은 날>의 어리숙한 중국집 배달부 덕배(안성기)는 그 시대의 청년을 상징하던 인물이었습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자 당시 사회현실을 밀도 있게 그려낸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는데요.

=이장호 감독은 한동안 작품 활동을 쉰 후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했어요. <바람불어 좋은 날>을 만들며 소위 말하는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셈입니다. 나에겐 배우로 성장하는 계기도 되었고, 한국영화사에도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한 시기였지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나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 등 일련의 작품들을 거치면서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게 유신이 종말을 고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죠. 유신정권이 계속 이어졌더라면 그런 작품을 만들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현실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지점들을 반영한 영화들은 70년대에는 아예 만드는 게 불가능했어요. 지금이야 ‘나’ 자신이 앞서는 인물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겠지만 당시 내가 맡은 주인공들은 대부분 어리바리하고 현실을 잘 모르는 인물들이었어요. 돌아보면 그 시기와 잘 맞아떨어졌고, 캐릭터도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상에 잘 맞은 새로운 인물이었죠. 그런 인물들이 사회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들이 막 나올 때였고요.

-임권택, 이장호 감독과의 작업을 시작으로,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9) 등을 작업했는데요. 1980년대 한국영화사는 배우 안성기를 빼고 논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당시 젊은 감독들에게 안성기라는 배우는 절대적인 의미였습니다.

=임권택, 이장호 감독뿐만 아니라 데뷔하는 젊은 감독들과도 그 못지않게 작업을 많이 했죠. 그 중간중간에는 항상 배창호 감독 작품이 있어서, 따져보니 배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내 필모그래피고, 내 필모그래피가 배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됐어요. 당시는 감독이나 배우의 수가 적었던 시절이니 같은 감독의 작품에 한 배우가 지속적으로 출연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감독들과 코드가 잘 안 맞는데, 새로운 감독들과는 오히려 잘 맞더라고요. 박광수, 이명세, 곽지균, 장선우 감독은 기존에 같이 작업한 감독들의 연출부 출신이니 작품하면서 ‘저 친구는 잘 만들겠다’ 이런 감이 와요. 서로 뜻이 맞으면 어떤 영화를 할지 이야기하고 준비되면 들어가고 그랬죠.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형식을 가지고 도전하니 연기도 새로울 수밖에 없었고요. 늘 그런 과정으로 작품을 결정했어요.

-배우로서의 자의식도 그 당시는 정립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특히 ‘배우 안성기’ 하면 모두가 말하는 연기 외에 흐트러짐 없는 생활방식도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죠. 봉사활동 같은 대외적인 활동에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인터뷰 같은 약속도 철저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요. 한번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기자보다도 더 빨리 약속장소에 나와 있어, ‘어떻게 도착했냐’고 물으니 ‘그걸 감안해 촬영 몇 시간 전에 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왔다’고 답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워낙 어릴 때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랑이나 귀여움을 충분히 받아봐서 주목받는 게 새삼스럽지는 않았어요. 그런 시기가 없었다면 나도 붕 떴을 것 같은데, 바로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거죠. (웃음) 아역을 하면서 몸으로 느꼈던 건데, 아역 때 최고로 잘나가다 커서 초라해지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대중에게 주목받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길지 않은지, 인기에만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고요. 한 작품 한 작품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은 거죠. 성인이 되어서 영화를 다시 시작했을 때 내가 근본적으로 생각한 게 하나 있어요. 바로 영화하는 사람이 존경받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어요. 평생 내가 이걸 직업으로 할 건데 영화하는 사람들이 멸시받는 게 너무 싫었어요. 해외에서는 영화인들도 인정을 받는데, 우리만 유독 ‘딴따라’ 취급이더라고요. 어떻게 해서든 영화계, 영화인을 향한 인식이 좋아지면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작품 선택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그런 노력이 잘 전달되고 대중의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바른생활’ 배우라는 것이 혹여 내 생활을 얽매지 않을까 하는 시선도 있는데, 나는 그게 배우로서의 나의 삶이구나 생각해요. 배우를 하면서 선택해야 할 것이 있는데, 나는 똑바른 길을 가면서 고지식하게 가는 것을 나의 길로 삼은 거죠. 내속에 이미 그런 개념이 들어와 있고 이젠 습관이 되었어요.

-긴 활동 연원을 거치면서 변화도 많았습니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때는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이때부터 주연 자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시도했습니다.

=늘 영화의 주연이었다가 조연의 역할을 하는 게 지금의 변화라면 변화죠. 조연도 하고 어떤 때는 주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젠 전보다 작품 수도 줄었고요. 주연을 하면 오히려 부담스러운 것도 없지 않아요. 드물게 하는 건데 잘 안 되면 내가 손해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 상당히 미안하고 부담이 크죠. 골프로 비유하자면, 지금은 골프 채널이나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죠. 생각할 것도 연습할 것도 무지무지 많아요. 그러나 지금은 많은 생각과 연습을 해도 더 안 되는 반면, 젊을 때는 생각도 없었고 모르고 쳤는데도 성적이 더 좋았어요. 그래도 이제는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고 더 깊이 있어진 듯하니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하는 거죠.

-최근작을 돌아보면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2006)에선 인상적인 매니저 역할이나, 신연식 감독의 <페어러브>(2009)에서의 멜로,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2011)에서의 부당하게 해고된 교수, 임권택 감독의 <화장>(2015)에서의 아내를 병수발하는 남편을 연기했고, <사냥>(2016)에서는 탄광 붕괴 사고의 생존자가 되어 추격 액션도 소화했습니다. 매 작품 그렇게 예상 답안이 없는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보여왔는데요.

=작품을 선택할 때마다 시나리오가 제일 우선이에요.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계속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내가 할 역할을 잘 찾아야 해요. 여태까지처럼 찾아야 하지 않나. 통속적이고 상투적인 모습을 해야만 한다면 배우로서는 진짜 괴로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나이가 들면 캐릭터의 폭이 좁아지는 데 대한 아쉬움은 있어요. 원하는 배역은 주인공쪽에서 하고 이쪽에서는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하니까. 대부분 권모술수를 가진 캐릭터의 모습을 보인다든지 악랄하면 악랄하거나 치사하면 치사하거나 이런 역으로 한정되는 거죠. 배우는 그 역할에 욕심이 나야 해요. ‘내가 이 연기를 해볼 거야’ 그런 느낌을 주는 캐릭터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역할을 못 만나고 애매한 역할들만 들어오니 아쉽죠.

-그런 가운데 차기작 선택도 고민일 텐데요. 근간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최근 하려던 작품은 이충렬 감독(<워낭소리>)의 차기작 <매미소리>(진도에 상갓집을 다니면서 분위기를 북돋아 슬픔을 잊게 해주는 무형문화재 ‘다시래기’에 관한 이야기. 전수자가 되고자 외길 인생을 고집한 아버지와 그 딸의 이야기)였어요. 감독이 지난 5년간 준비했는데, 투자가 어려워서 아직은 진척이 없어요. 최근에는 치매를 앓는 인물에 관한 역할이 몇편 요청이 왔어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예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면 나와는 잘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 치매 걸린 연기를 하는 게 맞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런 문제를 다루되 다른 스타일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요. 전형적인 스토리라인 안에서 전형적인 연기를 답습하는 거라면 나로서는 못하겠다고 거절할 수밖에 없는 거죠. 주연에 대한 욕심 같은 건 없어요. 다만 임팩트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싶을 뿐이죠. 오래 쉬더라도, 맞는 작품이 올 때까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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