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이라는 분야에 한정해 말한다면 심사라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그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지적 우열이 전제될 때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 심사하는 사람은 심사받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올해 제출된 70여편의 응모작 가운데 다수가 보여준 담대한 지적 모험의 성취도를 우리가 엄격하게 판정할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심사의 의미는, 우리가 찾는 것이 일반적으로 뛰어난 평론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뛰어난 평론이라는 데 있다. 그건 <씨네21> 평론상의 일관된 방침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도 밝혔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부드러움과 명료함, 그리고 영화사적 교양이라는 기준으로 응모작들을 선별했다. 전자의 기준은 평론이 대화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후자의 기준은 영화사적 교양과 그에 대한 존중이 우리 영화문화에서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판단에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1] - 심사평
-
영화는 박찬욱표 ‘종합선물세트’이다. 이러저러한 장르적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일종의 ‘초패러디’인 셈이다.
우선, 이 영화는 그 구성이 너무 치밀하고 완벽해서 오히려 모든 인과관계가 ‘우연성’으로 조작된 듯 보이는 일종의 ‘범죄스릴러’이고 잔혹한 ‘필름누아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일련의 엽기적인 죽음들에 관한 극도로 축약된 ‘검찰보고서’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수사보고서는 거꾸로 쓰여진다. 결과가 먼저 있고 원인이 뒤따른다. 먼저 처벌해야 할 ‘죄’가 있고, 나중에 그 행위의 그럴듯한 ‘동기’가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잉여가 전혀 없다. 이 영화는 마치 수사보고서처럼 군살 하나 없이 철저한 ‘인과율’로 꽉 짜여 있다. ‘결과’는 황당한데,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동기’는 지나칠 정도로 풍부하고 설득력 있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류’가 그토록 황당할 정도로 잔인하게 ‘장기밀매 패밀리’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영화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 변성찬 비평 <복수는 나의 것>
-
누아르를 계승해가는, 포스트누아르 또는 네오누아르라고 불릴 수 있는 진영 중에는 이런 두 가지 부류들이 속한다. <폐쇄구역>의 제임스 폴리처럼 외설적 아버지의 형상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악질 경찰>의 아벨 페라라처럼 존재론적인 것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면서, 누아르의 주제에 닿아 있는 어느 하나를 심화시키는 부류와 <블루스틸>의 캐서린 비글로처럼 팜므파탈을 옴므파탈로 대체하고, <유주얼 서스펙트>의 크리스토퍼 매커리, 브라이언 싱어처럼 1인칭 보이스 오버의 회고를 거짓 내러티브로 뒤바꾸면서, 전체 누아르 컨벤션 중 일부를 변주하는 부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속할 것이다.
누아르 역사에 수없이 등장했던 직업인 보험수사관이 전직인 레너드, 그가 들려주는 1인칭 보이스 오버, 그의 기억손실증을 악용하는 팜므파탈로서의 나탈리, 그의 주위를 맴도는 정체불명의 사내 테드. <메멘토>는 누아르 형식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3] - 정사헌 작품비평 전문 <메멘토>
-
1981년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 88년 졸업, 93년까지 노동운동을 했고 현 대입학원 영어강사. 불혹의 나이에 20년 전 꺾였던 꿈에 다시 도전한 변성찬씨의 경력에는 고단한 시대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자 남은 것은 저녁 7시부터 밤 12시30분까지 이어지는 학원수업이었고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서 그는 영화라는 출구를 찾아냈다. 극장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는 일상이지만 변성찬씨는 귀가하는 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 비디오를 보며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여흥과 오락일 뿐이던 영화가 본격적인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나서다. 할리우드 못지않은 세련된 한국영화가 쏟아지면서 그의 몸에서 발언하고픈 욕망이 꿈틀댔다. 혼자 책과 영화를 보고 인터넷 영화동호회에서 대화를 나누며 영화평론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변성찬씨가 이번에 <씨네21>에 보낸 원고는 대중적으로 공개하는 그의 첫 작품이다.
-언제부터 영화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4] - 최우수상 수상작 변성찬 인터뷰
-
-
홍상수 감독이 네편의 작품을 통해서 일관되게 다루어온 소재(주제)는 한마디로 ‘삼각관계의 심리학’이었다. 감독(작가) 홍상수는 그 보편적인 주제(어떤 의미에서는 상투적이기도 한)를 독특한 ‘형식미학’으로 창출해낸 자신만의 공간 속에 던져놓고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중층적인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많은 ‘불륜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어떤 인물도 그 관계의 부도덕성에 대한 갈등이나 자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자의식의 부재란 곧 ‘사회(제도)와 개인’간의 대결의식이 없음을 뜻한다. 이렇듯 제도와의 긴장을 상실한 인물들은 결국 홍상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실험실’ 속의 모르모트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공간은 결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추상화된 ‘실험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실의 주요한 공간적 표상이 그의 영화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등장하는 ‘술집’과 ‘여관’이다. 홍상수는 이 밀실적 공간에서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5] - 이론비평요지_홍상수의 작품세계
-
정사헌(28)씨는 영화와 담담하지만 오랜 연애를 했다. 고교 시절 시네필의 자부심은 대학이라는 대처에 나와 곧 무너졌지만, 그는 대학 1학년 때 영화평을 쓰겠다고 먹은 마음을 군복무 기간 동안 잘 간수했다가 제대 뒤 영상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그쯤이면 추억담도 많을 만한데 그의 머릿속은 온통 현재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반한 영화의 기억을 묻는 질문을, 대신 최근 관심을 두는 영화를 말하면 안 되겠냐고 부드럽게 물리칠 만큼. 그럴 만도 하다. 영상원 예술사 과정 영상이론과 졸업반인 그는 이제 영화와 어떤 식으로 동거하며 살아갈 것인가 현실적인 방도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을 맞았다. 그러나 평론과 이론, 연출 가운데 어떤 길을 고르건 아직 영화는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이 남은 주제라는 ‘공복감’이 정사헌씨를 이끄는 에너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지난해 <씨네21> 평론상 공모에 ‘한국영화에 나타난 리미날리티(liminality: 도피, 해방, 축제의 공간) 공간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6] - 우수상 수상자 정사헌 인터뷰
-
분절의 항목을 근거로 재배열의 행위를 자극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기 위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도록 하고, 변환하게 하는 것은 인식을 구성하는 우리의 에피스테메, 즉 인식가능성의 조건이다. 관행적인 되풀이를 불안정하게 하고,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배열 집합들과는 전혀 다른 인식의 조건을 내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꽃섬>에서 달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른 것이 아니다. 남편과 두식이 닮아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달라 보이는 것이 꽃섬의 질서에 의해서 같은 장력 위에 동일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표상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동일자로부터 타자를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에 찬 질문이 들어 있다.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어서 혜나 어머니의 친구, 박희진에 대한 오해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우에 있다. 다른 것이 같을 수 있다면, 맞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릴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7] - 이론비평요지_<꽃섬>의 질서
-
노영심 이야기 피아노 아홉번째-My Space대학로 폴리미디어씨어터/ 5월15∼18일 3시·8시, 5월19일 5시/ 아이미디어/ 02-3676-0170작곡자로, 가수로, MC로, 소박하고 편안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엔터테이너 노영심의 이야기 피아노 시리즈 9번째. 전시로 여는 음악회를 표방한 이번 공연은 전시와 영상, 피아노의 ‘아름다운 삼각관계’가 어우러지는 이색 콘서트다. <영심이네 가게> <피아노 연주>라는 3개의 테마로 꾸며진다.이지상 라이브 콘서트 “386동창회”건국대학교 새천년홀 대극장/ 5월22일(수) 7시30분/ 문화예술 푸른소/ 02-725-4179 80년대와 90년대 노래운동으로 활동을 시작, 전대협노래단 조국과 청춘, 포크그룹 노래마을 등에서 활동했던 가수 이지상의 386세대에 의한, 396세대를 위한 콘서트. 386세대적인 사람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담은 3집 앨범 수록곡 <춘천역> &l
노영심 이야기 피아노 아홉번째-My Space / 이지상 라이브 콘서트 “386동창회”
-
타임머신H. G. 웰스/ 엔북 펴냄/ 7천원<투명인간> <우주전쟁> 등 유명한 영국의 SF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H.G. 웰스의 <타임머신>의 국내 첫 완역본. <타임머신>은 알려져 있듯, 시간여행과 시간여행의 패러독스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 SF소설일 뿐 아니라 웰스의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투영한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의 런던. 시간여행 연구에 몰두한 한 과학자가 타임머신을 발명한다.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80만년 뒤의 미래로 떠난다.김성곤의 영화기행김성곤/ 효형출판 펴냄/ 9천원스크린 뒤에 숨은 영화의 숨은 코드들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영화’라는 문화 텍스트에 대한 문학적 해석과 분석을 시도한 책. 예를 들어 지은이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디 아더스>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우리가 보는 타자들, 즉 서양이 보는 동양, 백인이 보는 유색인, 기독교가 보는 이단종교 등의 은유로 파악하며 편견에 사로잡혀 있
타임머신 / 김성곤의 영화기행
-
Spanish Heart페터 신들러, 이경선, 장승호굿 인터내셔널 발매독일 피아니스트 페터 신들러,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그리고 기타리스트 장승호가 모여서 강원도 원주 문막의 한 시골교회에서 레코딩한 앨범. 카탈루냐부터 안달루시아까지 스페인 전국의 민속적 지방색이 담긴 14곡을 만날 수 있다. 급박한 리듬변화가 다이내믹한 느낌을 주는 <탱고>, <톰과 제리>를 연상하면서 연주했다는 쾌활한 <스패니시 하트>에 이어 마지막 <자장가>에서는 반복적인 현악기의 선율을 관통하는 피아노가 진중한 긴장을 유발시킨다.Eternal MelodyYoshiki신나라 발매X-Japan의 요시키가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스튜디오에서 히트곡들을 클래시컬하게 편곡·녹음한 앨범. <Endless Rain> <Rose of Jealosy> 등 모든 트랙들을 조금씩 결합하여 연주한 서곡 <Overture>로 시작하며
Spanish Heart / Eternal Melody
-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 들어간 노래들을 통해 사람들의 귀에 특유의 차분한 느낌을 남겼던 ‘별’이 두 번째 앨범을 내놓았다. 두 번째 앨범이라기보다는 두 번째 ‘사운드/그래픽 복합체’를. 제목은 <너와 나의 20세기>. 내성적인 테크노라고나 할까. 아르페지오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인파 계열의 미니멀한 신시사이저 소리와 샘플링되어 반복되는 소음, 전화 목소리처럼 필터 처리된, 멀리서 들리는 남자의 속삭임을 연상시키는 보컬이 어우러진 그 노래들은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확실히 우리가 기다리던 소리의 하나였다. 내성적이며 남들 귀찮게 떠들지도 않고 굉장히 개인주의적이며 도시적인 아이들, 어른들이 보기엔 시끄럽게 떠드는 애들 못지않게 못되게 구는 아이들의 소리 말이다. 이 소리들의 공감대는 그런 식으로, 주류 문화판의 기대나 관심과 전혀 상관없이,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형성된다. 별의 차분하고 영롱한 전자 사운드에서
별의 두 번째 앨범 <너와 나의 20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