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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살에 문신과 청바지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자. “거울을 안 보는 것이 내 젊음의 비결”이라지만, “아름다움은 몸이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지만, 5살 연하의 애인 커트 러셀 앞에서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전신박피수술도 감행한 여자. ‘고고댄서’로 스물에 무대에 올라 60살을 내다보는 지금 여전히 할리우드 무대를 누비는 여자. 세번의 이혼을 하고, 세명의 자녀를 두고, 그러나 아직도 머리를 기르고 애정전선에서 은퇴하지 않은 여자. 미국인들이 ‘완벽한 몸매’라 칭했던 젊을 적 그대로, 아직도 몸 전체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사는 여자. <죽어야 사는 여자> <행복했던 여자> <조강지처 클럽>의 골디 혼이 <와일드 클럽>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이미지와 딱 맞는, ‘왕년의 그루피’ 수젯이 되어서.
<와일드 클럽>에서 골디 혼은 그루피족으로 젊은 시절 화려하게 날렸던 중년 여성 수젯을 연기했다. 그루피는, 골디 혼이 실제로 종종
˝섹슈얼리티는 마음가짐˝,<와일드 클럽>의 골디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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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대중 앞에서 일방적으로 소비되었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펄럭펄럭 걷거나, 피식피식 웃거나, 곧잘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오락프로그램에서, 핏대 선연한 목으로 누구보다 진지하게 열창하는 무대 위에서, 몸에 입은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보이며 연민과 동질감 그리고 웃음을 주었던 스크린 안에서, 임창정은 모두 다른 색을 지니고 있다. 모두들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순 없다.
90년, 열입곱살에 무작정 뛰어든 <남부군>을 시작으로 충무로 단역생활을 거쳐 “매니저 형이랑 지하방에서 라면 끓여먹는 게 다였던” 그의 삶은 <비트>과 함께 일대도약을 맞았다. “<비트> 끝나고서는 다르더라구요. 술먹고 자고 일어나니 호텔 스위트 룸이더라니까. 그때 정말 영화 같았어요. 사람 인생 이렇게 바뀌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후 9장의 앨범을 내고 꾸준한 인기를 유지한 ‘스테디셀러’ 가수
진짜진짜 온몸을 던졌어요,<색즉시공>의 임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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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리치는 50년이 넘도록 일본에 살면서 일본문화와 영화에 관해 글을 써온 사람이다. 1946년 요코하마항에서 처음 일본과 마주했던 리치는 낯선 땅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어느덧 일본과 영어권 국가를 잇는 다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가 영어권 국가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리치의 공로가 컸다. 수십권의 책을 펴내 일본영화와 문화를 알린 리치는 아직 옛 모습이 남아 있는 도쿄 부근 우에노에서 광범한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글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미지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그는 스스로 실험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왕성한 활동가. 날마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고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다는 리치는 일본보다 훨씬 늦게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영화로선 부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을 찾은 리치를, 영화평론가 임재철씨가 만났다. 그 자신도 일본영화에
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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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는 일본의 ‘촬영소 시스템’이 잘 작동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많은 우수한 감독들이 별다른 제약없이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60년대 들어 조락의 기미를 보이던 촬영소들은 70년대 들어 결정적으로 붕괴해버리고 만다. 그러한 붕괴의 과정을 설명한다면.무엇보다 감독과 제작자 사이에서 권력이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즈나 구로사와 같은 감독들은 제작자들이 함부로 뭐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의 작품은 흥행도 어느 정도 보장됐을 뿐 아니라 작품성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촬영을 싫어했던 오즈는 촬영소 내에 비싼 세트를 지어서 영화를 찍었지만, 쇼치쿠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0년대 컬러텔레비전의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관객은 놀라울 정도로 격감했다. 그렇게 되자 영화사는 촬영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비싼 영화’와 예전 방식을 고집하는 감독들을 피하게 되었다. 60년대
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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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영화비평으로 출발했지만 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등 다양한 문필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문학적 야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내 성장기에서 영화와 함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쓰기였다. 어렸을 때 나는 주위환경을 내가 전혀 제어할 수 없다는 데서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아홉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이 무력감이 조금 가시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나마 말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열다섯살 땐 처음으로 헤밍웨이를 읽었는데 그의 작품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다시 써보는 연습을 했다. 요새 말로 하자면 ‘해체론적 실천’이라고 할 만한 것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은 지금도 내 글쓰기에서 중요한 밑천으로 작용한다.당신은 50년 넘게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영어로 글을 쓰고 있다. 어떤 점에서 당신은 20세기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자발적 망명자’들의 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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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와 함께 스크린으로 금의환향한 건 오스틴 파워만이 아니다. 오스틴에 대적하는 닥터 이블, 그의 ‘사악함이 1/8로 농축된’ 클론 미니 미의 못 말리는 짝패도 돌아왔다. <오스틴 파워>에서 덩치만 다른 쌍둥이처럼 새끼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댄 채 악동 같은 웃음을 흘리던 그들을 기억하는지. 익히 탄로난(?) 대로 닥터 이블의 실체가 오스틴, 팻 배스타드, 골드멤버와 동일 배우인 마이크 마이어스라면, ‘미니 미’의 애칭과 침묵 뒤에 숨은 배우는 바로 버네 트로이어다. <오스틴 파워> 시리즈의 2, 3편으로 덩치에 반비례하는 인기와 성공을 거머쥔 그는 실제 지극히 아담한 몸집의 연기자. 80cm가 약간 넘는 신장 때문에 앳되어 보이지만, 내년 1월이면 만 서른넷이 된다.
미시건의 작은 마을 센터빌에서 자란 그가 고교 때부터 막연히 꿈꾸던 영화계에 입성한 것은, 전화회사에 다니던 1993년. 친구의 소개로 <빙크의 베이비 데이 아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의 미니 미,버네 트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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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겨울 연가> 같아요. 그때 정말 추웠거든요.” 초겨울 쌀쌀한 날씨, 낙엽이 수북이 쌓인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최지우는 소녀 같은 목소리로 호호거렸다. 3년 만에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스크린에 돌아올 참이지만, 무심결에 <겨울 연가> 얘기를 꺼내는 그녀에게선 아직 ‘텔레비전’ 냄새가 물씬 났다. <신귀공자>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그동안 1년에 한편 정도씩 꾸준히 드라마를 하며 최지우는 ‘예쁜 탤런트’로 착실히 입지를 다져왔다. 그때, “드라마 할 때는 영화 시나리오 볼 시간도 없었다”.
최지우를 다시 스크린으로 데려온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그런데 최지우를 그냥 ‘예쁜 탤런트’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듯하다. 지금까지의 최지우가 곱게곱게 단장된 모습이었다면,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그녀는 확실히 보기와 다르게 터프해진다. 대통령의 말 안 듣는 딸 영희를 가르치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돌아온 배우 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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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전에서 ‘고전’의 뜻을 찾아보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통독하지 않은 책”이라고 풀이돼 있을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보드웰 그리고 크리스틴 톰슨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지 않다면 당신의 책장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 예술>(Film Art)이나 <세계영화사>(Film History)라는 제목의 묵직한 책이, 한때 결의에 부풀어 출석했던 학교나 문화센터의 영화학 개론 수업의 추억을 뜨끔하게 일깨워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부지런하고 열심인 서울의 영화학도들은 지난 11월12일 오후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 재직 중인 보드웰 교수는 한국 영화학회의 초청으로 동반자 크리스틴 톰슨 교수와 나란히 내한해 11월12일 동국대에서 최근 영화학의 동향을 간추리고 오랫동안 그가 집중해온 ‘역사적 영화 시학’(Historical Poetics of cinema)을 유효한 방법
내한한 미국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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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름과 똑같이 생길 수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대니의 질투>(Man in the Moon, 1991)라는 아담한 성장영화였다-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톡 튀어나온 짱구 이마와 꼭꼭 당겨 묶은 24K의 금발, 호기심 많은 눈, 하고 싶은 말들이 소복이 담긴 꽃삽 같은 턱. 영화 속에서 유난히도 달을 많이 바라보던 소녀는 반짝이는 은제 티스푼 위에 올라앉은 레몬 아이스크림처럼 입 안을 굴러다니는 리즈 위더스푼이라는 이름과 완벽하게 하나였다. 포니 테일의 소녀는 이내 쑥쑥 자라 자기보다 더 예쁜 남편(라이언 필립)을 얻고 아기 엄마가 되었지만, 리즈 위더스푼은 여전히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야무지고 상큼하며, 똑 부러진 몸짓으로 자기를 주목하라 보챈다. 딸 아바를 세상에 내보낸 것은 그동안 위더스푼이 해낸 많은 큰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녀는 <일렉션> <플레전트 빌>처럼 칭찬받는 영화에서 당당히
<스위트 알라바마>의 리즈 위더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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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라는 직업은 가끔씩 얼굴에 철판을 뒤집어써야 하는 일이다. 장염과 감기몸살을 동시에 얻어, 사흘 동안 죽과 링거주사약으로 연명했다는 장동건은 ‘톡’ 치면 ‘폭’ 쓰러질 듯 핼쑥했다. 이런 환자와의 인터뷰를 고집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해안선>의 부산영화제 개막 상영을 앞두고, 우리는 일찌감치 장동건을 인터뷰하기로 했었다. 그날 장동건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비보’를 들었고, 이른 쾌유를 기원하며 며칠 뒤로 약속을 미뤘다가, 또 다시 부산영화제 개막 당일로 옮겨 잡았다. 그렇지만 상황은 나아 보이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장동건은 지치고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성사되야만 했다. 사람 만나고 기사 쓰는 것이 일인 기자로선, <해안선>의 홍보 카피 그대로, 데스크가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죄책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장동건은 공연히 아픈 게 아닌 것 같았다. 촬영을 끝낸 것이 꽤 오래 전
<해안선>으로 돌아온 장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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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신(40)은 평단보다 관객이 반긴 감독이다. 데뷔작 <자카르타>가 평단의 비판, 내지 유보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크게 히트했고 두 번째 영화 <몽정기>도 흥행예감이 좋다. 영상이나 이야기의 세부장치가 거칠어도 그냥 밀고가는 그의 연출은 아직은 ‘웰 메이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대중이 감응할 만한 요소들은, 그게 상투적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방점을 찍는다. <몽정기>는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해 몸이 먼저 아우성치던 ‘몽정기’, 내지 ‘발정기’의 추억을 환기시키는 영화다. 그 방식은 익숙한 것이지만, 자칫 외부와 충돌하기 쉬운 소년들의 불안한 성욕을 보기 편하게 영화 속에 녹여내는 모습이 밉지 않다.<몽정기>까지 히트한다면 정 감독은 몇 안 되는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설 게 분명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간첩 리철진> <달마야 놀자>를 제작한 씨네월드가 2년 가까이 야심차게 준비해온 역사코미디 <황산벌>의
소년들의 성적호기심 그린 <몽정기>감독 정초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