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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종로에서 교복 입은 여고생과 마주쳤다. 미선·효순 두 여중생의 영정을 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대학생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이뿐이어서 고교 시절 입었던 옷을 애써 입고 나왔다고 했다. 교복 입은 산 언니가, 교복 입은 죽은 동생들의 얼굴을 들고 선 모습이 눈을 찔렀다. 그 옷은 말이 필요 없는 옷이었다.
2014년 가을,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대법원으로 들어가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경찰이 가로막았다. 조끼를 벗으라고 했다. 공장으로 돌아가자, 해고무효 등의 주장이 적힌 옷이었다. 피켓을 법정에 들고 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얘기였다. 규정이 있느냐 묻자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그 옷은 외치는 옷이었으니까.
노란색은 세월호 참사의 상징색이자 “나는 기다린다”는 호소의 언어다. 그것은 종이배였다가, 리본과 손수건이었다가, 우산이었다가 그 무엇보다 옷이었다. 유족들은 노란 옷 위에 아이의 이름을 쓰고 명찰을 달고 그리움을 담았다
[노순택의 사진의 털] 말하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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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새벽 알람을 맞춰놓고 명절 기차를 예매했다. 1초만 늦게 클릭해도 수천명 뒤에서 대기해야 하는 탓에 손에 쥐가 날 정도의 긴장감과 스릴, 전쟁이 따로 없다. 이런 북새통을 뚫고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차례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은 장손 집안의 외아들이 명절 때마다 친척들에게 들었던 잔소리는 바닷가 조개무덤처럼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하다. 차라리 여봐란 듯이 내가 차례 준비를 하는 게 속이 편하다. 평소 시골집 노모와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걸 즐기지만, 죽은 조상 귀신들과 살아 있는 늙은 가부장 친척들을 위해 무보수 명절 노동을 하는 건 여전히 면역이 되지 않는다. 채소를 다듬고,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고, 밤을 깎고, 심지어 장손 전용 명절 노동도 기다리고 있다. 지방을 쓰고, 향로에 향을 피우고, 병풍을 치고, 제상을 닦고 나면 노곤한 한밤. 각기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다들 겪고 있다는 명절 증후군, 1년에 두번 내 몫도 푸짐하게 할당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울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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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엔 아직 ‘왕따’라는 어휘가 존재하진 않았지만, 12살의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그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새로 전학 온 아이는 당분간 또래들의 테스트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고, 나는 그 테스트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아직 외국어와 그곳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학교 가는 일은 하루하루 도망치고 싶은 싸움이었다. 그래도 몇 개월이 지나자 괴롭힘은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비슷한 ‘지질한’ 처지의 친구들도 생겼다. 일본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와 인도계 친구 등 메인스트림에는 절대 들지 못할 우리는 몰려다녔다. 주로 함께 비디오를 시청하거나 만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보게 된 영화 중 하나가 <스탠 바이 미>(1986)였다.
아마도 ‘네명의 친구들이 시체를 찾아 떠난다’는 스토리에 낚였던 것 같다. <스탠 바이 미>는 기대했던 액션이 충만한 어드벤처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들도 나와 같은 12살이었고, 무엇보다도 지질한
[내 인생의 영화] 이태웅의 <스탠 바이 미> ‘람보와 코만도의 세계’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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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북미 대륙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이곳의 10대 청소년에게 자기 소유의 첫 차는 곧 이성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뜻임을 우리는 많은 할리우드영화를 보아서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차에 누굴 끌어들이기 전에, 개인의 소유물로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셜 매클루언은 북미에서 사람들이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자가용
이라고 했다. 그들이 개인주의자인 건 언제든 자기 차에 시동을 걸고 훌쩍 떠나버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끝없이 평평하고 널따란 대륙. 도망치고 싶다면 일단 고속도로 위로 차를 달리면 된다. 도달할 목적지는 나중에 결정할 문제다. 조니 캐시가 즐겨 부르던 곡 <I’ve Been Everywhere>처럼, 안 다녀본 곳 없는 길 위의 삶. 떠나고 정착하고 또 떠나길 반복하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하다. 그러니 자가용 한대는 곧 한 개인을 의미한다.
테크놀로지가 무엇보다도 필요해진 현실
사실 인간과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테크놀로지와 섹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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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주인공을 생계 때문에 참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 속으로 밀어넣고선 불평도 없고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성품을 미덕으로 삼는 드라마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캔디형’으로 분류되었다. SBS <질투의 화신>에서 아나운서 최종심에서 탈락하고 기상캐스터로 일하는 표나리(공효진)도 열심히 사는 걸로 치면 그 어느 캔디에 뒤지지 않는다. PD의 성추행 발언도 견디고, 방송국의 이런저런 잡일을 자청하며 아나운서 자리를 선망하는 그녀는 방송이 없는 주말에 헤어와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역할을 “반값에” 해드린다며 해외 촬영도 따라나선다. 남동생의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주인공 표나리의 처지와 행동에 공감했다면 곧이어 이를 되짚어보게 하는 블랙코미디가 펼쳐진다. 미모의 기자인 자신이 방송국에서 이룬 성취를 뽐내는 계성숙(이미숙)과 인기가 높은 아나운서직의 국장인 방자영(박지영)이 서로 방송국의 노른자와 꽃을 운운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유선주의 TVIEW] 지켜야 할 것들 <질투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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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골라보는 맞춤형 지도
[정훈이 만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골라보는 맞춤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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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시인이었던 암흑의 역사를 감추고 사는 소설가가 있다. 시인이란 언어를 깎고 깎아 모든 껍데기를 버리고 그 정수만 남을 때까지 고뇌하는 운명이 아니던가 싶은데, 그는 침소봉대의 달인, 껍데기를 버리기는커녕 누가 쓰다 버린 껍데기까지 갖다 붙이는 허풍의 명수로, 서울 근교로 출판사 사장 심부름 갔던 이야기를 한비야가 7년간 세계를 헤매고 다닌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스케일로 부풀리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찌하여 시인이기를 포기하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였던가. 시만 쓰면서 살기엔 말이 너무 많아서? 아니, 뭐, 그런 것도 없진 않겠지만 일단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이 시인 대접을 해주지 않아서. 다시 한번 그렇다면, 그는 어찌하여 시인 대접을 받지 못했을까. 그거야 말이 많아서(이게 무슨 순환논법)… 일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 반대였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래, 그도 한때는 말수 적고 수줍은 문학청년이었던 것이다.
시인으로 등단은 했지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시인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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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실존주의, 그리고 구강성교를 발명했죠.” 애덤 매케이의 <텔라데가 나이트: 리키 바비의 발라드>에서 “당신네 나라가 세상에 내놓은 게 뭐가 있죠?”라는 카레이서 리키 바비(윌 페렐)의 물음에, 경쟁관계에 있는 프랑스인 장 지라르(사샤 바론 코언)가 내놓은 대답이다. 그는 “지구 최고의 나라는 미국이요!”라는 리키 바비의 자부심에 “부시와 시리얼만 빼면!”이라고도 응수한다. 바로 마이클 무어의 신작 다큐멘터리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마이클 무어가 프랑스를 ‘침공’하러 떠나기 전에 삽입된 장면이다. 그는 다큐 속에서 여러 나라를 침공하여 좋은 시스템을 훔쳐오려 한다. 그의 프랑스 침공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고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2004년, 프랑스 칸에서 즉석 해변 기자회견을 자처한 그는 “선진국 프랑스에 온 것이 기쁘다”고 말문을 열었다.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긴 추석 연휴를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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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덥더니 갑자기 시원해졌다.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법 같은 변화였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제 보니 퍽 정확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조금 두려워졌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몇년 전부터 봄이든 가을이든 ‘지나치게’ 청명하고 쾌적한 날이면 그 날씨를 만끽하지 못하고 불안해지기 일쑤였다. 좋은 날씨가 내일이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언제부터 현재를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일까. 혹시 대부분의 변화가 좋은 쪽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여러 번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대학과 가깝다는 이유로 나는 서교동과 상수동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서교동에서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와 살았는데, 개를 데리고 짧은 산책을 다녀오신 할머니가 집 근처에 생긴 카페를 두고 길이 외져서 장사가 될까 모르겠다고 걱정하시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외졌던 길은 지금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지금을 즐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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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를 한편 꼽는다면 단연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인랑>이다.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가 각본을 쓰고, 그간 일본의 여러 전설적인 작품들의 메커닉 디자인, 캐릭터 디자인, 원화 등을 해왔던 오키우라 히로유키가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 <인랑>이다. 오키우라 히로유키는 12년이나 지난 후 직접 각본과 감독을 한 두 번째 작품인 <모모에게 보내는 편지>(한국 개봉 제목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를 내놓았다.
<인랑>은 아주 느린 첩보액션영화다. 가상의 6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여러 권력기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인 러브 스토리다. <공각기동대>처럼 화려한 SF 액션이 있지는 않지만 <인랑>의 느리고 정적인 액션은 품격이 있다. 거기에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은 영화에서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한 이
[내 인생의 영화] 연상호의 <인랑> 영화 안팎의 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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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페이지의 책 속에 약 100편의 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들어 있다. 하드 포르노 만화에서부터 이집트 벽화처럼 촘촘히 정보가 기록된 컴퓨터 소프트웨어 정보 만화, 야쿠자의 역사와 그들의 관혼상제 규범과 예법을 만화로 알기 쉽게 그린 극강의 야쿠자 만화, 난해한 현대 회화 같은 만화, 만화가의 자서전이나 만화잡지 편집자의 회고록까지. <만화의 시간>은 만화가인 이시카와 준이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은 만화 중에서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만화들을 골라 그 만화가 왜 재미있는지를 애정 넘치게 이야기한 만화에 관한 에세이다.
야심을 버리고 난 후의 유유자적과 한가로움
이시카와 준은 일본 만화계의 동료들에게 ‘리틀 메이저’라 불린다. <소년 점프> <소년 선데이> <소년 매거진> 계열의 메이저급 만화잡지에 연재를 한 적도 없고, 메이저에서 연재를 할 정도의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만화를 그렸던 작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포르노 만
[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리틀 메이저’가 만화에 바친 존경과 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