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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하나. ‘진보’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 접한 것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다.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조봉암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무시무시한 사건 말이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나이에 이런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이걸 담당한 ‘사상검사’가 우리 동네의 단골 국회의원 후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진보’라는 단어는 평생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섬뜩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한자를 공부하고 나서 진보가 ‘나아갈 진(進), 걸음 보(步)’라는 것을 알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뭐가 나쁜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건 억제해야만 했다. 사회 분야에서 진보라는 것은 금단의 열매 같은 것이었다. 물론 억제할수록 호기심은 더욱 커져갔고,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키다가 나의 20대가 흘러갔다.기억 둘. 10대 후반 시절 즐겨보던 <월간팝송> 같은 음악 잡지에는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했다. 핑크 플로이드, 무디 블루스, 킹
진보에 관한 기억과 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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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가방을 열어보자. 붓, 핀셋, 주사기, 분무기…. 화가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다. 의사도 아니며 물론 미용실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가방의 주인은 바로 푸드스타일리스트 김경미씨. 조리부터 세팅까지 ‘음식의 각’을 잡아주는 음식디자이너다. 비록 미맹이지만 누가 봐도 침이 꼴닥 넘어가게 멋진 음식을 차려내는 <도둑맞곤 못살아>의 ‘비운의 주부’ 송선미. 그가 차린 화려한 식탁이 바로 김경미씨의 작품. 푸드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이 영화 내내 필요한 작품이었지만 딱히 참조할 만한 영화도 없고 선례들도 많지 않던 상황이어서 결국 그는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레시피로 삼았다. 그렇게 색깔과 질감이 비슷해 반건조오징어를 사용한 기상천외한 음식 ‘돼지귀 초밥’이, 구워낼 몰드가 없어서 스티로폼을 잘라서 그 위에 크림을 얹고 인공설탕가루로 마무리한 지름 50cm가 넘는 대형케이크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10분 찍기 위해 10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촬영이나,
<도둑맞곤 못살아> 푸드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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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KBS가 영화계의 신진 감독들을 대거 기용해 납량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방송에서 뜬 연기자들이 충무로 진출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단막극이지만, 영화감독이 방송으로 역이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선한 ‘사건’이었다. <리베라 메>의 양윤호 감독, <물고기자리>의 김형태 감독, <가위>의 안병기 감독 등이 연출을 맡기로 한 납량특집 4부작 <도시괴담>이 소문의 진원지였다. 양윤호 감독은 과거 전쟁에서 패하고 생매장당한 백제 여장수의 영혼이 서린 음악실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담은 <죽은 자의 노래>를, 안병기 감독은 시체 해부실을 배경으로 원혼의 저주에 얽힌 잇단 죽음을 다룬 <비명>을, 김형태 감독은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생령>을 각각 연출하기로 했으나, 유산으로 물려받은 산장에서 발생하는 공포의 사건을 다룰, 마지막편인 <어둠의 집>은 쉽사리 감독 섭외가 되지 않았다. 귀
<가문의 영광> 조감독 이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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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감독 박광현, 박상원, 이현종출연 신하균, 류승범, 임원희자막 영어, 한국어화면포맷 아나모픽 와이드 스크린오디오 돌비 디지털 5.1 출시사 아이비전엔터테인먼트
<사방의 적> <내 나이키> <교회 누나>를 한데 묶은 옴니버스영화. <사방의 적>은 어느 여관에 투숙한 다양한 군상이 벌이는 황당무계한 사건을 다뤘고, <내 나이키>에서는 나이키 상표가 달린 신발을 갖고 싶어하는 고교생을 통해 추억을 회상토록 한다. 마지막 이야기 <교회 누나>는 말 그대로 교회에서 만난 누나를 사랑하는 군인의 이야기. 서플로 세 감독의 음성해설과 제작노트, 감독 및 배우 인터뷰, 메이킹 필름, 극장용 예고편 등을 담았다.
묻지마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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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Marriage 2002년, 감독 유하자막 영어, 한국어화면포맷 아나모픽 1.85:1 오디오 돌비 디지털 5.1, DTS지역코드 3출시사 엔터원매우 마음에 드는 제목이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만든 첫 번째 이유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통쾌하게 봤다’는 여성 동료들의 평가와 (영화의 내용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없이) 자기 부인에게는 ‘절대 권해줄 수 없다’는 남성 동료들의 상반된(?) 평가는 더 큰 호기심을 만들어주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발길이 극장으로 향하는 것을 막은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아이러니하게도 한줄짜리 메인 카피였다. 엄정화의 고혹적인 허벅지 라인을 한껏 강조한 포스터 사진 위에 쓰여진 그 카피는 ‘이 남자와 하고 싶다!’. 정말이지 영화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을 단번에 꺾어버릴 만큼 알맹이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고, 결국 얼마 전 출시된 DVD를 통해서 이 영화의 실체를 확인해야 했다
결혼은,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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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s in Atlantis 2001년, 감독 스콧 힉스 출연 앤서니 홉킨스, 안톤 엘친, 호프 데이비스, 데이비드 모스 장르 드라마 (워너)
미국의 1960년대를 환상적인 수법으로 조명한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던 11살 소년 바비의 집 2층에 테드라는 노인이 세를 든다. 테드는 바비에게 매일 신문을 읽어주고, 낯선 사람들을 보면 알려달라는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시킨다. 바비는 세상의 진리를 하나둘 알려주는 테드와 가까워지면서 이상한 힘까지 얻게 된다.
하트 인 아틀란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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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ye 2002년, 감독 옥사이드 팡, 대니 팡 출연 안젤리카 리, 로렌스 초우, 윳 라이 소, 에드몬드 첸, 츄차 루지하논 장르 공포 (엔터원)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이 제작을 맡아, 홍콩에서 최단기간 1천만달러 돌파 기록을 세운 무섭고도 감동적인 공포영화. 각막이식수술로 19년 만에 눈을 뜬 여인 문은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을 보게 되고, 차츰 그것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임을 알게 된다. 다시 눈을 감으려고도, 세상에서 도망치려고도 하던 문은 결국 자신에게 빛을 안겨준 눈의 주인을 찾아 나선다.
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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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ailed 2002년, 감독 밥 미쇼로우스키 출연 장 클로드 반담, 토마스 아라나, 로라 해링, 수잔 기브니, 지미 진루이스 장르 액션 (LG)
나토의 비밀요원인 자크는 가족과 함께 7년 만에 휴가를 보내던 중 호출을 받는다. 슬로바키아에서 생화학무기를 빼낸 갈리나를 찾아 프랑크푸르트로 이송하라는 임무다. 슬로바키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자크는 갈리나와 함께 기차의 침대칸에 투숙한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인 메이슨 일당이 기차를 탈취하여 인질극을 벌이며 갈리나와 화학무기를 수색한다.
디레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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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ups! Je Suis Un Poisson 2001년, 감독 스티븐 휄드마크 목소리 출연 장나라, 함수정, 강수진, 주호성 장르 애니메이션 (SKC)
장난꾸러기 플라이와 여동생 스텔라는 우연히 빠져 들어간 동굴 속에서 괴짜 박사 맥크릴이 물고기가 되는 약을 실험하는 광경을 본다. 여동생 스텔라가 이 약을 마시고 불가사리로 변해버린다. 스텔라를 구하기 위해 플라이와 사촌인 척도 약을 마시고 바다에 뛰어든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나가던 상어와 부하인 조가 해독제를 마셔버리고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다.
어머! 물고기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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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Guy 2002년, 감독 에드 덱터 출연 DJ 퀄스, 엘리자 더시쿠, 주이 데스카넬, 제로드 믹슨 장르 코미디 (콜럼비아)<뉴 가이>는 변화에 관한 영화다. 왕따였던 아이가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수련에 들어간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와 만화, 무협지에서 수없이 봐왔다. 지난 여름 <스파이더 맨>의 주제도 ‘변화’였다. 우리는 늘 누군가가 되고 싶어하고, 지금 이곳이 아니기를 바란다. 사면이 암흑의 미로 같던 사춘기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 스파이더 맨은 거미의 유전자 덕에 뉴 히어로가 되어 도시인들의 다정한 이웃으로 자리잡는다. 디지는 흑인 범죄자의 도움으로 뉴 가이로 변신한다. 펑크에 심취하며 흑인들의 스텝을 배우고, 매서운 눈초리 하나로 좌중을 압도하는 테크닉을 배운다. 물론 배움의 장은 학교가 아니라 감옥이다.디지는 공인된 왕따다. 의자에 묶여 거대한 고무 가슴을 달고 놀림감이 되었던 디지는 신학기 들어 사상 최악의 수모를 당
뉴 가이(The New G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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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이로니컬하다. 원래 그런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로니컬한 상황을 목격할 때 감탄하거나 전율한다. 이건 마치 열성 유전자로 채워진 모든 남성들이 우성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번주 독립영화관(10월4일 밤 12시50분)에서 방영하는 <공자 가라사대>(민경진, 안진수 연출/ 16mm/ 컬러/ 22분)에서는 삶의 아이러니와 열성 남성들의 대행진을 볼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지만 언제나 전교의 꼴찌 주변을 맴도는 10대, 본의 아니게 퇴직 파티를 치르고 온 10대의 아버지인 50대, 공익요원에게 쫓겨다니면서 길거리 닭꼬치 장사를 하는 30대, 학생들에게는 위엄을 부리지만 정작 자신은 주변머리없는 노총각인 40대(그는 10대의 담임 교사다), 지하철 노약자석을 두고 50대와 다투다 쓰러지는 60대(그는 40대의 아버지다) 등. 그들의 사건은 얽히고 설켜서 진행된다. 서사구조로만 본다면,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
독립·단편영화 <공자 가라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