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아시아 영화의 벗이여 파도 소리에 꺾는 한 잔의 추억
2010-10-07

임권택 감독부터 기타노 다케시, 왕가위 감독까지… 국내외 영화인 15인이 김동호 위원장과의 시간을 회고하다

술을 마셔야만 취하는 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도 취한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빠짐없이 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술은 알코올이 아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취선(醉仙) 김동호 집행위원장에 대한 국내외 영화인들의 추억을 모았다. 김동호 집행위원장과 대작하지 못했던 관객과 독자들에게, 여기 그러모은 영화인들의 주담(酒談)은 더없는 안주가 될 것이다.

임권택

영화감독 <서편제> <춘향뎐> <달빛 길어올리기>

나는 1회부터 지금까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을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참석한 사람이다. (웃음) 어쨌거나 영화제 시작 자체를 김동호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축이 되어 했고, 이처럼 굉장히 짧은 시간에 영화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해 예상 밖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공이 제일 크다.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너무 큰 일을 했다. 그는 순전히 술 마시는 걸로 이 영화제를 끌어온 사람이다. (웃음) 영화제가 늘 적당히 취기가 오른 느낌으로 흥겨울 수 있었던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지금은 술을 딱 끊고 주변 사람들만 죽이는 쪽으로 그렇게 하는데, 이제 영화제를 그만두고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가 안 마실 거면 남이 안 마셔도 가만있어야 할 게 아닌가. (웃음)

봉준호

영화감독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때는 1996년. 박기용 감독님이 <모텔 선인장>을 준비하던 때다. 그 영화의 조감독으로 함께 홍콩영화제에 갔다. 박 감독님은 촬영감독으로 마음에 둔 크리스토퍼 도일을 만나기 위해, 나는 내 단편영화 <지리멸렬>이 영화제에 초청받아서, 그렇게 겸사겸사 갔다. 늘 그렇듯이 한국에서 온 일행이 있었는데 정부 관료도 한명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당시 어린 편견으로 영화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국민들 돈으로 영화제나 오는 그런 재수없는 사람이 또 한명 왔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때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는데 이분은 손수 영화제 리플렛을 들고 다니며 일일이 나눠주고 수백번 설명하고, GV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자 다 체크하고, 그러는 동안 거의 모든 영화는 다 보는 게 아닌가. 큼지막한 메모지를 늘 들고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하셨다. 높은 사람들 만나서 한가하게 식사나 하는 그런 관료가 아니었던 거다. 딱 한 가지, 뵐 때마다 나를 쩔쩔매게 했던 건 그분의 마수(?)였다. (웃음) 말하자면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 같은 거였다. “봉준호씨는 대학을 어디 나왔어요” 하시며 조감독 끝나면 부산영화제에 와서 일하라고 하시더라니까! 아무튼 그렇게 열정적인 분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권위의식까지 없다. 그해 홍콩영화제 술자리에서 변영주 감독 등과 어울렸는데, 그때 왜 그랬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하여간 얼굴에 서로 뭔가 붙이고 그걸 디카로 찍으며 노는 게 인기였다. 김 위원장님이 이미 그때, 나이가 지긋하신 때 아닌가. 그런데 내가 조금 늦게 술자리에 가보니 이미 얼굴에 별이며 하트며 붙이고 탬버린 치면서 신나게 놀고 계시더라! 영화제를 하시며 있었던 일화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얘기할 것 같아 나는 영화제 전에 있었던 일 하나를 얘기했다. 영화제를 준비하던 때의 김 위원장님의 모습이니까 영화로 치면 ‘그의 예고편’을 본 것 아닌가 싶다. 성공의 전주곡이었던 것 같다.

이창동

<초록물고기> <밀양> <>

영화제 트레일러에 김동호 위원장님을 출연시켜보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건넨 적이 있다.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퀵서비스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서 이 장소 저 장소를 옮겨다니셨던 그런 것 말이다. 그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게 바로 그런 헌신이다. 세계의 어떤 영화제 위원장을 놓고 보아도 그 헌신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역시 술이다. 지금은 안 드시지만 항상 술로 누구하고든 강력한 친화력을 발휘했다. 함께 술독에 벌거벗고 빠지고 술을 통해 벽을 허문다. 유명한 타이거 클럽 멤버도 그렇게 나온 거 아닌가. 놀라운 건 해외 영화제에서 보면 젊은 영화인들이 도중에 도망을 갈 만큼 늦게까지 함께 마시고도 그 다음날 아침이면 첫 상영이 있는 9시가 될 무렵에 극장에 어김없이 나타나신다는 거다. 그전에 이미 조깅하고, 샤워까지 하고, 머리를 깨끗하게 빗어 넘긴 다음에 말이다. 이분은 언제 잠을 자나 늘 궁금했다. 음, 내가 보니까 극장에서 틈틈이 주무신다! (웃음)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극장을 나와서 코멘트를 하시는데 그게 놀랍게 그 작품의 핵심을 찌를 때다! 개인적으로는 문화부 차관을 그만두고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일할 때 처음 알았다. 박광수 감독 등이 김 위원장님께 세배를 가고 그랬다. 나는 그런 영화인들의 풍습을 새로 배우면서 갈까 했지만 가진 못했던 것 같고. 분명한 건 그때 젊은 영화인들이 세배를 간 걸 보면 이미 신망이 두터웠다는 사실이다. 그때 세배를 받는 영화인은 임권택 감독님, 김동호 위원장님 정도였던 것 같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 선물을 들고 가면 아파트 경비실을 못 통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화제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알게 됐고, 내가 공직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교류가 있었다. 주목받는 영화제의 위원장이고 어느 자리에 가도 가장 연장자인데 이분은 그런 대접을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다. 어딜 가도 늘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사진을 찍어주신다. 영화제의 레드카펫이나 공식 시사를 찍은 사진은 꼭 보내주신다. 그 양반에게 사진 받지 않은 영화인이 거의 없다고 말해야 할 거다. 업무에 있어서도 그렇다. 당신께서 철저하게 병풍 역할을 자임하셨다. 영화제의 방향이나 프로그램이나 진행이나 당신의 몇 가지 원칙만 지키도록 하셨고 그외에는 전부 전문인들에게 철저하게 맡기셨다. 그게 대외적으로 교섭력을 극대화했다. 정부 등과 예산문제를 놓고도 탁월해서 대단한 지원이나 뒷받침을 보장해냈다. 이런 건 겉으로는 잘 안 보이는 거다. 그 점에서 그의 경험이나 행정력 그 자체를 다른 누군가 대신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강수연

<씨받이> <처녀들의 저녁식사> <달빛 길어올리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흔히들 생각하는 일까지 직접 챙기시는 분이다. 아주 작은 영화제라도 본인이 참여하셔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자세와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사실 문화부 차관을 그만두고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맡았을 때 영화인들은 모두 실망했다. 조금의 기대도 없었다. 관료 출신이 영화에 애정이 있겠어, 다들 그랬다. 그런데 김 위원장님은 달랐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계셨다. 그 뒤 대부분의 한국영화 시사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셨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갔을 때 직접 발로 뛰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그 한결같은 모습이야말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른 시간 안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집행위원장은 그만두시지만 직함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이젠 누구나 인정하는 영화인이 되셨다. 영화인은 정년이 따로 없다. 영화인들의 부담을 대신 짊어지고 몸과 마음을 혹사하셨으니 이젠 좀 쉬게 해드리고 싶기도 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관객을 위해 더 큰 일을 하셨으면 한다.

양익준

<똥파리>

지난해 하노버에 갔을 때 아침에 강변에 나간 적 있다. 내가 영어도 한마디 못하고, 뭐 내 입장에선 말 안 하면 딱히 불편한 건 없으니까. 그날 아침도 혼자서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었는데, 위원장님이 조깅하다가 그런 나를 발견하곤 부르셨다. 연세도 많으시고 되게 크신 분이라서 어려웠는데, 반 조깅 복장을 하신 위원장님께서 근처에 좋은 미술관이 있다며 같이 구경가자고 하셨다. 이미 여러 번 와보신 미술관이었는데 나를 위해 시간을 베푸셨다. 그림 하나 하나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면서. 그 뒤 친해져서 라스팔마스에 가서는 함께 누드비치 구경도 가고. ㅋㅋㅋ 도빌에선 남녀주연상 소식을 알려주시면서 김꽃비씨를 덥석 안아주셨는데, 정말로 환한 얼굴로 자신이 수상한 것처럼 기뻐하셨다. 내겐 악수하겠구나 했는데 나한테도 그 뜨거운 포옹을. ㅋㅋㅋ 한국 사람들이 축하에는 인색한데. 로테르담에서 수상하고 나서 “씨발놈이란 단어를 오랫동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는데, 그때도 누구보다 많이 웃어주셨다. ㅋㅋㅋ 시상식 때마다 기념사진도 찍어주고 나중에 사무실에 들르면 인화해서 사진을 주시기도 하고. 그 바쁘신 와중에도 이미 보신 <똥파리>를 해외영화제 때마다 보고 또 봐주셨다.

기타노 다케시

<소나티네> <하나비> <아웃레이지>

김동호 위원장님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동호 위원장님과 1년분의 술을 밤새 마셨던 것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의 건강과 다복을 기원합니다. 2010.9.13 기타노 다케시

다쓰미 요다

도쿄영화제 집행위원장

김동호는 PIFF가 진정한 국제영화제로 거듭나고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는 영화에 대한 헌신과 소통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조직력을 발휘하며 그것을 가능케 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는 “비행기가 나의 집”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지속적으로 여행을 다녔고, 종종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년에 수십개의 영화제에 참석했다. 내가 2008년 도쿄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김 위원장을 만나 상호 협력관계를 어떻게 구축할지에 대해 의논한 적 있다. 1월의 어느 눈 오는 날이었는데, 우리는 영화산업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영화제가 영화팬과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공헌할지에 대해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가 더이상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의사에게서 술을 끊으라는 말을 들었음을 알게 됐다. 영화와 문화계 전반을 통틀어 김 위원장이 훌륭한 리더이자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건 비단 음주만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그의 헌신에 있었다. 대화와 소통이야말로 영화산업과 영화계를 더 낫게 만들어준다는 그의 가르침에 감사를 표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2008년의 그 눈 내리던 날, 내가 당신에게 주었던 사케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나는 그 사케가 개봉되지 않은 채로 당신의 책상에 놓여 있길 바란다. 또 당신이 그걸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문소리

<오아시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하하하>

장준환 감독님과 결혼할 때, 식을 굉장히 소박하게 치렀다. 양가 가족들 50, 60명 정도만 모였다. 조용하게 우리끼리만 중요한 약속을 하듯 그렇게 결혼하고 싶었다. 처음엔 주례없이 할까도 생각했지만 양가 어르신들이 많이 오니 주례가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르게 됐다. 영화계 선배님들 중에 누구한테 부탁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어르신인 김동호 위원장님께 연락드렸고,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결혼식 장소가 양수리에 있는 작은 갤러리였다. 남편과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그 갤러리를 발견하고 ‘참 예쁘네, 우리 결혼식 규모에도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바로 결정했다. 식 당일날 김동호 위원장님을 모시고 가는데, 장소명을 듣고는 정말 깜짝 놀라시더라. 알고 보니 위원장님이 처음 문화부로 발령나자마자 사수로 모셨던 분의 사모님이 운영하는 갤러리였다. 양쪽 집안이 그렇게 서로 오래 알고 지내던 분들이었던 거다. 사모님과 위원장님이 내 결혼식 때문에 오랜만에 재회하게 됐고 너무 좋아하면서 기뻐하시더라. 참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례하실 때, “이 결혼식처럼 앞으로도 절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그런 덕담이 길게 죽 이어져야 하는데, 짧게 끝내시고는 바로 무슨 종이를 꺼내셨다. 많은 영화인들이 결혼식에 오고 싶어 했는데 우리가 굳이 가족끼리의 결혼식을 원했기 때문에, 다들 마음으로만 성원을 보낸다면서 그분들로부터 코멘트를 받아오셨다고 했다. 주례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영화인으로서는 당신 혼자만 초청받은 셈이니 영화계를 대표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 또래의 영화인들에게 전부 메일을 돌리셨다고 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재미있는 코멘트를 해달라고. 많은 답신이 왔고 그걸 다 하나하나 읽어주셨다. “나보다 젊은 영화감독이 여배우와 결혼하다니, 썩 축하해주기가 그렇다. 잘 살아라 제기랄-김지운”, “신혼여행은 꼭 안드로메다로 가세요-백윤식”, “드디어 가족이 탄생하는군요-김태용” 등등. 그런 재밌는 코멘트를 읽어주시니, 영화인들을 잘 모르는 우리 친척들까지도 웃으면서 즐겁게 귀기울였다. 정말이지 우리끼리만 듣긴 아까운, 많이 소문내고 싶은 그런 주례였다. 재밌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식이 끝난 다음에는 그걸 다 프린트해서 앨범에 예쁘게 담아 선물해주셨다. 위원장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한번은 명절에 떡을 보냈는데 다시는 이런 걸 보내지 말라고 너무 엄하게 말씀하셔서 다른 선물도 못 드렸다. 고마운 마음을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

김태우

<버스, 정류장> <사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동경비구역 JSA>로 베를린영화제에 갔을 때였다. 그때 난 인터뷰도 없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만 봤었다. 아침 8시에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갔는데, 위원장님이 와 계시더라. 그러고는 다음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 상영관에도 이미 와 계시더라. 사실 영화제에 가보면 영화를 제대로 보려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나. 그런데 위원장님은 새벽까지 거의 모든 파티에 다 참석하시고는 일찍 일어나셔서 운동까지 하고 영화를 보러오신 거다. 그 정도 체력이면 대체 술은 얼마나 드실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한번은 위원장님의 단골 술집에서 독대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양주 한병을 원샷으로 주고받으면서 마셨는데, 이게 거의 홍상수 감독의 가위바위보 게임이더라. 그때 물어봤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술을 많이 드신 날이 언제였습니까? 남양주촬영소를 건립하려 할 때였다고 하시더라. 주민들의 반대가 워낙 심했던 때라,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약 60명의 주민을 초대하셨는데 한분도 안 빼놓고 한잔씩 주고받으신 다음에 파티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그게 일반 소주잔이 아니라 종이컵이었다는 것에 더 경악했다. 그날 이후로는 독대할 기회가 없었다. 뵙고 싶어도 연락드리는 게 그분께 부담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언제 한번 뵙자는 게 그분께는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꼭 지켜야 할 약속이다. 퇴임하신 뒤에는 좀더 편하게 전화를 걸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하셨는데, 감히 나에게 조그만 역이라도 주신다면 두발 벗고 달려가서 연기하고 싶다.

디이터 코슬릭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당신이 부산영화제를 떠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당신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영화제와 아름다운 한국에 나를 초대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으니까. 우리가 친구로 지내온 그 시간 동안 난 항상 당신의 에너지, 친절함, 프로페셔널한 면모, 그리고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그 모습을 존경해왔다. 영화제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당신을 그리워할 것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당신을 우리의 영예로운 손님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언제나 기뻐할 것이다. 당신에게 행운과 행복이 충만하길 바란다. 당신을 언제나 지지하는 디이터 코슬릭.

전도연

영화배우·<접속> <밀양> <하녀>

김동호 위원장님은 빛을 잃지 않는 사람이고 그 빛은 어디서건 사람을 집중시키고 또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부산영화제에서 그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성기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영화배우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스타> <페어러브>

김동호 위원장님은 어느 자리나 한결같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하실 때나, 문화부 차관을 하셨을 때나, 지금이나 늘 겸손하다. 만나기로 약속이 있는 날은 기분이 좋다. 연세는 있으시지만, 나이에 대한 격을 못 느끼게 하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술과 관련된 모습이다. 부산영화제 초창기 시절, 사무국이 광복동에 있을 때였는데, 새벽까지 술자리에 같이 있었다. 난 술을 잘 못하는데,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마신 뒤에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 만나러 갔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앉아계셨다. 기가 확 죽어버렸지. 나만 죽은 게 아니라, 그날 같이 있던 영화인들 모두가 그 기에 죽었다. (웃음) 부산영화제의 일등공신은 술이다. 어느 영화제를 가도 집행위원장이 각 나라의 게스트를 다 만나는 일이 없는데, 위원장님은 꼭 한번이라도 술자리를 갖거나, 식사를 하시니까 남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런 분이기 때문에 91년 폐사로국제영화제에서 30편이 넘는 한국영화를 상영하게 한 거나,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 추진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술을 끊으신 뒤에는 악동처럼 옆사람들에게 술을 마시게 한다. 몇번씩 사람을 보내버리는데, 화난 적도 있었지. (웃음) 그런 모습을 보면 아이 같기도 하다. 어쨌든 퇴임 이후에도 영화계와 계속 인연을 맺으면 좋겠다. 영화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으실 테니까, 그게 본인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논지 니미부트르

영화감독·<낭낙> <쓰리> <방콕 데인저러스>

김동호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지난 8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던 넷팩(NETPAC)에서였다. 그는 올해가 자신의 마지막 부산영화제가 될 거라고 말했다. 수많은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물결쳤다. 처음으로 밀려온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월에 따른 변화를 아주 잘 이해한다. 나는 김동호 위원장이 미래에도 그의 두눈으로 설계하고 그의 두손으로 건설한 부산영화제의 성장을 자긍심과 행복으로 지켜보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두 번째로 밀려든 감정은 행복이었다. 나는 김동호 위원장이 마침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축하한다. 건강을 돌보고, 친구들과 교류도 하고, 운동도 하고, 가족들과 좀더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 말이다.

김동호 위원장의 15년에 걸친 헌신은 부산영화제의 성장과 성공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헌신은 부산영화제를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만들었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시아 영화감독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 모든 결과는 김동호 위원장의 영화예술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각국의 영화인들을 만나고 영화산업의 새로운 움직임을 발굴하고 정보를 얻고 공유하기 위해 1년에 서른번이 넘게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다. 김동호 위원장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모든 과업들을 결코 중도에 그만두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김동호 위원장은, 오랫동안 알아왔건 아니건 간에 모든 친구들의 이름을 언제나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감동받는 부분이다. 나는 내 첫 영화가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이래 14년 동안 김동호 위원장을 알아왔다. 우리가 동년배는 아닐지라도 언제나 서로를 존경해왔다. 그는 단 한번도 아시아 영화산업에서 엄청난 파워를 지닌 남자라는 듯 행동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언제나 겸손하다. 그는 내가 진정한 친구인 것처럼 돌봐주고 염려해준다. 나는 타이에서 온 한명의 감독일 뿐이지만 단 한번도 김동호 위원장과의 사이에서 거리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는 모든 감독을 환대한다. 나에게 김동호 위원장은 존경할 만한 롤모델이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한 삶을 살며, 언제나 친절하고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주며, 관대하다.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간의 훌륭한 사례다.

왕가위

영화감독·<열혈남아> <화양연화> <2046>

나는 김동호 위원장에 대해 안개 속의 풍경처럼, 아득하지만 너무도 친밀한 인상을 갖고 있다. 그의 인내심과 열정은 누구나 느낀다. 그의 체구는 크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는 굉장히 술에 강한 사람이었다. 그와 부산에서 술을 마신 일이 한번 있는데, 그가 술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게스트를 즐겁게 해주는 놀라운 영화제 인사지만, 그 자신도 과정을 즐길 줄 안다.

오즈 야스지로는 각본가와 마신 사케의 병수로 각 시나리오를 쓰는 기간을 기록해두곤 했다. 김동호 위원장은 게스트와 마신 소주 병수로 능히 영화제 기간을 기록할 수 있으리라. 그를 알고 지낸 지난 세월 동안 그는 한살도 더 나이 들지 않은 듯 보인다. 마치 위대한 소나무처럼, 영화제의 시즌들이 흐르는 동안 그는 여전히 최고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가 부산영화제를 이끈 15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영화들이 첫선을 보이는 자리로 변모해왔다. 그의 무한한 열정과 경계없는 헌신이 우리를 깊이 감동시켰고,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리라.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