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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대신 뜨개질>은 공정여행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에 다니는 세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언젠가 어느 극장 대담 자리에서 만난 이 영화의 감독 박소현은 얼마 전 내게 영화를 보내주며 응원이 될 수 있는 멘트를 부탁했다. 나는 간단한 소감을 메일로 감독에게 보내줬고 감독은 사의를 표했지만 자꾸 이 영화의 어떤 영상들이 떠올라 평을 쓰게 됐다.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의 우정, 외부의 충격에 늘 함께하는 건 아니면서도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그들의 우정에 감동받았고 현실적으로는 늘 자기 의지에 반하는 상황을 맞아 패배하는데도 개인들은 굴하지 않고 진화하는 광경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건전한 자극
앞서 세 여자주인공이 나온다고 했지만 이 영화의 인물 배치 방식은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다. 영화의 주된 축은 여행사에서 국내여행상품을 개발하는 나나라는 주인공이다(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불린다. 회사의 다른 동료, 상사들도 마찬가
[김영진의 영화비평] 길고 넓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의 우정에 관한 <야근 대신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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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동물사전> 영화표는 머글, 아니 노마지들의 마법사 세계 방문증이나 다름없다. 한데 정상적이라면 극장 밖을 나선 후에 발동되어야 마땅한 기억지우기 마법이 웬일인지 조금 더 일찍 시작됐다. 영화 말미 그린델왈드가 변신을 풀고 원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이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것이다. 콜린 파렐이 조니 뎁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관객을 현실로 되돌리는 이 영화 최대의 ‘킥’이다. 특정 배우의 외견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조니 뎁의 경우 콜린 파렐과의 너무 큰 간극과 현실 이미지가 겹쳐 몰입을 파괴하는 정도가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CG이고, 반대로 영화의 생기를 앗아가는 것은 실사 배우들이다. 내가 새삼 놀랐던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생생한 CG 캐릭터와 이질적인 실사 배우
CG의 권능에 대해 말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정도다. 현실이 아닌 필름(=영화)을 모사하기 시작한 그래픽은
[송경원의 영화비평] <신비한 동물사전> 말하는 대로, 보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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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으스스한 소재를 다룬다. 바로 실종, 그것도 아이들의 실종이다. 아이들의 죽음도 슬프고 무섭지만 아이들의 실종은 그보다 더 오싹하다. 최소한 아이들의 죽음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실종사건은 사라진 사람들을 망령과 같은 흐릿한 존재로 고정시키고 그 상태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동안 사람들의 상상력,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에 대한 매혹과 공포는 부풀어 오른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행잉록에서의 소풍>이 그렇게 매력적인 영화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끝까지 해답을 주지 않고 미스터리의 향취를 최대한 뽑으려 했던 <행잉록에서의 소풍>과 달리 <가려진 시간>은 영화가 다루는 세 소년의 실종사건에 대해 친절한 답을 준다. 그 답은 환상적이지만 그만큼 산문적이기도 하다. 세 소년은 시간을 잡아먹는 요괴의 알을 깨트리고 정지된 시간 속에 갇
[듀나의 영화비평] <가려진 시간>과 소녀의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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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영화를 만든 남성감독을 꼽는다면 내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한편의 영화로 충분하다.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조셉 L. 맹키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의 여성 관계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는 담대한 작품이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 스타 자리를 놓고 벌어진 쇠락해가는 배우 마고(베티 데이비스)와 그녀의 팬이었던 젊은 이브(앤 박스터)의 암투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각자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은 채 지속 가능한 관계들로 변모한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서 시작하지만 영화는 단지 모성에만 매여 있지 않고 다양한 이들간의 관계를 향해 나아간다. 알모도바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 확신하게 된 이유도 그가 여성, 어머니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는 주제적 측면보다는 그가 여성들의 관계, 여성간의 연대기를 능히 다루기 때문이다.
한 인물 두 배우
알모도바
[김소희의 영화비평]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여성들간의 관계를 말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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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담>의 초반부는 흔한 88만원 세대 젊은이의 일상을 소묘한다.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윤주(이상희)는 졸업작품 전시를 위해 고물상에서 작품 재료로 쓸 폐품을 고른다. 그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또래 여자 친구에게 월세를 내며 세들어 산다. 그 여자 친구는 남자와의 섹스를 좋아하는데 윤주에게 왜 연애를 안하느냐고 성화다. 작업실에서 고단하게 일을 하며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남들 일할 때 아버지는 뭘 했나 모른다고 불평하는 대학원 친구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이 여자주인공 윤주는 딱히 매력을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평범하다.
학교 강의실, 좁은 월셋집, 고물상, 작업실, 편의점 등으로 구획 지어진 윤주의 주된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유일하게 극적이랄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건 연애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윤주의 연애담을 그리는데 묘사 방식이 종래의 다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그건 이 영화가 여자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
[김영진의 영화비평] 연애의 과정과 젊은이들의 삶을 특별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연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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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열여덟 번째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하 <당자당>)은 출구를 향한 욕망을 자극한다. 서울 연남동 일대의 한정된 공간을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의 플롯은 미정형 상태의 혼돈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당자당>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는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투쟁을 묘사한다. 미성숙하고 우유부단한 주인공 영수(김주혁)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홍상수의 남자들이 자기 몰입적인 강박에 빠지는 꼴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당자당>에서 홍상수의 이야기를 형성해온 우연한 만남과 기이한 재조합, 여로형(形) 플롯 그리고 복습되는 장면들은 내러티브의 계열 위에서 진동한다. 스토리는 어떤 과장이나 수사도 없는 정직한 문장처럼 담백하지만 플롯은 다소 복잡하다. 홍상수는 많은 모순과 부조화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서사의 주요 단위들은 신중하게 조직되었고 정연하게 조각나 있다. 홍상수는 행위의
[장병원의 영화비평] 홍상수 감독의 신작을 내러티브와 구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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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은 서부라는 공간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주요 배경인 텍사스주는 남부에 더 가깝고, 몬태나주는 북부라 부르는 게 맞다. 정작 서쪽 끝의 로스앤젤레스는 웨스턴의 공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부는 상징적인 이름인 셈인데 동부의 반대편 정도로 파악하면 되겠다. 동부를 도시적인 공간, 즉 인간이 만든 규칙과 건물과 시스템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본다면 서부는 어떤 개념이 지배하는 공간일까?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 정도가 어울릴 성싶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공간이란 또 무슨 말일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다 도시를 언급한 문장을 접했다. 그녀는 “집 밖에서 주로 생활하다 잠시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도시는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날씨가 기분에 영향을 줄지언정 생사 결정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공간이다”라고 썼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공간, 그곳이 바로 서부다. 땅의 순수함을 믿었던 사람들이 서부로 이동했고, 그 땅에 붙어살았던 인간에 의미를 부여해 서부의 신화가 완성되었다.
[이용철의 영화비평] 무법자가 사라진 웨스턴 <로스트 인 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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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홍상수는 리얼리즘의 감각으로 본질을 이야기한다. 늘 그랬듯 남자주인공은 우유부단하고, 그 때문에 여러 사건들이 생긴다. 술에 취할 때만큼은 용감해지는 인물들의 성향도 여전하다.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지배하는 것은 술, 사랑, 충동적 행동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술 취한 주인공이 쟁취하는 대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주인공 영수(김주혁)는 눈앞에 앉은 여성을 갈구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눈앞에 없단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이 점에 주목해 영화를 살피려 한다. 절망과 깨달음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 작품은 진지하게 파고든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현재의 상태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이 질문은 “영화가 현실의 예술인가?”라는 시네마의 본질적 의문과도 연결된다. 물론 그 대답은 유동적이다. 철학자 클레망 로세의 이야기처럼 영화의 사실성은 어느 누구도 붙잡을 수 없고,
[이지현의 영화비평]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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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한 만큼만 받는 사람들, 혹은 그마저도 못 받는 대다수 사람들에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금융자본주의다. 톰이 100만원을 벌어 은행에 넣고 제임스가 은행에서 100만원을 빌리면, 톰과 제임스는 총 200만원을 쓸 수 있다. 번 돈은 100만원뿐인데 쓰는 돈은 2배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국내에 도는 돈이 1천조원이 넘는다. 죄다 빚이다. 사람들에게 빚이 많을수록 은행은 돈을 번다. 17세기 영국 금 세공업자들이 탄생시킨 은행업은 대출을 많이 내줄수록 많은 이자를 받아낼 수 있었고 그러면 더 많이 대출해줄 수 있으므로 갖가지 대출상품을 만들어왔다. 처음엔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돈을 꿔줬는데, 대출에 맛들인 은행업자들은 담보만 있으면 돈을 내주기 시작했다. 생산되는 가치와 별개로 유통되는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은행이 얼마나 대출을 해주고 싶어 안달인가 하면, 실제로는 아직 사지도 않은 집을 담보로 돈을
[송형국의 영화비평] 각자도생의 공기를 건조하게 담아낸 <로스트 인 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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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엄마는 한 계절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동네 노인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유독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건 죽음에 관한 것이고 장소가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수면내시경이 끝나고 가수면 상태에서 깬 엄마는 갑자기 그런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는 내게 그런 걸 소설로 써보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서 죽음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러니까 병사(病死)였던가, 사고사였던가, 투병의 기간이 길었던가, 혹은 비참했던가- 그 이야기를 전하던 엄마의 태도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그들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그들이 어떤 일상을 보냈는가를 주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이런 모습에 대해 기억할 수 있었다. 어느 노인의 산책은 도시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종일 이어지기도 했다는 것. 그 노인에게는 엄마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번듯한 집이 있었지만 돈이 필요한 자식을 위해 처분하고 세들어
[김금희의 영화비평] <죽여주는 여자>의 마지막 장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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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이하 ‘판도라’)는 ‘막달레나 공동체’와 ‘용감한 여성연구소’의 제안으로 시작된 용산 성매매집결지 여성들의 사진 모임이자 이들의 작업을 일컫는 타이틀이다. 나는 그들을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봄날의박씨 펴냄, 2016)라는 책을 통해 알았는데, 이 책에는 살면서 카메라를 든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용산 성매매집결지를 수천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의 의의가 실려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소영(윤여정)은 ‘판도라’ 여성들과는 달리 카메라 앞에 서 있지만, 이들은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상태로 보이는’ 구조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판도라’ 팀이 해외에서 전시 초청을 받았을 때, 피츠버그대학의 한 한국인 학자는 이 전시가 “‘한국인 사창가 사진전’으로 보일 것
[양경언의 영화비평] <죽여주는 여자>, 난감한 삶의 형식 앞에 카메라가 놓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