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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7인 특강 [9] - 봉준호·홍상수 ②
사진 정진환문석 2005-06-13

5월30일 여섯번째 특강, 봉준호 감독이 말하는 ‘봉테일’의 정체

“제 원칙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겁니다”

“제가 69년생이거든요. 88학번. 오슨 웰스가 26살 때 <시민 케인>을 찍었는데, 되게 안 좋은 사례인 것 같아요. (웃음) 젊어서 정력과 예술적 에너지를 그렇게 심하게 방출하면 되겠어요. 저의 희망은 앨프리드 히치콕 아저씨입니다. 그분이 1899년생이에요. <싸이코>가 1960년 영화잖아요. 그럼 환갑잔치 다음해에 찍은 거예요. 저도 환갑잔치 다음날 <싸이코> 같은 영화를 크랭크인할 수 있다면 정말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씨네21>쪽에서,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제 차례 앞에 ‘평온한 일상을 비트는 힘’이라고 붙여놓았는데, 제가 이야기할 화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플란다스의 개>는 정말 일상에서 출발한 영화였죠. 저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들로부터 쏟아져나온 영화거든요. 그 영화 찍은 아파트가 제가 신혼 초 3년 동안 살던 곳이에요. 거기 나오는 여러 가지 자잘한 에피소드들도요. 참고로 일각에서는 거기 나오는 이성재 와이프의 캐릭터가 제 실제 와이프 캐릭터 아니냐, 는 단순한 짐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배두나 캐릭터가 제 와이프의 처녀 때 모습입니다. 이렇듯 저의 일상에서 출발한 영화였는데, 그런 것들이 점점 진행될수록 영화가 만화적인 무드로 돌입하기 시작하거든요. 노란 우비를 입은 배두나가 빨간색 옷을 입은 이성재를 추격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니 클라이맥스가 되면 아파트 옥상 위에 수백명의 노란 우비를 입은 인간들이 떼로 나오게 되죠.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랬나 싶기도 하네요. (웃음)

<살인의 추억>은 평온한 일상을 비튼 건 아니었지만, 그 경우에도 어떤 리얼리즘 내지는 사실적인 것과 장르간의 충돌이 있었죠. 어떻게 보면 <살인의 추억> 같은 경우 연쇄살인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하려고 했던 <살인의 추억>의 바탕이 됐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엄연히 80년대 한국 농촌에서 실제 벌어졌던 일이에요. 그 사이에 긴장이 있었죠. <플란다스의 개>에서 자질구레한 일상과 만화적 판타지가 충돌했던 것처럼 이번은 경운기가 범인의 발자국을 지우는 아수라장 개판의 80년대 한국 농촌과 스릴러라는 아주 미국적인 장르가 충돌하는 거였죠. 그게 어쩔 수 없는 저의 습성 내지는 성향인가봐요. 제겐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혐오가 있거든요. 어릴 때는 대사도 못 알아들으면서 <AFKN>에서 밤시간에 하는 영화를 봤어요. 거기서 미국 장르영화의 쾌감과 흥분이 몸에 체현됐고, 대학에 와서 영화를 공부하고 그럴 때는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 영화에 완전히 꽂혔어요. 그 틈에서 제가 막 진동을 하기 때문에 어떤 분열이 있어요.

지금 준비하는 <괴물>이란 영화는 한강에서 괴생물체가 나오는 영화인데, 한강이 무척 일상적인 공간이잖아요. 거기서 그런 괴생물체가 나와 한강 둔치가 피바다가 된다, 뭐 이런 생각인데, 괴물 장르라는 것이 일본의 <고질라> 시리즈를 제외하면 상당히 미국적인 장르잖아요. 그 장르의 쾌감이나 컨벤션을 따른 듯하지만, 예를 들면 합동분향소에 죽은 사람들의 영정들이 좍 있고, 사람들이 뒤엉켜 울고 이런 신이 있거든요, 그런 건 아마 외국영화에서는 도저히 나오지 않을 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계속 이런 분열적 영화를 찍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환갑잔치 이후에 제대로 된 영화를 찍는다는 인생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 자체가 불안하거나 싫거나 하진 않아요. 한 40대 중반까지는 진정한 나의 스타일 내지는 내가 정녕 잘할 수 있는 영화는 어떤 걸까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게 된 것 같아요.”

오기민 | 단편영화 <지리멸렬> 때 영화란 이런 거다, 라고 생각했던 게 있었을 거 아니겠어요. 그러고나서 두편의 상업영화를 했고, 특히 어마어마한 예산의 블록버스터를 하고 있는 현재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생각이 바뀐 점이 있나요.

봉준호 | 기본적으로 제가 갖고 있는 생각에서 바뀐 부분은 없는데, 영화란 게 혼자 찍는 게 아니고 주변의 시추에이션들이 맞물려가는 거니까 제가 리액션해야 하는 상황도 있더라고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저의 단순 심플한 원칙은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다’거든요. 저도 여러분들처럼 한명의 영화 팬이었고 마니아였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보고 싶은데 아무도 찍어주지 않으니까 내가 찍어서 내가 봐야지’, 그런 기본적인 충동이 있어요. <플란다스의 개>나 <살인의 추억>, 지금 <괴물>도 다 저의 충동에 따라 움직였던 거예요. 그런데 영화라는 게 투자를 받아야 하고, 캐스팅도 해야 하고, 마케팅도 해야 하고, 이런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면서는 충동으로만 고수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나는 괴물 장르를 이렇게 해석하고 관객에게는 이런 즐거움이 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포장을 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그 근본적인 충동은 똑같은 것 같아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것 말이죠.

오기민 |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이 두 영화는 관객 호응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극단적인 영화잖아요. 하나는 일주일도 안 돼 떨어졌고, 하나는 5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죠.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변화가 나타났는지.

봉준호 | 저는 <플란다스의 개>의 흥행이 잘될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아기자기 재밌게 찍혔기 때문에 손익분기점은 훌쩍 뛰어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리고 만약 <살인의 추억>을 할 때 흥행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시작단계나 끝단계에서 많이 흔들렸을 것 같아요. 특히 마지막의 편집단계에서 큰 갈등이 있었거든요. 러닝타임을 사수하는 문제로. 원래 차승재 대표님이 편집 갖고 압박을 주거나 하는 분이 아닌데 그때는 회사 상황이 힘들었고, <지구를 지켜라!> 여파도 있었고. 그런데 저는 도저히 이 장면을 잘라낼 수 없다면서 배 째고 드러눕는 식으로 막갔었어요. 그러는 와중에 일부 투자자는 돈을 회수해가고 하는 암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못했었어요. 사실, 제가 흥행에 초연하다거나, 관심없다, 이런 건 아니에요. 늘 관심이 있고 잘됐으면 좋겠는데, 어떡하면 될 수 있겠다에 대해서는 정말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걸 알면 누구나 흥행하지 않겠어요. 100% 완전히 흥행만을 노리고 완전히 빤쓰 벗고 덤비는 식의 그런 영화를 만들어도 흥행에 성공할 확률은 또 비슷한 것 같거든요. 어차피 그 부분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잘하는 것을 향해서 돌진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오기민 | 차기작 <괴물>은 <플란다스의 개>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살인의 추억>에 가까운가요.

봉준호 | 또 다른 면에 가까운 것 같고요. 더 장르적인 것 같아요. 괴물 영화이기 때문에 장르 자체의 개성이 강하고 특수하기 때문에. 그래도 여전히 그걸 한국 현실로 끌어내리는 건 마찬가지죠. 분열증이 더 심해질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미지수예요. <살인의 추억>만 해도 한국적 형사가 나오는 <수사반장> 같은 시리즈를 보거나 하면 약간 익숙한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런데 <괴물>은 많이 생소할 것 같아요. 물론 장면장면들의 구성은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오락적인데, 전체 분위기를 놓고 봤을 때는 관객이 생소하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오기민 | 봉 감독님의 영화, 그리고 차기작까지 보면 중심인물들이 대부분 하층민에 가까워요. <살인의 추억> 경우에도 멋진 형사와 전혀 거리가 먼 분들이고요. <괴물>에서도 괴물과 맞서싸우는 게 매점 주인 일가족이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봉준호 | 그냥… 끌려요. (웃음)

오기민 | 어떤 점이 끌리나요.

봉준호 | 잘 나가는 사람들 재수없어요. (웃음) 잘 나가고 있는데 거기서 무슨 드라마가 나오겠어요. 재수없잖아요 사실.

오기민 | 봉 감독님도 지금 잘 나가고 있는 거 아니에요.

봉준호 | 아니, 저는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준비가 돼 있어요. 요즘 제빵제과학원도 알아보고 그러니까. (웃음) 지금 한국 영화산업도 잘 나가고 이런 특강에도 초대받고 하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저는 모든 게 영원하리라고는 생각 안 해요. 언젠가는 디지털 장편을 해야 할 시점이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하고. 물론 그렇게 되지 않고 한국 영화산업이 잘 나가고 저도 많이 기여를 하고 그러면 좋겠죠.

오기민 | <괴물>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송강호, 변희봉, 박해일, 배두나 이렇게 되는데, 앞의 두 영화에 나온 인물 다 모아서 하는 거잖아요. 배우들을 그렇게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봉준호 | <플란다스의 개> 할 때 십수년 넘게 영화를 안 하셨던 변희봉 선생님을 찾아가서 하기 싫다는 개 잡아먹는 경비원 역으로 모시고 했던 것이라든가, <살인의 추억> 때 복잡하고 긴 오디션 과정을 거쳐서 백광호 캐릭터의 박노식씨를 기용했던 것처럼, 우리가 스크린에서 익숙지 않은 미지의 배우를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 같은 경우는 그 미지의 캐릭터가 괴물이거든요. 그 캐릭터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비주얼 이펙트나 특수효과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1년 반, 2년 가까이 준비했어요. 대신 배우들은 저랑 다 한번 이상 작업을 해봤고, 내가 ‘아’ 하면 그쪽에서 ‘어’ 하면서 빠르게 리액션할 수 있고 서로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관객1 | 이런저런 강연에서 보니 봉준호 감독님은 어떤 장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 장면은 이래저래서 이렇게 찍었다”고 술술 말하시는데요, ‘봉테일’이라 불릴 만큼 집요하시잖아요. 그런데 나는 사실 이 장면을 아무 생각없이 찍었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맥락으로 읽혔던 게 있나요.

봉준호 | 우선 ‘봉테일’이란 별명은 사실 날조된 겁니다. 그 디테일의 공은 다 우리 연출부와 미술부가 가져가야 하는 거죠. 그들이 정말 집요하게 디테일했지 저는 큰 맥락 잡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의도를 빗나간 결과들도 많이 있었죠. 예를 들어 터널장면 같은 경우, 시나리오에는 무슨 벌판처럼 묘사돼 있거든요. 뭔가 공간적 구조가 있어야 한다고 계속 고민하다가 연출부가 해온 헌팅 자료에서 터널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아서 거기로 가게 된 거거든요. 그런데 마침 영화 도입부에 배수관 속 시체가 있잖아요. 처음과 끝의 그 두 가지 이미지가 연결되면서, 어떤 평론가는 ‘80년대라는 어두운 터널을 관통하여…’라고 했고, 또 어떤 여성평론가는 ‘어둡고 컴컴한 여성의 질처럼 암흑의 시기였고…’ 뭐 이런 식의 해석들이 나왔는데, 저는 그냥 “와…” 이러면서…. (웃음) 진작 이렇게 대답할걸, 후회하면서…. (웃음)

관객2 | 프리 프로덕션이나 촬영 때 배우나 스탭과의 트러블을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궁금합니다.

봉준호 | 저 같은 경우는 어찌된 일인지 별로 트러블이 없었어요. 김형구 기사님이나, 이강산 기사님이나, 류성희 감독님이나 이렇게 다 성격들이 유난히도 온순하고 편안한 타입이라서 그런지 강력한 갈등이 있었던 적은 없어요. 겉보기에는 현장에서 감독들이 대부분을 결정하거나,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극소수의 자유, 몇개의 선택의 폭을 갖고 해나가잖아요. 그 판은 이미 프리 프로덕션 때 짜여지는 거라고요. 결국 현장에서의 갈등은 프리 프로덕션을 얼마나 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 힘들고 피곤하더라도 프리 프로덕션 때 집요하게 매달려서 끝까지 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그 다음에는 뭐 인상이 무섭고 마초적인 분들과는 일을 안 하는 게…. (웃음) 여성적인 분들과 스탭을 구성하면 항상 좋더라고요. 싸우지 않고.

관객3 | <살인의 추억>은 제작 이전에 유명한 시나리오로 많이 읽혔다고 들었습니다. 시나리오 작업하실 때 감독님의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봉준호 | 저는 시나리오 쓰는 것이 너무 싫어요. 너무 힘들고. 안 할 수 있다면 첫 번째가 시나리오 쓰는 일인데, 아직 저와 호흡이 맞는 작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어요. (아주 빠르고 격앙된 말투로) 그 과정이 정말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싫어요, 진짜…. (웃음) 저의 안 좋은 습관은 시나리오 쓸 때 자학을 많이 해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요. 머리를 벽에 찧고. 이게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렇게 해요. 좋은 점은 글쎄 잘 모르겠네요. 김지운 감독님처럼 빨리 써야 좋은데, 저는 되게 오래 쓰는 편이거든요. 한번 쓰고 안 풀리면 방치해놓고 자학하고 돌아다니다가 한달 뒤에 다시 스타트하고, 이런 타입이기 때문에 되게 오래 걸려요. 그래서 저의 단점이고. 근데 뒤집어보면 장점이라고도 굳이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오래 숙성시킨다는 게. 구차한 장점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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