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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아트하우스 박찬욱관 개관 기념 특별전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 인터뷰

우리가 사랑한 박찬욱의 영화를 만나러

7월을 지나 8월에도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여름영화 대전 속 다수의 작품에서 박찬욱 감독의 흔적을 발견했다. <군함도>와 <옥자>는 홍보 영상에서 그의 추천사를 소개했고, <택시운전사>의 주연배우 토마스 크레치만은 촬영현장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는 일화를 한국 매체에 전했다. 한해 중 한국영화계가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즌에,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박찬욱의 존재감은 그가 동료 영화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인 영화인을 기념하는 CGV아트하우스의 한국 영화인 헌정 프로젝트, 그 세 번째 대상으로 아직 50대에 불과한 감독 박찬욱이 선정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CGV아트하우스는 지난 7월 27일 부산 서면의 임권택관, 서울 압구정의 안성기관에 이어 CGV용산 아이파크몰 아트하우스에 박찬욱관을 개관했다. 박찬욱 감독에게 헌정된 이 극장의 개관을 기념해 그의 연출작과 애정하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마스터피스 특별전-박찬욱, 가까이’가 8월 23일까지 박찬욱관에서 열릴 예정이다(자세한 내용은 CGV 공식 홈페이지 참조). 박찬욱관의 개관과 특별전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열렬한 시네필인 박찬욱 감독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이라는 점 때문이다. 영화광 박찬욱이 소망하는 극장과 상영작은 어떤 면모를 갖추고 있을까. 한국영화계의 마스터로서 최근의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차기작을 구상 중이라는 박찬욱 감독을 만나 끊임없이 이동 중인 그의 현재에 대해 물었다.

-최근 메이저 투자·배급사의 여름영화 경쟁이 한창입니다. 개봉작 감독들의 스트레스가 가장 심할 시기이기도 한데, 올해는 이 경쟁을 관망하는 입장이세요. 한편으로는 홀가분하면서도 동료 감독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복잡미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죠. 한쪽은 류승완 감독(<군함도>)이고 한쪽은 송강호 배우(<택시운전사>)이니, (웃음) 두 영화 모두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요. <청년경찰>과 <덩케르크>는 아쉽게도 아직 보지 못했어요. <덩케르크>는 ‘용아맥’(용산CGV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봐야 한다면서요? 표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옥자>와 <군함도> 그리고 <택시운전사>를 보셨다고 하니, 이들 여름영화 세편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옥자>는 <E.T.>(1982) 같은 영화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같은 작품이었어요. 나로서는 그런 동심의 세계를 그려낸다는 걸 꿈도 꾸지 못하기에,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경탄스러웠죠. 국제적인 프로젝트인데도 ‘엣지’를 줄이지 않으면서 감독 고유의 스타일을 강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좋았어요. <군함도>는 각본 단계서부터 편집까지 가까이서 지켜본 작품이죠. 큰 규모의 예산이 투입된 작품이기에 감독의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잘 알고 있어요. 거기에 짓눌려서 감독으로서 하고 싶은 걸 못한다거나 억지로 하기 싫은 걸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까봐 걱정했지만 영화를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어요. 이 어둡고 슬픈 이야기 가운데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 그 유머가 영화의 장점을 반감시키지 않고 작품의 건강성을 돋보이게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택시운전사>는 역시 송강호의 영화였죠. 저는 특히 그 장면이 좋았어요. 만섭(송강호)이 태술(유해진)의 도움으로 택시번호판을 바꿔 달 때, 태술의 얼굴을 똑바로 못 보고 힐끔거리는 장면. 송강호이기에 가능했던 캐릭터 해석의 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제 <택시운전사> VIP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서 송강호씨를 만나 그 장면 좋았다고 얘기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장면을 찍고서 내가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대요. (웃음)

-영화를 찍지 않을 때에 보고 싶은 영화를 몰아서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선셋대로>(1950)를 보시는 걸 목격하기도 했고요. 감독님의 최근 영화 관람 목록이 궁금해졌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필름누아르 특별전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봤어요. 리타 헤이워드가 주연을 맡은 <길다>(1946)는 울면서 본 작품이에요. 그녀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장면이 너무 멋지고 아름답더라고요. <미국의 암흑가>(1961)는 정말 과감하고, 빠르고…. 제 인생 영화 중에 리 마빈 주연의 <포인트 블랭크>(1967)라는 작품이 있거든요. 그 영화가 바로 이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셋대로>는 흠잡을 게 하나도 없는, 완벽하고 모던한 영화죠. <티-맨>(1947)은 정부기관 홍보영화 같은 작품이에요. 비밀경호국(secret service)의 활약상을 홍보할 목적으로 할리우드와 정부가 합작해서 만든 영화임에도 엄청나게 폭력적이고 무서워요. 앤서니 만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아주 흥미진진했고, 대가들은 이런 영화에서도 힘을 발휘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오늘부터는 충무로뮤지컬영화제에 가려고 해요. <쉘부르의 우산>(1964)과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을 오랜만에 보려고요. 못 본 작품 중에서는 <레니>(1974)가 궁금하고, <캬바레>(1972)도 볼 예정이에요.

-고전영화를 좋아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의 작품 중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없을까요.

=현대영화는 실패할 확률이 높아서 잘 선택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간혹 괜찮은 영화도 있지만 작품의 퀄리티를 담보하고 영화관에 갈 수 있는 경우가 드무니까요.

최적의 조건에서 그의 영화를 만나다

-CGV아트하우스 박찬욱관이 7월 27일 개관했습니다. 상영 시스템에 관해 특별히 CGV쪽에 요청한 부분이 있나요.

=네.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면 색보정이니 사운드니, 정말 디테일한 부분을 가지고, 보통 사람들이 보면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작은 차이를 가지고 몇 시간씩 고민하거든요. 그에 비해 극장의 상영조건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박찬욱관’이 최적의 조건에서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이 극장에서 상영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운 상영관이 되었으면 했고,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관을 열겠다고 CGV에 얘기했어요. 평소 함께 작업하는 컬러리스트(박진호 씨네메이트 이사), 사운드 디자이너(홍윤성 블루캡 실장)를 모셔다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면서 만족할 만한 상태까지 기술적인 부분을 체크했어요. 문제는 유지 관리죠. 양질의 상영환경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필요한데, 가끔 극장에 기습적으로 들러 영화를 보면서 점검할 생각이에요. (웃음)

-어떤 영화를 보며 상영조건을 점검하셨나요.

=<아가씨>(2016)를 놓고 봤어요. 가장 최근작이니까요. 남의 영화는 아무리 봐도 상영 상태가 만족스러운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컬러리스트의 눈이란 대단하더라고요. 나도 시각적인 이미지를 볼 때 나름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미국에서 <스토커>(2013) 색보정을 할 때, 테크니컬러쪽에 이미지가 미세하게 늘어진 것 같다고 지적을 했고 그게 맞는 경우가 테크니컬러의 100년 넘는 역사에서 두 번째 사례였다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가씨>를 보며 박진호 이사가 어떤 장면이 약간 사다리꼴이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왜 그러지 싶었는데, 컴퓨터로 확인해보니 정말 미세한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야말로 매의 눈을 가진 컬러리스트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세계의 다양한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을 텐데, 어떤 극장에서의 상영조건이 가장 만족스러웠는지도 궁금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상영하느라 여러 극장을 다녀봤을 때 뉴욕의 AMC가 좋고, 그다음이 파주의 명필름아트센터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칸국제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인 뤼미에르 극장이 좋았어요. 기술적으로는 열악했지만 기억에 남는 상영은 공동묘지에서 <박쥐>(2009)를 야외상영했던 순간이었어요. 멕시코에 과나후아토영화제라고 있어요. 과나후아토는 샘 페킨파의 <가르시아>(1974)에서 주인공 커플이 늘 가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끝내 못 가보고 죽게 되는 환상의 장소인데, 그곳에서 영화제를 하는 거죠. 부잣집 공동묘지 터에 스크린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대리석 벽이 있더라고요. 그걸 스크린 삼아 뱀파이어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이 재밌었죠. 관객은 묘비 사이사이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거지. (웃음)

-<박쥐> 얘기가 나온 김에, 박찬욱관 개관과 더불어 열리는 ‘마스터피스 특별전: 박찬욱 가까이’에서 <박쥐>와 <아가씨>는 확장판 버전의 상영을 선택하셨더라고요.

=<박쥐> 확장판은 지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딱 한번 상영했었어요.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기에 확장판 상영을 결정했죠. 물리적으로는 상영시간이 길어졌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더 짧게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버전이에요. <박쥐>는 감독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아가씨>는 개봉판과 확장판 중 선택하라면 개봉판을 선택할 거예요. 하지만 편집된 장면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는 확장판이 더 재미있겠죠.

-<친절한 금자씨>(2005)와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는 이번 특별전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선보입니다.

=거기에 <복수는 나의 것>도 포함돼요. 이 영화는 먼지제거 작업이 완벽한 상태는 아니지만 보기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고, 정말 새로운 관람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필름의 질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거든요. <박쥐>도 필름으로 촬영했지만 디지털 시네마 형식으로 제작한 걸 다시 리마스터링했기에 필름의 질감은 많이 사라진 상태인데, <복수는 나의 것>(2002)은 필름 그레인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당시에 영화를 보지 못한 젊은 관객에게는 이상하고 낡은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 필름 질감에 애착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주 반가운 선물이 될 것 같아요.

스크린 밖에서 이뤄진 관객과의 접촉

-<아가씨>에 대한 인터뷰와 비평, 제작기와 현장 스틸을 총망라한 <아가씨 아카입>이 8월 10일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개의 한국영화가 개봉 뒤 DVD, 블루레이 발매까지 마치고 나면 관객과 만날 기회가 드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감독님의 영화는 지속적으로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에는 <아가씨 사진집>과 더불어 <올드보이> 블루레이, <박찬욱 각본집>을 출간하기도 했고요.

=기회가 있을 때 말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개봉작의 흥행은 다음 작품을 투자받을 정도라면 만족해요. 다만 내가 만든 영화가 긴 생명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요. 다양한 저장 매체를 통해 사람들이 내 영화를 10년 뒤에도 보고, 20년 뒤에도 시네마테크에서 볼 수 있게 되길 바라죠. 그것이 영화감독으로서의 목표이기에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영화를 다듬어서 새롭게 선보이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그런 제안이 들어왔을 때 협조를 잘하는 편이고요.

-‘마스터피스 특별전: 박찬욱 가까이’의 두 번째 섹션에서는 감독님이 사랑한 영화들을 상영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셨나요.

=이번 기회에 극장에서 내가 다시 보고 싶은 작품들 위주로 영화를 선별했어요. CGV쪽에 제안한 영화는 더 많았는데, 박찬욱관은 요즘 극장이 다 그런 것처럼 필름 프린트 영사기가 없어요. 디지털 시네마 형태로 상영이 가능해야 하고 자막도 갖춘 작품을 골라야 하다보니 마리오 바바의 <미친 개들>(1974) 같은 B무비들이 포함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워요. 다카미네 히데코가 출연하는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는 것도 아쉽고요.

-상영작 중에 차기작 구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작품은 없나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1969) 같은 영화로부터는 지나친 감상을 배제하고 건조한 무드를 유지하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신중함을 늘 배우려고 하죠. 부조리의 유머감각은 루이스 브뉘엘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고요.

-이번 특별전 이전에 보지 못한 영화도 있으시다고요.

=<더 비가일드>(1971)와 <희미한 곰별자리>(1965)가 그런 영화예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을 봤는데, 그 영화의 오리지널 버전인 돈 시겔의 <더 비가일드>를 보지 못했어요. 두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 입장에서도 비교하면서 보면 좋을 듯한 영화라는 생각에 선정했어요. 루키노 비스콘티의 <희미한 곰별자리>는 근친상간을 테마로 하는 영화이기에 <올드보이>를 본 사람들로부터 내가 이 작품을 참고한 게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최근 <아가씨>의 일본 프로모션 행사에서 한 여성 소설가와 대담을 하게 됐는데, 그녀도 <희미한 곰별자리>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봐야지 하는 생각에 따로 적어놓기도 했어요. 나도 비스콘티 팬인데, 이 영화는 웬일인지 그동안 볼 기회가 없었어요.

-특별전의 또 다른 상영작 <매혹당한 사람들>은 <스토커>에서 함께 작업한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죠.

=올해는 니콜 키드먼의 해죠.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 네편이고, 그중 경쟁부문에 두편의 영화가 올랐으니까요. <매혹당한 사람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라는 작품에서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녀가 두 번째 전성기를 지금 막 시작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칸에서 따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죠. 왜 시나리오를 안 주냐고 하더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더니 저렇게 늘 웃기만 하고 대답을 회피한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경쟁부문의 두 영화 모두 상당히 센 영화였는데도 앞으로 정말 ‘스트롱’한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언제나 배가 고픈가봐요. 대단들 해요. 이자벨 위페르 누님이나 니콜 키드먼이나.

칸국제영화제 그리고 박찬욱의 그후

-올해는 칸국제영화제 70주년이 되는 해였죠.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예년보다 더 많은 영화인이 칸을 찾았는데, 특히 인상적인 만남이 있었나요.

=데이비드 린치와 사진을 찍은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웃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베를린에 갔을 때 린치와 같은 호텔에 묵은 적이 있어요.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거든요. 이번에도 긴 얘기는 하지 못했지만, 나의 영웅 중 한명인 린치와 만났다는 데에서 감동을 느꼈어요. 제인 캠피온과의 만남도 참 좋았죠. 니콜(키드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최근 TV 작업에 재미를 느끼고 있더라고요. 한국에 오자마자 그녀가 연출한 <톱 오브 더 레이크>를 찾아봤어요. 니콜은 두 번째 시즌부터 나온다고 해요. 뉴질랜드의 <트윈 픽스> 같은 작품이랄까. 정말 재밌게 봤어요.

-심사위원들과의 일화도 궁금합니다.

=다들 재밌게 지냈고, 아주 즐거웠어요. (페드로)알모도바르는 스페인 사람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낙천적인 이미지보다는 감독답게 예리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그날 본 영화에 대해 공책에 열심히 메모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컬러의 대가답게 어떤 내용은 파란색, 어떤 내용은 분홍색, 그렇게 아름답게 색깔을 배합해 관람평을 쓰더라고요. 그 공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제시카 채스테인마렌 아데, 아녜스 자우이. 이들은 아주 전투적인 페미니스트 영화인이죠. 이들과의 대화로부터 영화 현장에서 여성으로 겪는 여러 가지 경험에 대해, 또 여성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법에 대해 알게 됐어요. 윌 스미스는 정말 재밌으면서도 자기 생각이 명확한 사람이었죠. 핵심을 찌르는 독창적인 표현을 할 줄 아는 배우였어요. 그리고 판빙빙. 판(fan)은 영어로 ‘부채’고 빙은 ‘얼음’이라는 뜻이기에 ‘당신 옆에만 있으면 시원하겠다’며 함께 웃었죠. 판빙빙은 영화에 대한 의견을 가장 마지막에 내는 편이었는데, 뚜렷하고 재밌는 표현을 많이 쓰는 배우였어요. 작곡가 가브리엘 야레는 현명하고 인자했어요. 레바논 출신의 이민자라서 그런지 소수자 정책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파올로 소렌티노마틴 스코시즈가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때 마라케시국제영화제에서 함께 심사를 했기에 친한사이죠. 의견도 잘 맞는 편이었어요.

-최근 세계 영화계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영화 상영 플랫폼에 대한 논의입니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도 넷플릭스가 투자를 맡은 <옥자>의 상영 방식을 두고 한바탕 논란이 일기도 했었는데요. 앞으로 감독님이 차기작을 구상할 때 상영 플랫폼 또한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극장에서 상영하고 싶은 마음이 감독들에게는 다 있을 거예요. 문제는 제작비죠. 마틴 스코시즈조차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작품을 연출하는 이유는 제작비를 다른 곳보다 많이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좀더 모험에 베팅을 하는 거죠. ‘이 시나리오, 이 배우를 데리고 당신이 쓸 수 있는 돈은 이것뿐이야’라고 다른 스튜디오들이 말할 때, 넷플릭스는 더 좋은 조건의 제작비를 제시한다면 영화를 아예 못 찍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게 좋은 조건이겠죠. 그래서 감독 입장에서는 어느 플랫폼이 더 좋으냐의 선택이라기보다, 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인 것 같아요. 그럼 대답은 뻔한 거죠.

-지난 6월 <도끼>의 제작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투자가 무산됐어요. 언제나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충분한 돈이 없는 거죠. <도끼>라는 각본을 놓고 내가 필요한 예산은 이만큼인데 투자자들은 그만큼 주지 못하겠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영화가 잘 풀리지 않고 있는데, 이걸 성사시키려면 내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든가 세계적인 톱스타를 데려오든가, 그게 아니라면 각본을 고치거나 마음을 달리 먹어서 예산을 확 낮추는 수밖에 없는 거죠. 미국에는 10년 된 프로젝트들도 많고 하니, 길게 보고 준비하려는 생각이에요.

-차기작 소식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빨리 정해야죠. SF 액션영화, 서부극, 스파이영화 등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은 많아요. 한국에서 찍고 싶은 영화도 있고, 영어영화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투자가 빨리 되는 작품이 차기작이 되겠죠. 사실 요즘은 2018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동생 박찬경과 함께 열 대형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당분간 그 일 때문에 바쁘지 않을까 싶어요. 동생과 함께 하는 파킹찬스의 전작을 상영하고 각자의 예술 작업도 전시할 예정이에요.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휴대용 아이패드를 꺼내 최근 준비 중인 전시에 수록될 사진 몇장을 보여주었다. <아가씨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과 유사한 느낌의 풍경들,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품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그만의 시선을 담아 재촬영한 ‘서양 미술사’ 연작, 예수상을 색다른 구도로 포착한 사진들을 엿볼 수 있었다. “생물과 사물에는 나름의 감정과 표정이 있다”고 믿는 그는 최근 사진 작업을 통해 아티스트로서의 예술적 자양분을 충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지속될 박찬욱 감독의 사진 작업은 ‘박찬욱관’의 외벽을 통해서도 꾸준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극장 앞 복도에 사진 여섯점을 전시할 수 있어요. 이 사진을 넉달마다 한번씩 교체할 겁니다. 박찬욱관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전시죠. (웃음)”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한 영화감독의 극장전(展)이 지금 막 관객을 만날 채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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