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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감싸안는 뜨거운 가슴을 거부할 이 누구인가. <재심>은 올바르고 따끈한 영화다. 당신은 아마도 이 영화의 포근한 품에 몸을 내맡기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해주고픈 말이 있다. 그 포근한 품이 당신을 인도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가부장제다. 다른 영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정확히 <재심>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착한 변호사가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풀어주는 그 <재심>?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재심>은 집 나간 탕아가 의붓아버지를 만나 무사히 가부장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다.
모순이 너무 많다
영화는 법적 세계를 가부장적 세계로 파악한다. 현우(강하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단어는 가부장제하에서 가부장 없는 아들에 대한 편견 섞인 용례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됨을 미리 밝힌다)이며 다방 꼬마로 불린다. “저 아이는 학교 안 다니냐”는 형사들의 질문에 다방 주인은 “애비는 죽었고 저 양아치를 써주는
[홍수정의 영화비평] <재심>이 변호사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의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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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 리로드>(이하 <존 윅>)의 도입부. 건물의 한쪽 벽 위로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가 영사되는 중이다. 키튼의 꿈속에서 분리된 자아가 탐정 셜록으로 분해 영화 속으로 뛰어든다. 도난당한 진주를 되찾은 그가 악당들로부터 도망치는 거대한 시퀀스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조수의 도움으로 모터바이크 앞에 걸터앉은 그는 조수가 떨어져 나간 걸 모르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모터바이크가 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별로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의 별명이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 아니던가.
그런 그가 극중 드물게 극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모터바이크가 달려오는 철도 및 자동차와 부딪힐 뻔한다. <존 윅>은 키튼이 머리를 감싸쥐며 공포를 체감하는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셜록 주니어>는 1924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며, 키튼은 몸을 놀려 연기하는 배우들의 위대한 선배다. 이미
[이용철의 영화비평] <존 윅: 리로드>와 고독한 킬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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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며 아내가 말했다. “뒷정리를 부탁해.” 아내의 부재를 틈타 애인과의 밀애를 즐기려던 남자는 머쓱해져 대답한다. “그러려고 했어.” <아주 긴 변명>(2016)의 오프닝 시퀀스 이야기다. 결혼 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중년의 스타 작가 츠무라 케이(사치오)와 헤어디자이너 나츠코는 얼핏 다정해 보이지만 내면은 서늘하다. 아내 나츠코는 일년에 한번 절친한 친구와 여행을 간다. 바로 그날, 출발 전 남편의 머리를 손질하고 부랴부랴 나서던 아내가 남편에게 남긴 말이,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이때 그녀의 미묘한 눈빛과 표정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녀가 탄 관광버스가 눈 덮인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갈 때, 모든 승객이 잠든 사이 홀로 깨어 있는 그녀가 창밖 풍경을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할 때, 관객은 그녀가 이미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흡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그녀는 예시적인 마지막 말과 그리고 미처 남편에게 전송하지 못한
[정지연의 영화비평] <아주 긴 변명>, 한 남자의 뒤늦은 성찰 혹은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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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사랑의 시대>(2016)는 그의 전작들과의 연속성 밖에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그는 첫 장편영화 <셀레브레이션>(1998)과 <더 헌트>(2012)에 이어 다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앞에 가져다놓았다. 에릭(울리히 톰센)이 상속받은 대저택에 함께 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 곧이어 이 공동체는 에릭의 연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의 합류로 변화를 맞는다. 에릭의 외도와 엠마의 등장이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변화의 시작은 항상 불쾌한 해프닝이다. 일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집단 안에서 지속되는 긴장과, 꿈틀거리며 변화를 수용하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은 빈터베르그 영화의 특징이다. <사랑의 시대>에서도 공동체의 일원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엠마를 결국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수용의 과정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왜 엠마를 받아들였을까. 엠마가 불편한 존재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
[홍수정의 영화비평] <사랑의 시대>와 공동체의 불영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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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낯뜨거운 일이 되겠지만 요즘 내가 심각하게 하는 고민은- 나를 포함해- 이토록 다정한 사람들의 오갈 데 없는 다정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그런 고민은 친구들의 연애 실패담과 결혼 생활의 고충을 들으며 시작되었는데 그러고보니 내 경험으로 돌아봐도 사랑이란, 연애란 그리고 결혼이란, 무언가 수탈의 느낌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 수탈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가 생각해보니 다정(多情)이 병이었다.
누가 우리의 다정함을 노릴까
<매기스 플랜>(감독 레베카 밀러, 2015)에도 그렇게 해서 곤란에 빠지는 여자 매기(그레타 거윅)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예술비즈니스 강사로 일하는 매기는 이름이 비슷해 잘못 입금된 강사료 때문에 행정과에 갔다가 인류학 강사인 존(에단 호크)을 만난다. 그 뒤 공원에서 조우한 둘은 대화를 나누고 존이 매기에게 자신의 소설 원고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둘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김금희의 영화비평]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의 한계를 명랑하게 풀어가는 <매기스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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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와 이안(제레미 레너)이 처음 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탐사팀이 들고 들어간 새장 속의 새에게 유독 시선이 간다. 뭔가 대단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알겠는데 영화는 딱히 왜 새를 들고 들어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돌고래를 연상 시키는 소리와 함께 외계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만이 공간을 채울 뿐이다. 가능한 한 화면 안의 요소들을 단순화하려 애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이토록 눈에 띄는 장치를 그냥 배치했을 리 없다. 내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저 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헵타포트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장치라고 짐작 가능하다. 호흡하기 적당한 공기인지 치명적인 물질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생체 지표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미장센 측면에서 보자면 사운드로 장면을 장악하는 이 영화에서 이색적인 음색을 제공한다. 방호복 속 인간의 숨소리, 트럼
[송경원의 영화비평] 드니 빌뇌브가 제시하는 어떤 가능성 <컨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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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적이면서도 시적인 공포감을 일으키는 질식할 듯한 누아르” (<롤링스톤스> 피터 트래버스)라는 상찬에서부터, “우아한 외견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수준에선 상처받은 10대답다”(<빌리지 보이스> 빌지 에비리, <뉴욕타임스> 매놀라 다아기스)는 분열적 의견까지 작품에 대한 평이 갈린다.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하고 있는 톰 포드의 두 번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 대한 언급이다. 심리적 누아르로 출발하지만 현대적 웨스턴으로 질감을 달리하는 영화의 장르적 외견은 일견 매혹적이다.
감독의 전작 <싱글맨>에 비하자면 영화의 미적 스케일과 작가로서의 장악력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다.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정서와 톤이 금욕적일 만큼 엄밀히 절제되고 있다. 영화는 공간적으로는 화려한 LA와 흙먼지 자욱한 텍사스를,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송효정의 영화비평] <녹터널 애니멀스>에 나타난 여성 혐오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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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하나의 의문을 갖고 물고 늘어지며 쓰려 한다. 최근의 주류 한국영화에서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들이 근사하다는 느낌으로 수렴되는 것 외에 왜 지속적인 잔상을 남기지 않을까란 의문이 그것이다. 나와 가끔 문자로 교신하는 어느 영화인은 요즘 한국영화에서의 얼굴 클로즈업은 대사와 표정 외에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스토리는 다양해졌지만 얼굴이 영화적 이미지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용가치로 전락해버린 작금의 한국영화 현실은 오염돼 있다는 것이다. 얼굴의 ‘사용가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인데, 이 풍토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얼굴의 페티시즘에 갇힌 온갖 메시지 영화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들도 머지않아 상투형의 막다른 골목에 막힐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윤리적 감각의 균형이 부재한 <마스터>
이를테면 <마스터>란 영화에 등장하는 숱한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은 그저 배우들이 근사하게 생겼다는 인상 외에 어떤
[김영진의 영화비평] 최근 한국영화의 낭비되는 이미지 문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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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무지 복잡한 심리 상태의 인물과 마주 앉아 긴 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위험한 정사>(1987)의 알렉스(글렌 클로스)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물의 리스트에 <여교사>의 효주(김하늘)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김태용의 영화다. 계급적이고 사회적인 무언가가 한 인물에 입힌 상흔이 분명 읽히는데 그걸 개인의 심리로만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계급적인 것으로 읽기엔 그녀의 욕망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크다. 그래서 난감한 심정으로 그녀를 며칠 동안 생각했다. 개봉 이후 그저 그런 치정극이란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고, 김태용이 그런 의도로 <여교사>를 찍지는 않았다는 말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의도가 곧 영화는 아니지만 적어도 억울한 마음은 풀어줘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주인공 효주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곧바로 떠오른 건 그녀의 표정이다. 무표정에 가까워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이는 그 표정.
효주의 무표
[이용철의 영화비평] 근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낸 파열음 <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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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지막 5분이 다 했다. 영화가 끝난 뒤 진하게 잔상을 남기는 건 시간을 뛰어넘어 끝내 만나고야 마는 소년, 소녀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니라 사진보다 아름다운 몇몇 장면들이다. 전체를 다 보지 않고 마지막 5분만 봤더라도 나는 이 작품에 충분히 만족했을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의 후반 5분은 그것만 따로 잘라서 단편으로 구성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독립되고 완결된 구성을 선보인다. 후일담으로서 앞서 펼쳐둔 상황을 정리한다기보다 차라리 마지막 5분의 이야기를 위해 90분간의 전사(前史)를 깔아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혜성 재해로부터 미츠하와 이토모리 마을을 구한 후 8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후반 5분의 이야기는 내레이션, 독백, 심상이 투영된 풍경, 빠른 편집과 세밀한 배경까지 <별의 목소리>(2002)나 <초속5센티미터>(2007)의 정서와 호흡을 연상시킨다. 미츠
[송경원의 영화비평] 신카이 마코토의 극한의 세밀한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마법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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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러지(외전) 이전에 익스펜디드 유니버스(이하 EU)가 있었다. <스타워즈>의 드넓은 세계 속에서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가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하다. 2014년 이전까지, 이 세계엔 조지 루카스가 창조해낸 6편의 <스타워즈> 영화 외에 이들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수많은 콘텐츠들이 존재했다. 소설과 코믹스, 애니메이션과 게임. 단순한 팬픽이 아니라 조지 루카스의 공식적인 승인과 전문 작가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이 작품들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와 단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35년간 <스타워즈>의 우주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디즈니는 <스타워즈> EU의 리부트를 선언하며 여섯편의 본편 영화와 애니메이션 <스타워즈: 클론전쟁>(2008)을 제외하고는 2014년 이후 루카스필름
[장영엽의 영화비평]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 담긴 변화와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