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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했던 재난을 관통해 <쿠르스크>가 도달한 지점

재난의 시간으로 들어간 영화

재난에 예고란 없다. 그것은 대개 길이를 가진 시간이라기보다 단번의 찰나다. 정의감 넘치는 과학자의 경고 따위는 현실에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2005)은 이 같은 재난의 속성을 침략자에 빗댄 적확한 활유(活喩)였다. 밑도 끝도 없이 닥쳐와 누군가의 세계를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사라지는 것이 재난의 실체다.

그런데 어떤 찰나는, 인간의 부적절한 대응과 만나 영원으로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지만 당연하고도 마땅한 조치들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그렇다.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바뀌어가는 시간, 혹은 뭍에서 발을 구르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해 무력해지는 가족들의 시간… 원작이 된 책 <어 타임 투 다이>(A time to die)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 <쿠르스크>는 무고한 인간이 마주친 찰나와 영원의 상대성에 대한 기록이다.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는 2000년 8월 12일 러시아 북쪽 바렌츠해에서 침몰했다. <쿠르스크>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 개요를 당시 언론 보도에 근거해 요약하면 이렇다. 일상적인 기동훈련을 벌이던 쿠르스크호가 원인 미상의 이유로 침몰한다.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내던 생존자들과의 통신은 이틀 뒤까지 이어졌다. 러시아 해군은 구조 작업을 지원하겠다는 서방의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적으로 구조 작전을 벌이다 번번이 실패한다. 영국과 노르웨이의 구조대 투입을 받아들인 건 사고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튿날 노르웨이 잠수사들이 쿠르스크호의 외부 해치를 여는 데 성공했지만 승조원 118명 전원이 숨진 뒤였다. 최소한 사고 이틀 뒤까지는 생존자가 있었고, 능력을 갖춘 외국 구조대는 현장 도착 하루 만에 해치를 열었다는 얘기다. 러시아 해군은 영국 잠수함과의 충돌을 주장했지만 진상 조사 결과 침몰 원인은 내부 어뢰 폭발로 드러났다. 잠수함 후미 격실에서 발견된 생존자 메모는 23명이 한동안 살아 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푸틴 대통령 취임 4개월 차에 벌어진 일이다. 러시아 당국의 안일함과 오만함이 대원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영화의 화면비가 의미하는 것

<쿠르스크>는 영화의 초반과 종반부 화면 사이즈가 작다. 총1시간57분인 영화의 앞부분 약 17분과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전 종반부 7분가량의 화면비가 16:9로 좁다. 영화의 주(主)화면인 2.35:1의 비율은 쿠르스크호 대원들의 잠항(潛航) 기간 유지된다. 그 전과 후의 화면비는 좁을 뿐 아니라 사방으로 액자를 둘러 의도적으로 크기를 줄였다. 화면비가 바뀌는 대목에서 영화는 컷 편집으로 넘어가지 않고 변화 과정을 관객에게 보인다. 언제 바뀌는지 똑똑히 보라는 주문이다. 정확히 쿠르스크호가 해수면 밑으로 내려가는 시점에 화면이 늘어나고, 승조원 전원 사망이 확인되는 순간 줄어든다. 그저 본분을 다했을 뿐인 희생자들의 사투에 대해 감독이 택한 애도의 방식일까. 극 전개에 있어 이 오프닝과 클로징은 관습적인 재난영화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욕조 안에서 잠수 놀이를 하는 아이의 얼굴을 첫 장면으로 배치한 아이디어도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다. 이 앞과 뒤를 아예 없애고 화면비 2.35:1의 본편만 남겼으면 어땠을까, 생각에 이르고 보니 이 본편이야말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전부이고, 그래서 화면 크기를 달리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이제 재난의 시간에 관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이견이 없을 <더 헌트>(2012)는, 하나의 불행을 구성하는 여러 겹의 개별 요소들을 낱낱이 들춘 통찰이었다. 이에 비해 <쿠르스크>는 재앙의 실체에 더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한다. 갑작스럽기로 치면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2015)에서 연출된 양 떼 추락 장면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번 작품에서 감독은 이 태도를 더 깐깐하게 밀어붙였다. 쿠르스크호 대원들은 두번의 폭발과 한번의 화재를 겪는다. 인물들이 위기를 감지한 순간, 그러니까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됐지만 운동중추까지 도달하기 전 시간의 한 토막, 불길이 인물의 대사를 가차 없이 자르고 들어온다. 세 차례 모두 예외 없이 같은 방식으로 연출됐다. 이것이 빈터베르그 감독이 공들여 연출한 ‘사고’로서의 재난의 실체다.

시간이 유예된 손목시계

사고가 ‘사건’으로 바뀌면 찰나는 가없이 연장된다. 관습적인 배치로 보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첫 화면에 등장한 아빠의 손목시계가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에게 전달되는 건 이를 의도한 수미쌍관이다. 아빠의 시간을 물려받은 아이의 기억은 8월 12일에 머문 채 흐르지 않을 것이다. 구조를 기다리던 생존자들의 차디찬 시간이, 멈춰버린 가족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시 살아남은 자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순환한다. 잠항 기간 잠시 주인을 잃은, 즉 시간의 흐름이 유예된 손목시계는 피해자들의 시간을 물리적 길이로 헤아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쓸쓸한 대유법이다.

상영시간 중 한가운데에 배치된 탄약 카트리지 공수 장면은 절대적이지 않은 시간의 가변성을 숨막히는 연출로 보여준다. 생존자들은 격실에 산소를 발생시키는 데 쓸 탄약을 가져와야 한다. 해당 격실은 물에 잠겨 있다. 얼마나 숨을 참고 헤엄쳐야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산소를 위해 산소를 참아야 한다. 3분여 동안 진행되는 이 역설은 찰나와 영원의 상대성을 영화적으로 구현한 드문 체험이다. 물속에서 사물함을 뒤지고 카트리지를 손에서 놓치고 동료가 끝내 혼절하고 뻑뻑한 해치를 가까스로 연 다음 동료를 살려내야 하는 일종의 진공 상태를 관객의 몸에 전달함으로써 사고의 시간과 사건의 시간이 얼마나 다른지 가늠해보도록 해준다.

끝내 망설이다 마지막 단락을 쓴다. 이 영화는 얼핏 9·11테러의 항공기 내부로 카메라를 가져간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플라이트93>(2006)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재난의 밖이 아닌 안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찰나의 측면이라면 올리버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처럼 쌍둥이 빌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속성에 가까울 터다. 영원의 단면이라면 <플라이트93>의 항공기 내부가 그 실체에 더 근접한 위치일 것이다. 9·11테러에 명백한 적(敵)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점은, 테러 5년 만에 해당 항공기와 쌍둥이 빌딩 내부로 영화가 들어갈 수 있는, 심리적 저지선의 해제 지점이었을 것이다.

<쿠르스크>가 자리한 곳은 본질적으로 이들과 다르다. 빈터베르그 감독의 관심은 당시 구조 당국이 개입할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골든타임에 카메라가 재난의 내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영화의 윤리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재난을 관통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니 그래도 되는가. 된다면 언제부터 되는가. 들어갔다면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아직은, 한국인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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