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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혁 감독에게 듣는 <남한산성> 제작기
이화정 2017-09-25

그 겨울의 바람, 치열한 시대의 고민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담담한 말 끝에 백성을 등지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 했던 임금의 급박한 발걸음, 초라한 인조의 뒷모습이 잡히는 듯하다. 1636년 인조 14년. 조선의 왕은 47일간 남한산성에 고립되었고, 청 태종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의 절을 했다는 치욕의 역사로 후대에 회자된다. 하지만 그 결정을 어느 누가 패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전쟁영화지만 사실상 육신의 전투가 아닌 말의 전쟁. 고립무원의 성 안에서는 ‘진짜 나라를 위한, 백성을 살리는’ 승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두 주장이 ‘목숨을 내걸고’ 맞부딪히고 있었다.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이병헌)과 당장 죽을지언정 타협하지 않으려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서로 다르지만 충성과 신념을 다한 말과 말이, 서로를 향한 칼처럼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긴장의 연속.

전투로 볼 때는 ‘지는 싸움’을 블록버스터 사극이라는 장르로 옮길 엄두를 낸 황동혁 감독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눈보라와 언 강, 망월봉, 붉은 눈같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수백년 전 그날의 시린 추위를, 도저히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막막한 그날의 전투를 오늘에 옮겨온다. 2007년 <마이 파더>로 데뷔한 이래 10년. <도가니>(2011)와 <수상한 그녀>(2014)를 지나, 김훈 원작의 문장 하나하나를 시각화한 듯한 유려한 연출의 바탕을 짚어본다. 지난해 11월 크랭크인해 10월 3일 개봉을 앞둔 <남한산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말을 고이 담아, 여기 옮긴다.

황동혁 감독, 이병헌(왼쪽부터).

소설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보면서 차갑고 지적이고 리얼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 역사도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공지영 작가의 원작 <도가니>를 읽고 영화를 만들 때처럼, <남한산성> 역시 소설 속 장면들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치더라. 원래 제안받은 시나리오가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최종병기 활>(2011)과 같은 액션 사극의 느낌이었다면 나는 전혀 다른 방향을 설정한 거다. 그래서 “계약 안 하고 트리트먼트를 30장 정도 써볼 테니 그때 보고 답변 주시죠”라고 했다. 원작에 충실한 방향대로 제작사나 투자사도 같이 하겠다면 가고, 아니면 말자 한 거다.

매일 술만 먹으면서 어떡하지, 방법이 없다, 낭패다 했다. (웃음) 자신 있게 이거다 싶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더라. 소설은 47일간의 전쟁 기록을 시간별이 아니라 ‘눈보라’, ‘언강’, ‘문장가’, ‘출성’ 등의 소단락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실록과 역사책을 보면서 사건을 재배열해보니 큰 사건은 앞의 2주일 정도에 모두 끝나더라. 긴장을 쌓아오다가 마지막에 큰 전투를 배치해서 클라이맥스로 가는 플롯이 아니었다. 구성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47일을 1일, 2일… 47일까지로 나누어 전개하려던 기존의 계획을 모두 엎어버리고, 논쟁을 뼈대로 다시 사건을 재배치해서 새롭게 틀을 짰다. 그제야 해답을 얻었다 싶더라.

<남한산성>은 말의 전투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간의 논쟁의 귀착점이 다시 성 밖의 실제 전투로 연결되고, 그 전투가 다시 성 안에서 둘의 말의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서로 뱉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처절하고 치열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논쟁에 매료돼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분위기를 담기 위해 최근 퓨전 사극풍의 대사를 배제하고 정통 사극의 분위기로 접근했다. 고어, 한문 같은 어려운 말들을 관객이 알기 쉽게 풀어 가다보면 영화의 모든 대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겠더라. 그들의 말이 가진 철학적 층위, 말이 주는 느낌을 살려야 했다. 예를 들어 김상헌의 “명길은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라는 말은 처음 들으면 어렵지만 곱씹어 생각할수록 뜻이 깊어지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다.

과거에도, 또 지금도 (영화를 구상할 당시) 이 나라가 ‘망해 있고’, ‘망해가는데’, 그렇다면 ‘왜 망하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나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의 그 혼란이 현재의 대한민국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고, 남들은 위험하다고 하지만 충분히 창작자로서 표현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눈을 부릅뜨고 돌이켜볼 만한 사건과 배울 지점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위험부담이 없는 영화라는 게 있을까. <도가니> 때는 영화 만들다가 내 영화인생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우려도 했는데, 결국은 만들지 않았나.

최명길이냐, 김상헌이냐, 어려운 결정이다.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더라. 냉철하게 생각하면 ‘치욕을 겪더라도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실리적인 주화파 최명길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청 태종에 엎드리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라는 명분을 앞세우는 척화파 김상헌의 주장에도 마음이 간다. 그 두 마음을 그대로 시나리오에 담아서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에는 역적으로 몰렸지만 현대를 사는 이들이라면 김상헌보다 오히려 실리를 택하는 최명길에게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 쏠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배곯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을 꿈꿀 뿐이다’라는 대장장이 날쇠(고수)나, ‘나를 조선 사람이라 부르지 말라’며 청나라에 봉사하는 역관 정명수(조우진, 조선의 노비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그는 그의 능력을 평가해주는 청나라에서 일을 한다. -편집자) 같은 인물들도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다. 어쩌면 명분을 앞세우는 김상헌은 지금 기준으로 보수적일 수 있다. 어떤 시대, 어떤 컨텍스트에 놓이냐에 따라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논쟁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건 서로 치열하게 싸우지만 서로가 공감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살짝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의견 대립으로 반목하는 지금 정치인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서로 존중하는 그 마음을 영화 구석구석에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싶었다.

이 배우들을 캐스팅하지 못했다면 만들기 힘들었을 거다. <남한산성>의 시나리오는 상업적이지 않다. 승리의 서사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거나 영웅이 탄생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럼에도 장르 특성상 제작비 규모는 큰 영화였다. 투자·배급사를 설득하고, 또 관객이 이 영화를 보게 하자면 연기력과 스타성 두 가지를 가진 배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소수의 배우들이 존재한다. 김상헌이 불덩이라면 최명길은 얼음 같은 성품을 지녔고, 나는 김윤석과 이병헌이라는 두 배우가 이 기운을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두 배우에게 동시에 시나리오를 주고 답변을 기다렸는데 다행히 수월하게 진행됐다.

인조 역의 박해일 캐스팅이 가장 어려웠다. 소위 말해 삼고초려였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서로를 보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 다 인조를 향해 말하고, 인조가 받은 말이 부딪혀서 둘에게 돌아오는 격이다. 백지 같은 창백한 외모,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고 예민한 왕. 말에 흔들리는 리액션을 표현해야 하는데 누가 있을까. 박해일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두번 거절하고 세 번째에서야 오케이를 했는데, 배우 입장에서는 연기도, 정치적 상황도 부담스러운 지점이 충분히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건 ‘추위’였다. 가장 크게 목표로 삼은 것은 문장으로 묘사된 남한산성을 영상으로 옮기는 거였다. 살풍경하고 싸한 겨울의 느낌을 화면으로 최대한 많이 담아내고자 했다. 한겨울 그들이 47일간 고립무원에서 겪는 추위의 묘사가 주안점이었다. 눈, 얼음, 입김, 바람 등 ‘춥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요소들을 시각화하려고 했다. 병헌씨가 “연기 잘한 컷이 아니라 입김 잘 나왔을 때 오케이했다”고 한 말도 과장이 아니다. 일부러 오픈세트를 짓고, 행궁도 문을 다 열어두고 찬바람이 들어오게 한 채로 촬영했다. 세트를 한겨울의 강원도에 지었는데도 생각보다 한국의 겨울에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 않더라. 덕분에 설경을 만드는 것도 고전이었는데 미국에서 가짜 눈을 공수해와서 일일이 뿌리고, 눈 만드는 기계를 동원해 뿌려서 밤새 얼렸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다. 한국의 기존 사극의 톤에서 참조한 건 없었다. 사그라들어가는 나라의 정서를 색감으로 반영하려고 해서 원색을 철저히 배제하고 디세추레이션(Desaturation, 색에 채도를 빼거나 흑백으로 컬러라이징하는 방식)시켜서 바랜 느낌을 살렸다. 화려하지 않은 행궁이 주 무대고, 임금의 용포와 피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강렬한 붉은색이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처럼 최대한 펼쳐놓을 수 있는 장면과 극단적으로 인물의 클로즈업을 대비시키는 식의 화면을 구성했다. 이렇게 원경과 근경을 오가면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포착한다. 대사 장면에서 어떻게 하면 단조롭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다양한 카메라워크를 가져갔다.

절제된 형태의 음악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기존에 접했던 영화음악과 다른, 색깔 있는 영화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한국영화의 음악의 사용 비중이 높고, 감정이나 액션보다 음악이 앞서는 경우도 많다. 몽타주처럼 편집하거나 화면의 부족함을 음악으로 메우는 시도는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 음악과 음향이 섞여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도록 구상했고, 그래서 음악 자체로도 의미 있는 영화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음악을 작업한 사카모토 류이치 음악감독과의 작업이 유의미했다. 음악이 주는 감흥이 다를 거라고 본다. 그가 참여한 이상일 감독의 <분노>(2016)를 보면서 함께 작업하고 싶었는데, 마침 인터뷰를 보니 다양한 작업에 오픈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남한산성>의 음악은 모두 뉴욕에서 작업하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소통으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촬영 중간중간 음악을 만드는 한국과 달리 할리우드는 촬영이 끝난 이후에 음악작업을 시작하더라.

승리의 스펙터클이 아닌 패배의 스펙터클이었다. 당시 성을 둘러싸고 큰 전투는 없었다. 서로 지켜보는 지리한 싸움 한가운데, 가장 큰 전투는 영의정 김류가 300명을 성 밖으로 내려보낸 북문전투였다. 소설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이었고, 총 네번의 전투 장면 가운데 나 역시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고민이 많았던 장면이다. 영화에서 가장 블록버스터적인 느낌을 주는 장면이라 제작비도, 스케일도 가장 큰 장면이었고, 그 시퀀스만 열흘간 촬영했다. 한국영화 사극 중 말 60마리를 동원한, 본격적으로 기마대가 전면에 드러난 장면이라 시각적으로 충분히 색다른 감흥을 줄 거다(해일씨가 “우리 영화에는 말(言)도 많고 말(馬)도 많다”고 했다). 고생한 만큼의 스펙터클이 구현되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다.

다시는 말이 나오는 영화는 안 찍을 거다. 기마대 전투 신과 관련해서는 촬영 중 고생담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말이 그렇게 컨트롤하기 힘든 동물인지 처음 알았다. 영화 촬영을 위해 훈련된 말도 거의 없었다. 정렬을 하면 횡으로 뛰어야 하는데, 슛 들어가는 순간 다들 종으로 움직이더라. (웃음) 다 화면 밖으로 나가니 담을 수가 없는 거다. 60마리의 말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야 전투 느낌이 사는데, 그 그림의 연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훈련받은, 액션 배우들이 참여했지만 말에서 떨어질 위험 등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10년간 적립한 영화연출 마일리지를 쓰는 기분으로 매달렸다. 사극이라는 장르를 해보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오히려 SF 작품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 늘 감독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필모그래피 순서로 네번째쯤에 나의 베스트영화를 만들어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 작품이 성공했다는 전제로, 현장 경험도 쌓였고, 일정 정도의 크레딧도 생겼다면 적어도 내가 작품을 하는 데 크게 다른 구애를 받지 않고 온전히 매달릴 수 있겠다 싶었다. 데뷔작인 <마이 파더> 이후 <도가니> <수상한 그녀>를 연출했으니 <남한산성>이 첫 작품으로부터 10년만이자 네 번째 작품이 된 셈이다. 방금 막 기술시사를 끝냈는데 내 생각대로 나왔다 싶다. 앞선 작품들은 요즘도 TV에서 하면 맘에 안 들고 후회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채널을 돌린다. (웃음) 그런데 <남한산성>은 다시 찍어도 지금처럼 찍을 것 같다. 지난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5개월의 촬영, 총 91회차를 찍었는데 상황상 타협한 몇 장면을 빼고는 거의 계획한 대로 낭비 없이 찍었다. 감독판을 따로 만들거나 그럴 것도 없다. 영화감독으로 이제 10년째 살고 있는데 이 영화가 앞으로 내가 이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해나갈지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 같아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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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