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몇 십분 일찍 만났고, 주변엔 사람들이 많은 터였다. 인터뷰를 앞두고 <밤과낮>을 머릿속에서 복기해보긴 했지만, 성남(김영호)의 꿈속에 난데없이 침입한 여자의 얼굴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베를린영화제 때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는데, 멀리서 똑딱이로 찍은 것이라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카페 느와르>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니 신기할 수밖에.
대단한 우연이라고 말하긴 좀 뭣하다. 미술학교 보자르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에서 어학원을 다니던 정지혜가 홍상수 감독을 만난 인연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선배가 <밤과낮> 스탭으로 결합하면서 주어진 오디션 기회. “그냥 재밌을 것 같아” 응했고, 친한 친구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난 여자의 반응을 “무덤덤하게 연기해서” 합격했다. “대본이 아침에 나오잖아요. 불안한 상황에서 대본을 외우고, 슛 전에 떨면서도 그
[정지혜] 비현실적인 개성을 응원함
-
<헬프리스>의 아사노 다다노부를 연상시켰다. 백승빈 감독의 <장례식의 멤버>를 촬영하던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고, 19살에서 20살로 넘어오던 무렵 이주승의 얼굴에 이미 그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배어 있었다. “난 신이거든. 죽음의 신. 나를 통해 가는 길은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이도다. 단테의 <신곡>, 그게 내 얘기야,” 자신이 만난 세명의 가족에 관한 소설을 쓰는 소년, 죽음을 예견하는(혹은 미리 계획한) 소설을 끝마치고서 자살하는 희준. 세 가족이 각자 필요로 했던 무언가로,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기다리던 어떤 존재로 그는 매순간 바뀐다. 희준은 거의 웃지 않은 채 서늘한 눈매와 그늘을 드리우는 입술로 그렇게 위선적인 삶의 한켠에 서성거리다가 몸을 던졌다. “희준이가 생각하는 대로 영화가 흘러간다. 희준이는 상대방의 약점만 취하여 그에 맞는 주제를 끄집어내며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걸 다 알 순 없다.
[이주승] 고집스럽고 서늘하구나
-
김효서는 좀처럼 초조해하지 않는 배우다. 서울예대 연극과 2학년 시절인 2003년 MBC 공채 연기자로 선발된 뒤로 지금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바탕을 다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김효서는 드라마 조·단역을 통해 경험치를 쌓았고, 대학로에서 기본기를 다시 닦았다. 어린 나이에 깜짝 인기를 모으며 두둥실 떠오르는 다른 배우들을 곁눈질하기보다 “오랫동안 연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효서에게 2010년은 그렇게 다져놓은 바닥 위에 본격적으로 건물을 올리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김종관 감독의 중편영화 <바람의 노래>다. 여기서 그녀는 옛 남자친구와 재회하는 지연을 연기했다. 김종관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 안에서 김효서는 신비로움과 성숙미, 그리고 현실감을 동시에 간직한 여성의 면모를 드러낸다. 김종관 감독의 첫 장편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또한 김효서의 진가를
[김효서] 김종관 감독의 뮤즈
-
2008년 9월이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25기들이 모여 졸업작품 품평회를 열었다. 조성희(31) 감독의 <남매의 집>도 졸업작품 중 한편이었다. 시사가 끝난 뒤 누군가는 “망했네”라고 말했다. 다른 동기들은 “형도 잘 찍을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고 위로했다. 반 농담이었지만, 조성희 감독은 수긍했다. “연기는 딱딱하고, 사운드도 거칠고, 편집도 서툴렀고, 미술도 부족했고, A부터 Z까지 허점투성이였어요.” 하지만 바깥 온도는 달랐다. <남매의 집>은 2009년 단편에 주어지는 영예를 싹쓸이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칸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까지 수상했다.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를 만하다. 혹독한 내부 시선도 누그러들지 않았을까. “음, 요즘은 너무 과대평가받았다고들 하세요. (웃음)”
영화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영화의 ‘영’ 자도 몰랐다”지만, 이야기를 비주얼로 묶어내는 훈련만큼은 혹독하게 치렀다. 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4년 동안
[조성희] 영화적 울림 이전의 진실
-
-
<마더>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을, <미쓰 홍당무>로 청룡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한 재능있는 작가. 그 밖에도 <키친>의 공동각색으로 이름을 올린 박은교는 원래 연출가 지망생이었다. “영상원을 졸업하고 두달 동안 백수로” 미래를 고민하던 그녀는 어느 날 봉준호 감독의 호출을 받았다. “영상원 선생님이셨다. <괴물> 연출부 좀 시켜주세요, 부탁하려고 했는데(웃음) 시나리오를 쓰지 않겠냐고 물어보시더라.” 예상치 못한 작가 필모그래피의 출발점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대거 투영한 졸업작품인 <자전거 경주>. “<마더>처럼 시골 배경에 부모 자식간을 다루는 영화였다. 익산 출신인데, 지방 감수성 같은 게 잘 살아 있더라.”(봉준호)
실제 작업이 시작된 건 1년 뒤로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크랭크인”할 무렵인 2005년 여름. 작업이 마무리된 건 그로부터 2년 반이 흐른 다음이었다. 최종본에서 여고생이었던
[박은교] 코언 형제처럼 되는 그날까지
-
‘2009 올해의 학생’을 뽑으라면 단연 ‘준혁 학생’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의 수다스러운 멤버 중 그는 도드라지게도 홀로 예쁜 연기를 구사하는 캐릭터다. 첫사랑에 가슴앓이하는 소년의 떨림이, 아버지의 지친 어깨를 때로 보듬을 수 있는 든든한 속내가 탑재된 ‘멋진 학생’이 그다. 대사는 많지 않지만, 감정적인 소모라면 만만치 않은 정통 연기다. 제일 어린 아역보다 더 연기 경력이 미천한 신인배우 윤시윤은 그런 준혁 학생으로 연기의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엔 이해가 잘 안 가는 면도 많았는데 이젠 준혁과의 싱크로율이 99%쯤 되는 것 같아요.” ‘세경이 진심으로 좋다’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지금. 윤시윤은 이렇게 준혁에게 푹 빠진 자신이 오히려 신기하기만 하다. “일주일 내내 <지붕킥>에만 매달려요. 촬영있는 날은 대기시간까지 더해 하루 종일, 촬영 없는 날이 있더라도 그 시간은 온전히 대본 외우기에 바치는 거죠.”
스물
[윤시윤] 준혁학생의 진심
-
“그냥, 어려운 사람들 좀 도와주는 거야.” 이제 막 친해진 카드깡업자에게, 수영이 희미하게 웃으며 응수한다. “그래? 나도 어려운데. 나도 좀 도와주라.” <너와 나의 21세기>의 그 부분, 한수연이 연기하던 수영의 그 표정과 말투에서 마음이 내려앉았던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억누르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버려 이제는 지쳤다는 것조차 스스로 깨닫지 못할 만큼, 바스라지기 직전의 가장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수영의 현실이 그 순간 가장 사무쳤다. “<너와 나의 21세기>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이건 나잖아, 내가 해야만 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한수연은 꽤 오랫동안,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개씩 한 적이 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도 삶을 지속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수영에게 깊숙이 감정이입할 수가 있었다.
<너와 나의 21세기> 이후 곧바로 들어간 권칠인 감독의 <러브홀릭>도 쉽지만은 않았다
[한수연] 그럼에도… 참 맑은 그 얼굴
-
신년을 맞이하여 영화계의 새로운 얼굴이라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독과 배우, 각본과 PD에 이르기까지, 2010년이라는 숫자에 맞춰 딱 10명을 자신있게 불러모았습니다. TV와 스크린, 연극 무대까지 아우르며 2009년을 누구보다 바쁘게 보낸 이들에게, <씨네21>은 2010년의 희망을 걸어봅니다.
빛날 듯한 예감, 당신에게 건배!
-
밴쿠버 시내에서 동쪽으로 미니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촬영은 빽빽한 침엽수가 울창하게 들어찬 휴양림 ‘골든 이어즈 파크’에서 진행됐다. 메이플 릿지에 위치한 이곳은 도심에서 고작 한 시간만 지나면 광활한 자연을 내준다는 점에서 밴쿠버 시민들의 여름 피크닉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피크닉을 하기엔 아직 이른 철이라서일까(현장공개가 이루어진 시점은 작년 5월이었다). 촬영 전날, 제작사인 이십세기 폭스로부터 전달받은 ‘현장촬영을 위한 필수 복장’은 ‘비를 대비한 장화와 우비, 따뜻한 옷가지’였다. 그러나 제작사의 당부사항이 무색하게도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다. 폭스사의 현장 매니저는 “어제까진 일주일 내내 비도 많이 오고 추웠어요. 취재진이 오니까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네요”라며 오늘 촬영이 순조롭다는 걸 일러준다. 날씨 칭찬이 끝난 지점부터는 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비포장도로. 현장까지 꼬박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숲길을 따라 걷다보니
바다의 왕자는 청바지를 입는다?
-
이상하다. 존 힐콧이 정성스럽게 완성한 <더 로드>의 대사는 원작 소설에 쓰인 그대로이고, 감독은 일견 단조롭게 반복되는 여행의 여정을, 보는 이의 숨이 턱 막힐 만큼 암울한 지구 멸망 이후의 순간을 솜씨 좋게 되살려냈다. 그런데 뭔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뿐 아니라 그의 소설들 전반적으로)는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 텍스트다. 대화는 극히 적다. 작가는 그저 묵묵히, 남쪽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고난을 묘사한다. 여전히 불타는 숲과, 얼음장 같은 냇물과, 이제는 회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바다와, 무너져내린 집들 사이를 지나치는 그들의 고난에선 설명이나 가공이 중요하지 않다. 보여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혀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강철 같은 냉혹함과 더할 나위 없는 보드라움을 오가는 그 미묘한 진동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것인가.
영화 <더 로드>는 그 지점에 쉽게
서부의 시인, 피의 묵시록을 쓰다
-
대니얼 데이 루이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온 코티아르, 소피아 로렌, 주디 덴치, 케이트 허드슨, 그리고 블랙 아이드 피스의 보컬 퍼기까지. 뮤지컬영화 <나인>은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을 주는 영화다. 여기에 <시카고>로 뮤지컬영화 연출 능력을 검증받은 롭 마셜 감독까지 참여했으니 대단한 영화임에 틀림없다는 확신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 이 화려한 진용과 골든글로브상 후보 지명에도 불구하고 <나인>이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인>을 그 원천인 영화 <8과 1/2>, 그리고 뮤지컬 <나인>과 함께 살피면서 그 ‘허전함’의 근원을 찾아본다.
여기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과거 관객을 웃고 울리는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창작에 어려움을 느끼는 중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는 10일 뒤부터는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스케줄을 앞두고도
<나인> 보석처럼 빛나다가 꿈결처럼 사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