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늦게 카톡이 울렸다. 또래 여배우에게서 온 문자였다. 혼자 술마시고 있으며 외롭다는 내용은, 막막한 미래가 불안하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이어졌다. 선택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적 숙명 때문에 상대적으로 내가 부러웠나보다. 감독은 스스로 할 수 있는 확실한 일이 있지 않느냐, 하는 말에 실은 나도 불안하다고, 아마 모두가 불안할 거라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기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데뷔를 준비하던 시절의 고생담 끝에 기자가 “감독도 되셨고 이젠 걱정 없겠네요”라고 했지. 걱정 없긴. 불과 이틀 전에 난 동료 감독 앞에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이 그립단 얘길 지껄였다. 그 기자는 인사치레로 건넨 얘기였겠지만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사주풀이를 문자로 보내왔는데, 주변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내 염세 기질이 떡하니 적혀 있어 신기했더랬다. 내 운명 안에서 나의 성격과 사상이 이미 정해져 있다니. 사주라는 게 우주의 빅뱅과 팽창을 블록버스터 속 폭파
[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통제 불능의 인생
-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세상은 물리학자에게는 입자의 집합체, 철학자에게는 관념의 집합체, 소설가에게는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때문에 소설가에게 세계는 한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보탠 다음에 사라지는 무대다. 시간이 지층처럼 쌓이며 어떤 이야기는 잊히고, 어떤 이야기는 회자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회자된 이야기들은 신화의 지위를 획득하고, 결국은 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거창하게 시작해서 미안. 하지만 이 영화를 말할 때 거창하지 않으면, 진지하지 않으면, 폼을 잡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영화는 이야기의 원형을 다룬다. 신화 중에서도 신화 격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견하며, ‘그리스 비극’과 혈맹 관계에 있다.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지도, 현란한 화면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슬픔을 쥐어짜지도, 애써 감동을 주입하지도 않는다.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자, 여기 이런 이야기가 있어. 그냥 그렇다고’라는 식으로 관객에게 무심하게 내놓는다. 어찌 보면 무
[내 인생의 영화] 최민석의 <그을린 사랑> 이야기의 원형
-
영국의 중견감독 마이클 윈터보텀은 이탈리아 말을 제법 잘한다. 이탈리아에서의 관객과의 대화 같은 자리에선 ‘더듬거리지만’ 통역 없이 직접 이탈리아 말로 관객과 소통한다. 아마 그런 솔직하고 용기 있는 태도 덕분인지 윈터보텀은 이탈리아의 시네필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높다.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대개 그 나라의 문화를 사랑한다는 뜻일 테다. 윈터보텀은 인터뷰 등에서 자신이 이탈리아 팬이란 점을 종종 밝힌다. 이탈리아의 자유롭고 경쾌한 공기, 활기찬 에너지,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통시성 등을 대표적인 이유로 꼽는다. 그는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이탈리아에서도 영화를 꽤 만들었다. 이탈리아를 살짝 지나가는 <인 디스 월드>(2002) 같은 작품은 제외하고 주요 배경이 이탈리아인 장편영화는 세편이다. 발표 순서대로 <제노바>(2008), <트립 투 이탈리아>(2014), <페이스 오브 엔젤>(2014) 등이 이탈리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제노바와 그 인근 - 리비에라 해변, 포르토피노, 친퀘테레
-
2000년이 되면 지구가 망한다 했던 9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도쿄에 가곤 했다. 어디에서든 거의 매일 거리 연주자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방향 없이 얹어지는 사회의 무게에 대한 감정의 표출이랄까, 그 진정성이 좋아 보였다.
말을 통한 진정성의 표현, 말로 하는 버스킹, <말하는 대로>가 JTBC에서 방송 중이다. 샤이니의 키가 출연한 에피소드로- 백조들 사이에서 닭답게 사는 법- 많은 주목을 받았던 프로그램이다. 유희열과 하하의 2MC가 그날의 버스커들을 데리고 대로(大路)로 나선다. 그리고 이들을 순서대로 풀어놓는다. 방송인 타일러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선작가(김동영)는 자신의 학벌 콤플렉스와 공황장애에 대해 말한다. 얼떨결에 모이게 된 청자는 자신의 감정이 가는 대로 반응한다. 버스킹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순간이다. 덧붙여 빨간 상자에 카드를 태깅하면 1천원이 기부되는 시스템까지 꼼꼼하게 갖춰놓았다. 스튜디
[김호상의 TVIEW]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大路)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
-
[정훈이 만화] <덕혜옹주> 21세기 헬조선에는 특혜옹주가 있다
[정훈이 만화] <덕혜옹주> 21세기 헬조선에는 특혜옹주가 있다
-
엄마는 율 브리너를 굉장히 좋아했다. TV를 보다가도 율 브리너가 나오면 오 율 브리너, 하면서 채널을 고정했다. 어렸을 때는 저 눈 큰 대머리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명절만 되면 <왕과 나>와 <아나스타샤>를 되풀이해서 보게 되었다. 율 브리너를 정말 좋아하게 된 건 좀더 자란 이후에 우연히 <황야의 7인>을 보면서부터였다. <황야의 7인>을 보고난 이후 나는 율 브리너 대머리에 솟은 힘줄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훨씬 더 어렸을 때 이야기다.
새벽에 미군방송을 돌려보는 건 내 중요한 취미생활 가운데 하나였다. 일전에 이 지면에서 소개했다시피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록키 호러 픽쳐쇼> 같은 인생 영화도 발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채널 2번을 틀어서 뉴스가 나오면 그냥 자고 영화가 나오면 끝까지 봤다. 그 새벽 나와 미군방송 사이에는 한·미 혈맹을 압도할 만한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영화 <이색지대>, 그리고 <HBO> 드라마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되며 넷팩상과 올해의 여자배우상을 수상한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를 만든 오멸 감독의 신작이자 CGV아트하우스상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을 수상한 <눈꺼풀>, 시민평론가상과 올해의 남자배우상을 수상한 박홍민 감독의 <혼자>, <폭풍전야>의 조창호 감독의 신작 <다른 길이 있다>, <이방인들>의 최용석 감독의 신작 <다른 밤 다른 목소리> 등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영화제 이후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개봉되지 못하고 있다.”(원승환, 지난 1076호 ‘한국영화 블랙박스’ 원고에서 발췌)
그렇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글이 아니라 지난해 이야기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독립영화 중 박석영 감독의 <스틸플라워>, 김진황 감독의 <양치기들> 정도만이 영화제 이후 관객과 만날 수 있었고,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당신의 다음 영화를 기다립니다
-
그래미상을 타면 기분이 어떨까? 유명인이 되어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이 아는 척하고 팬들의 인증숏 공세가 시작된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조금 피곤하긴 해도 내심 기뻤을지 모른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저스틴 버넌은 그렇지 않았다. 생애 처음 맛본 유명인의 위치가 좋기는커녕 괴로웠다.
5년 만의 신보 《22, A Million》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흔히 메인스트림 진입 뒤에 발표되는 앨범들과 달리 대중성의 강화나(전통적인 의미의) 음악적 성숙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수수께끼로 남길 원했다. 곡 제목부터가 알쏭달쏭하다. <22 (Over S∞∞N)> <10 d E A T h b R E a s T> <33 “GOD”>처럼 명료한 의미보다 모호한 이미지가 되길 원했다. 팩트 매거진은 이렇게 평했다. “지금까지 본 이베어가 숲속에 홀로 있는 우울한 남자의 이미지였다면, 《22,
[마감인간의 music] 이토록 큰 변화 - 본 이베어, 《22, A Million》
-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아무리 길어올릴지라도 ‘나(너)’는 결코 고통받는 ‘너(나)’가 될 수 없다. 네 고통의 곁에 내가 아프게 선다는 건 서로가 다른 좌표에 있음을 깨닫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묻자. 그러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가, 고통이 아닌가. 치사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가장 아프다. 당사자의 고통과 공감자의 고통을 비교 측량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을 것이고, 야비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가장 아프다. 아픔은 이기적인 구석이 있다.
가끔 거울을 본다. 세월호 참사가 몹시도 힘들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나, 단원고 학부모들이 나와 엇비슷한 연배라는 사실을 빼놓기 어렵다. 우리집에는 고등학생이 산다. 그들의 집에도 고등학생이 살았다. 그 또래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그 또래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지, 답 없는 물음이 여전히 머리를 맴돈다.
약품을 얼마나 처넣었는지 알 수 없는 하얗고 매운 물줄기가 레이저광선처럼 직사되던
[노순택의 사진의 털] 미래를 잃자 과거를 살해당했네
-
지난주 백남기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마치 죽기만을 기다리는 듯 서울대병원 주위로 까마귀떼처럼 새까맣게 내려앉은 경찰들을 보는 순간, 머릿속을 불안하게 맴도는 단어가 있었다. 안티고네. 강제 부검을 위해 시신을 탈취하려는 공권력의 저 일사불란함,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우리는 그렇게 안티고네의 시대에 붙박여 있었나 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 그녀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독재자 크레온에 의해 짐승들의 밥으로 광야에 내던져진다. 죄인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지엄한 국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주검이 짐승들에게 헤쳐지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몰래 장례를 치르고, 극형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안티고네의 세계에서 애도는 금기다. 가족을 애도할 권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가장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국가의 법’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여기 한국에서도 수많은 안티고네들이 통한의 노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야만에 고함
-
나는 내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베르너 헤어초크다. 그의 영화에는 자신의 딸과 혼인해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일개 군인, 고무나무를 경작해서 돈을 벌기 위해 증기선을 산등성이로 끌어올리는 남자, 화산이 터진다고 모두가 대피한 섬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다큐멘터리영화 <그리즐리 맨>에서는 13년 동안 여름마다 알래스카의 국립공원에 체류하며 곰과 함께 생활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의 이름은 티모시 트레드웰이고, 그는 결국 곰에게 잡아먹힌다. 헤어초크는 트레드웰이 틈틈이 촬영한 100시간가량의 필름을 편집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인터뷰해서 영화를 만든다.
헤어초크가 미친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세상에 미친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의외의 순간, 예상할 수 없는 것들,
[내 인생의 영화] 김승일의 <그리즐리 맨> 미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