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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입소문이란 게 인터넷을 타고 돌지 않았으니, 이른바 ‘진성’이었다. 문 닫고 댓글 조작단을 꾸려서 홍보 효과를 낼 수는 없었다. 스포일러도 극히 개인적이었으며( ‘글쎄 주인공이 다시 살아난대’ 하는 정도의), 고작 한다는 게 개봉날 가짜 손님을 줄세우는 정도였다. 단관 개봉이 대부분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시네마 천국>이 입소문을 타기 전이었다. 나랑 내 친구. 의대 다니던 그 녀석은 유급 전문이었고 나는 원래 학교를 안 가는 버릇이 있던 때였다. 주제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극장을 나서다 나는 결심했다. “시칠리아에 가는 거야.”
영화는 원래 사기다. 사단장이 예고하고 시찰 나온 훈련장 같은 거다. 눈에 보이는 게 다 가짜다. 그런 줄 몰랐다. 시칠리아에 가서야 알았다. “토토는 어디 있는 거야, 도대체.”
<시네마 천국>은 이탈리아에 관한 환상극이다. 알면서도 속는다. 영화를 본지 몇년 후의 일이다. 한창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였다. 비슷비
[내 인생의 영화] 박찬일의 <시네마 천국> 토토 어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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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지로의 <아랑전>
한 젊은 사내가 60층 높이의 도쿄 선샤인 빌딩을 마주하고 서 있다. 가라테 도복을 입은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매서운 눈매를 하고 약간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겨루어볼 테다”라고 중얼거리고는 성큼 빌딩 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기를 모아 풀스윙으로 주먹을 빌딩 벽에 날린다. 쾅!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당연히 빌딩은 꼼짝도 안 한다. 오히려 젊은 사내의 주먹이 얼마나 깨졌을지 걱정될 정도. 그러나 젊은 사내는 최소한 경보기 정도는 울릴 줄 알았다며 아쉬운 표정으로 벗어던졌던 도복 상의를 입는다.
다음 페이지. 선샤인 빌딩 59층에 있는 레스토랑의 식탁 위 샴페인 잔이 파르르 흔들린다. 하하하! <격투왕 바키>로 유명한 이타가키 게이스케가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장편소설 <아랑전> (餓狼伝)을 원작으로 그린 만화 <아랑전>의 첫 장면이다. 근육을 키워 갑옷처럼 만들고 주먹을 해머보다 단단하
[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백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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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먹방’에서 걸그룹 멤버를 보는 것이 새삼스럽지 않다. 먹는 프로그램에 나왔으니 열심히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JTBC는 아예 걸그룹만 따로 모은 토너먼트 형식의 야식 먹방 <잘 먹는 소녀들>을 내놓았다. 김준현처럼 유별난 대식가와 경쟁할 필요 없이 또래끼리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쪽이 더 보기 편해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인터넷 사전 생방송은 여성이 먹는 모습을 품평하는 기본 포맷과 심야에 네 시간 동안 먹게 하는 가학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해서 본방송을 시청했다. 우리만 문제 삼지 말라는 듯, 출연자 자료화면마다 타 방송 캡처 화면과 연예뉴스 제목을 잘라 붙였는데 ‘소녀’들이 잘 먹는다고 뉴스에 오르내렸던 메뉴는 전투식량, 개불, 닭발, 번데기, 산낙지, 삭힌 홍어 등이었다. 얼굴이 흉해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린 장면, 39초 만에 흡입 따위의 문구를 모아놓으니 방송과 연예뉴스가 무대 밖의 걸그룹에게
[유선주의 TVIEW] <잘 먹는 소녀들> 소녀 아니면 이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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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봉이 김선달> 사막에서 보일러 팔기, 알레스카에서 에어컨 팔기
[정훈이 만화] <봉이 김선달> 사막에서 보일러 팔기, 알레스카에서 에어컨 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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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감독이고 어머니는 각본을 썼다. 누나는 배우다. 대부는 저 위대한 폴 뉴먼이고 대모는 비명의 여신 제이미 리 커티스다. 그 자신은 히스 레저의 딸인 마틸다의 대부다. 민주당원이다. 토비 맥과이어가 <씨비스킷>을 찍다가 허리를 다치고 <스파이더맨2>에서 하차하게 되었을 때 피터 파커 역할을 대신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도니 다코>에서였다. 몇번을 돌려 봤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본 훌륭한 영화였다. 당시 그를 보며 너는 지구에서 애늙은이 역할을 가장 잘 연기하는 배우다, 라고 생각했다. 놀란 건 <투모로우>에서였다. 이 빤한 영화에 혼자 열심히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보다 한살밖에 어리지 않은데 2004년도 영화에서 고등학생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제이크 질렌홀 이야기다.
잘 관리된 필모그래피
제이크 질렌홀은 무척 잘생긴 배우다. 속눈썹은 우리 집 빗자루로 써도 괜찮을 것 같고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관계 분해하기 <데몰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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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있었다면 2002년에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텐>이 있었다, 고 먼 훗날 얘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2007년 제1회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CINDI)를 시작하며 <텐>을 초청했던 당시 정성일 집행위원장이 한 말이다. 그는 2002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텐>을 보고난 뒤 “이전 영화들을 모두 잊게 만들 만큼 키아로스타미의 최고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여기서 정말 다시 시작하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키아로스타미가 세상을 뜬 그날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RIP_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문득 우리 곁을 떠났다. 아아, 지금 막 영화에서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다. 1940~2016.”
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부산을 찾아, ‘마이 라이프 마이 시네마’라는 제목으로 <키아로스타미의 길>(2005)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키아로스타미와 치미노, 그리고 <비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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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한국 힙합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매해 가장 ‘중요한’ 힙합 노래를 꼽는다고 해보자. 아마 1990년대 초•중반은 현진영과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로 가득 찰 것이고 2014년은 일리네어 레코즈의 <연결고리>가 선택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1997년의 가장 중요한 힙합 노래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나의 선택은 바로 지누션의 <가솔린>이다.
<가솔린>은 강렬한 노래였다. 얼마 전 동네 친구이자 그래피티 라이터인 홍3과 이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의 결론은 <가솔린>이야말로 한국 힙합 역사를 통틀어 최초로 ‘모든 것이 오리지널 힙합의 멋으로 일체된’ 노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현진영과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에게도 미덕이 있다. 또 H.O.T의 <전사의 후예>에도 힙합의 흔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지누션의 데뷔는 이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가솔린>보다 조금 앞서 발매된 <전사의 후예&
[마감인간의 music] 제대로 완벽했던 – 지누션 <가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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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저녁 약속이나 일이 없어 바로 귀가한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TV에 흥미를 잃은 지는 오래되었다. 대개 컴퓨터에서 메일을 확인하고, 궁금한 사항을 서핑해보며,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살펴본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한다. 그것마저 마치거나 심드렁하면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쳇말로 그냥 멍때리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자연히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창으로 스며드는 이웃의 불빛들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피곤하지도 않은데 잠을 청하였으니, 바로 잠에 빠져들 리가 없다.
그런 밤이면 우주의 빅뱅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지금 이 방에 누워 있는 시간까지 차례로 더듬어본다. 긴 시간의 연쇄 속에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지를 헤아려본다. 빅뱅, 은하의 형성, 초신성의 폭발, 지구와 생명의 탄생, 진화와 문명, 역사의 전개 그리고 지금 여기에 누워 있는 나. 눈부시게 발달한 학문과 책은 나같은 문외한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잠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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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지 않는 나에게 예외인 영화가 두개 있다. <사랑의 블랙홀>(1993)과 <도그빌>(2003)이다. 둘 다 우울함의 에너지가 뻗쳤던 이십대 중반에 많이 보았다. 어느 정도로 우울했냐면 그 기운에 방의 왕자행거가 무너질 정도였다. 진짜다. 어느 날 옷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패딩, 원피스 같은 것들에 파묻혀 계속 영화를 보았다. 그 순간에도 두 영화 중 하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틀어두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의 블랙홀>은 하얀 세상의 시원한 해피엔딩, <도그빌>은 회색 세상의 시원한 해피엔딩이었기에.
내 친구 A 얘기를 잠시 하겠다. 그는 장학생인 데다가 모두에게 친절했고 예민한 동시에 유머감각까지 있었다. 그는 남의 말을 빠르게 안전한 농담으로 받아치곤 했다. 사람을 좋아해서 참석하는 모임도 많았다. 그의 세계에는 질서가 있었다. 일도 인간관계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질서. 오랜만에
[내 인생의 영화] 오지은의 <도그빌> 너는 정말 오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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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를 찾아서>가 자식을 구하는 부모 시점의 이야기라면, <도리를 찾아서>는 잃어버린 부모를 찾아가는 ‘아이’쪽 모험담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특수하다는 점이다. 이미 전편에서 니모의 불균형한 지느러미와 도리의 단기기억상실증을 통해, 장애를 일종의 동기와 개성으로 해석했던 픽사는 속편에서 더 나아간다. <도리를 찾아서>에는 다리가 일곱인 문어(septopus), 고도근시 상어고래, 음파 반사력이 고장난 흰고래, 말 못하는 바다사자와 물새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를 독려하고 보완해 시나리오가 부여한 위기를 극복해나간다. 한편 도리의 엄마, 아빠는 특수아동을 양육하는 부모의 훌륭한 귀감이고, 그런 부모에게 도리가 품은 부채감은 이 명랑한 영화에서 가장 아픈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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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는 전형적으로 나쁜 교사나 무책임한 부모가 등장해 아이들의 세계를 휘어잡는 상위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객관적인 영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정글과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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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닉>(2015)의 주인공 데이비드(팀 로스)는 말기 환자를 돕는 호스피스 간호사다. 환자를 알선해주는 업체에 소속되어 일 하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 환자를 먹이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병세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죽음 이후를 다루는 장례와 관련된 많은 직업들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면,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직업이다. 세상 모든 일을 구조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나는 <크로닉>의 서사에서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삶의 균열을 본다.
모두가 컨베이어 벨트의 구성원
영화를 보다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나 몸짓이 있을 때가 있다. <크로닉>에서 그것은 ‘기능적인’(functional)이란 단어다. 데이비드와 두 번째 환자인 존(마이클 크리스토퍼)과의 대화 중에 나온다. 데이비드는 존의 직업이 건축가임을 알고, 존에게 어떤 종류의 건물을 설계했는지를 질문한다.
[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삶의 균열 <크로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