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은 목소리> 3부작 완결편인 <숨결>은 ‘앎의 의지’와 ‘알림의 의지’가 조화롭게 맞닿은 다큐멘터리다. <낮은 목소리>엔 앎의 의지가 앞섰고 <낮은 목소리2>엔 알림의 의지가 카메라를 장악했다면, <숨결>에서는 두 의지가 합의를 이루어 박제된 역사를 망각의 유령으로부터 풀어놓는다. 그것이 역사의 복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해도, 짓밟힌 채 질뻔했던 들꽃들이 이름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2편이 ‘나눔의 집’ 언저리를 맴돌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상을 중심에 놓았던 것과는 달리 <숨결>은 그들의 과거를 채록하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1,2편의 등장인물이 비슷했던 것과는 달리 <숨결>에는 겹치는 인물이 거의 없다. <숨결>과 전편들을 연결하는 인물은 이용수 할머니인데, 흥미로운 건 이 할머니가 인터뷰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이다. 이미 자기의 존재를 드러냈던 이용수 할머니는 감독 대
<낮은 목소리> 3부작 완결편, <숨결>
-
지난해 7월 <성월동화>의 홍보를 위해 방문했던 장국영에게 <색정남녀>의 개봉소감을 묻자 그는 단박에 ‘기쁘다’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어, “색정이라는 제목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에로물은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렇다. <색정남녀>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결코 에로물이 아니다. 96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일찌감치 국내 개봉예정이었지만 심의문제로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
주인공 아성은 진지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감독이다. 그 고뇌의 초상은 멀리는 펠리니의 <8과 1/2>에서, 가까이는 홍콩 신세대 감독인 갈민휘의 <첫사랑>, 그리고 여균동의 <죽이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익숙해진 것이지만 결코 낡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원래는 블랙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다는 의도대로, 곳곳에 숨어 있는 풍자와 패러디도 천년을 넘겨 개봉한 영화의 가치를 보
풍자와 패러디로 반환의 현실을 돌파해 나가다, <색정남녀>
-
<허리케인 카터>는 흑백의 링에서 영화의 제1라운드를 연다. 삽시간에 우리의 눈길과 호흡을 휘어잡는 그는 루빈 ‘허리케인’ 카터. 성난 검은 황소, 혹은 뜨거운 맥박이 뛰는 회오리바람. 사각의 정글을 휩쓸고 포효하는 그는 과연 허리케인처럼 광포하며, 그럼으로써 아름답다. 그 폭풍을 삼면의 벽과 쇠창살에 둘러싸인 옹색한 어둠에 가둔다면? 폭풍은 잦아드는 대신 그의 내면에서는 숲을 쓰러뜨리고 해일을 일으키며 울부짖으리라.
첫 눈에도 틀림없다. 이 청년에게 권투는, 하릴없는 분노가 자기 몸을 부서뜨리지 않도록 동력으로 전환하는 발전기 같은 장치다. 백인의 성추행에 맞서다 사춘기를 소년원에 파묻고도 빚이 남아 청춘의 한때를 매장당한 카터는 칼을 갈 듯 육체와 정신을 숫돌에 벼른다. 그를 쫓아다니며 올가미를 거는 인종차별주의자 델라 페스카 형사의 눈에는 모든 흑인은 셋 중 하나다. 범죄를 계획하고 있거나, 현행범이거나, 이미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런 현실에 대한
고립이 아닌 ‘관계’에 관한 영화, <허리케인 카터>
-
[정훈이 만화] <열린TV 시청자 세상> 구색 맞추기용 옴부즈맨?
[정훈이 만화] <열린TV 시청자 세상> 구색 맞추기용 옴부즈맨?
-
-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요.” 브렌다 박사는 가제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두달 전까지 가제트는 빌딩 경비원으로 지내며 멍청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렌다 박사의 연구소에 강도들이 침입했고, 기회를 놓칠세라 용감하게 돌진한 가제트는 전치 99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이에 브렌다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로보틱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해 그의 몸을 완전 개조해냈다. 그러나, 박사는 가제트가 엉뚱한 일에 그 능력을 쓰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몸은 당신 마음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명심하세요.”
집으로 돌아온 가제트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 침실쪽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급히 구두를 벗으려던 가제트는 문득 생각이 났다. “맞아. 고고 가제트, 스프링팔!” 그러자 팔이 주욱 늘어나 단번에 전화 수화기를 귀로 가져왔다. “하하, 꽤 쓸 만한걸!… 여보세요?” 저쪽에서 들려온 것은 기계적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가, 제, 트, 씨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가제트 임파서블
-
등급보류 조치가 불씨가 돼 위헌성을 지적받아온 영상물등급위원회의 현행 등급분류제가 법의 심판대에 오른다. 그동안 <거짓말> 소동에 가려 있었지만 지난해 두 차례 등급보류 처분을 받아 상영을 원천봉쇄당한 독립영화 <둘 하나 섹스>쪽에서 서울행정법원에 등급보류 결정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낸 것. 절차상 먼저 행정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정소송을 내고, 만약 등급보류 취소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헌법소원도 낼 작정이다.
지난 2월24일 <둘 하나 섹스> 제작사 인디스토리의 곽용수 대표와 소송대리인 조광희, 정연순, 이상희, 김희제, 김기중 변호사 등은 “등급보류 처분을 포함한 현행 등급분류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영화진흥법이 헌법에 보장하는 본질적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영화진흥법상의 상영등급분류 제도에 대한 위헌심판제청 및 그 신청이 기각될 경우 헌법소원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소송은 비단 <둘 하나 섹스
<둘 하나 섹스> 제작진, 등급분류제 위헌소송 착수
-
‘일상과 이탈’이란 간판을 달고 이시이 소고, 차이밍량, 홍상수 등 세 아시아 감독의 영화상영회와 감독초청 포럼이 3월10일부터 12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세 감독은 고전적 극영화의 계율을 벗어던지고 파격적 스타일로 일상의 리얼리티를 예민하게 포착함으로써 국제평단의 이목을 끌고 있다. 행사 동안 매일 한 감독의 주요작품이 상영되며 이어 감독과의 대화 및 패널들이 참가하는 포럼이 벌어진다. 마지막날엔 세 감독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영화세계를 비교·토론하는 연합포럼이 예정돼 있다. 이번 행사는 그동안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남용됐던 일상성의 미학이란 용어를 재정립하고, 그를 통해 촉망받는 세 아시아 감독의 성취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상수, 일상으로의 초대
영화에서 일상성이란, 널리 퍼져 있는 생각과 달리, 예술영화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영화가 타고나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나 기관, 권력자 혹은 저항세력처럼 사회적 권력을 기준으로 세
영화, 일상으로의 초대, 아시아 감독 3인전
-
녀석이 ‘취직’이란 걸 했다. 취직이란 단어하고는 도통 거리가 멀어 보였던 놈이기에 짝짝짝. 3년 동안 곁에서 ‘시중’을 들어준 놈이라 박수 한번 더. 정말 ‘시중들었다’고 말한다면 ‘섭하네’라는 말이 입 속을 뱅뱅 돌겠지만, 10년 나이 많은 사람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트레스였음을 낸들 왜 모르랴.
“당신 뭐하는 사람인데 시중드는 사람까지 있었어?”라고 물어볼지 몰라서 구차하지만 삶을 조금 공개해야 할 듯하다. 어떤 일간지에서 허락없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내가 사용하는 사무실은 네댓평 남짓한 크기다. ‘배운 도둑질’이라곤 글쓰는 것밖에 없어서 먹고 살려면 작업할 공간이 필요해서, 몇명이 촌지를 모아 마련한 곳이다. 문인이나 예술가처럼 대단한 창작작업을 하는 것도 아닌 터에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 나서면 막상 갈 곳이 없어지니 별 수 없었다.
‘판잣집’ 같은 곳에 컴퓨터, 오디오, 책상, 테이블, 책, 음반이 공간을 차지하면 지나다니기 불편할 때도 있다. 같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백수 궁상
-
최근 어떤 고등학생이 중퇴를 하고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는 상담을 청해왔다. 이미 카메라를 샀다고 했다. 내 대답은, 이왕 학교 나와버린 건 하는 수 없고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 영화과나 영상원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혹시, 이 학생이 정규교육 따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천재일까. 또는 정규교육이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갉아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았던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하는 수 없다. 현실은 빤히 눈에 보이는 거니까. 지금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젊은 세대 영화감독들은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거나 일단 대학을 들어가기는 한 사람들이다. 오직 김기덕 감독 한 사람이 예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1/100의 예를 따르도록 충고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한국은 완고한 학력계급사회다. 예술쪽은 예외를 허용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가령 프랑스 50, 60년대의 누벨바그가 전형적인 지식인 감독들의 작품이었다면, 80년대 이후 프랑스영화의
[편집장이 독자에게] 감독이 되려면 대학을 가라?
-
눈치챈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양은 없다>(1999)에는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작품들이 녹아들어 있다. 우선 스타일면에서 그것은 <언지프>(1998)에 많이 기댄다. 패션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의 창작과정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비드라마적인 플롯과 불연속적인 편집을 배워왔다. 컨셉면에서는 단연 <미드나잇 카우보이>다. 욕망이 넘치는 대도시의 밤거리, 실패만을 거듭하는 가진 것 없는 청춘들, 그리고 약간의 동성애코드를 내장한 버디무비. 작가는 물론 감독과 제작자까지 이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던 까닭에 실제로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이 빼어난 고전을 다함께 복습(!)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위대한 영화는 시공을 뛰어넘는다. 무려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건만 지금 봐도 모던한 느낌이 여전한 <미드나잇 카우보이>가 바로 그렇다. 왜소한 체구에 다리까지 저는 비굴한 펨푸 리조, 몸뚱아리 하나만 믿고 남창이 되려 뉴욕으로 스며든 시골
[할리우드작가열전] 조숙한 신동, 진중한 노인, 왈도 솔트
-
여명이 <아나키스트>에 합류한다. 단 목소리만. 여명은 최근 자신의 소속사를 통해 개런티 없이 <아나키스트>의 주제가를 부르기로 계약을 마쳐 화제다. 평소 친한파로 알려져 있는 여명은 그동안 최초의 한·중 합작 영화에다 중국 상하이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을 마친 <아나키스트>에 관심을 보여왔다. 3월중 홍콩에서 녹음을 마치고 개봉 예정일인 4월 말에 맞춰 방한할 계획도 갖고 있다. 국내에서는 O.S.T로 발매되고 중국에서는 여명의 새로운 앨범에 삽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교수까지 두고 한국어를 배우는 데 열심이라고.
여명, 목소리로 <아나키스트>에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