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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욱의 현장기행] 스폰지 조성규 대표가 걷는 길 [1]

현장_수입·배급·제작사 스폰지 타깃_대표 조성규 취재기간_2006년 10월24일~11월8일 취재 중에 만난 사람_배창호·봉준호·이윤기·김대승·김현석·김태용·강이관·용이 감독, 정유미, 한효주, 민진수 수필름 대표, 스폰지 식구들 등

프롤로그

<사랑니>와 <가족의 탄생>에서 청초한 개성을 반짝였던 배우 정유미의 눈을 실제로 보면 더 반짝거린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오다기리 조는 나만의 보물이었을 때가 좋았어요. 너무 많은 이들이 좋아하게 됐으니 저는 이제 그만 놔줄래요.” 정유미는 <여고괴담> 시리즈의 오디션에서 배우 한효주와 나란히 미끄러진 뒤 절친한 사이가 됐다. 스폰지하우스에서 스폰지가 수입·배급한 영화들을 보는 건 이들의 주요한 친교 아이템이다. 오다기리 조를 국내에서 스타덤에 올린 <메종 드 히미코>나 <조제…>를 국내 개봉한 것도 스폰지다.

서울유럽영화제를 찾은 한효주, 정유미와 함께

10월26일 메가박스에서 만난 두 배우가 보러온 영화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 제7회 서울유럽영화제 개막작인 <수면의 과학>은, 개인적 감상기로 말하자면, 미셸 공드리의 전작 <이터널 선샤인>보다 훨씬 발랄하고 코믹하며 판타스틱하지만 사랑에 닿을 수 없는 아픔의 여운을 더 크게 남겨주었다. <수면의 과학> 역시 스폰지 이름으로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이틀 앞선 24일 오후 8시 압구정동의 한 소극장. 배창호 감독의 <길>이 ‘비공식 VIP’ 시사회를 가졌다. 봉준호, 이윤기, 김대승, 김현석, 김태용, 강이관, 용이 등 젊은 감독들이 속속 모여들자 배창호 감독의 표정이 환해졌다. “임권택 감독 DVD 보니까 김대승 감독이 <태백산맥>에서 딱딱이 치데…, 봉준호 감독은 이명세 감독을 닮았어. 물론 좀더 잘생겼지….” 처음 만나는 젊은 후배감독이 많은지라 친근한 인사말을 건네던 배창호 감독이 문득 누군가를 향해 치사를 보냈다. “스폰지의 음모로 이렇게 여러분들을 보게 됐네.” 시사회가 끝난 뒤 스폰지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이들은 좀더 진한 정을 나눴다.

먹고 노는 것은 아낌없이

오랫동안 극장 상영의 길을 찾지 못했던 <길>은 스폰지 배급으로 스폰지하우스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음모’의 주동자는 조성규 스폰지 대표다. 사례를 더 열거하지 않아도 요즘 영화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불쑥불쑥 만나게 되는 이름이 스폰지다. 얼마 전에는 김기덕 감독의 <시간>을 마케팅, 배급해 손익분기점을 맞춰내는 계산법을 작동시켰다. 한국 영화사가 피해가거나 직배사가 거들떠보지 않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상한 나라, 스폰지의 앨리스는 영특한 소녀가 아니라 풍성한 볼따귀와 머리 스타일이 특징인 조성규 오빠다. 모두들 ‘작은 영화’가 설 곳이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칠 때 이 오빠는 꿋꿋이 작고 예쁜 영화들을 쉴새없이 개봉시키며 작은 영화의 수익모델을 만들어냈다.

스폰지라는 회사가 뒤늦게 궁금해질 즈음, 조성규 대표가 눈에 띄었던 건 <에로스>(감독 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시사회장이었다. 그 덥수룩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인사말을 시작하는데 특이했다. “저희 식구들이 저보고 나가서 인사하라고 해서…”로 시작한 격의없는 말투부터, 내심 ‘기자이긴 하지만 너희도 우리 스폰지 영화 좋아하지? 그러니까 우린 적이 아니잖아?’란 전제를 깔고 유쾌하게 말을 이어가는 품새가 밉지 않았다.

조성규 오빠는 적금도 보험도 들어놓지 않은 무정형의 삶을 즐긴다. “먹고 노는 것은 아낌없이”란 신조는 조성규 개인의 것이지만 회사 운영 원칙이기도 하다. 부산영화제 같은 잔치가 열리면 우르르 내려가 축제를 즐기고 그 비용은 회사가 부담하며, 밥때가 되면 역시 우르르 몰려가 미각을 나누는 게 원칙이다. 비즈니스가 아닌 점심 약속으로 자꾸 빠지면 눈총이 날아든다. 오빠가 투닥투닥 벌여나가는 일들 때문에 모두들 소리없이 부산하지만 스폰지 사무실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아늑함과 편안함은 이유가 있는 부러움이었다. 동아리 아닌 동아리 같은 친밀한 유대감은 또 어떤가. 일본식 주점에서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24일의 <길> 뒤풀이 비용은 마케팅 예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니, 먹고 놀자는 거였는데 그 비용을 왜?” 하며 동그래지던 오빠의 눈은 미스터리다.

외화 수입뿐 아니라 윤도현 밴드의 유럽 투어 다큐멘터리 <온더로드, 투>, <거칠마루>, 김기덕 감독의 <시간>, 배창호 감독의 <길>,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 등 저예산 한국영화에 제작자 또는 배급자로 성큼성큼 손을 내미는 스폰지의 매출은 매년 2배씩 커지고 있다. 2002년 5억원, 2003년 10억원, 2004년 20억원, 2005년 50억, 2006년 70~80억원….

김유신과 유성룡도 못 말린다

살인적인 강행군 속의 회의

조 오빠는 극장 스폰지하우스의 상주 직원을 빼면, 압구정 사무실 11명 중에 유일한 남자다. 외화 구매와 개봉 시기, 영화제 기획 등 주요 사안은 10년 가까이 동거동락해온 조은운 대표(실은 공동대표 체제다)와 이지혜 부장을 포함한 3자 회의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조 오빠는 이들 ‘여왕’을 김유신과 유성룡에 비유한다. 충성하는 건 분명한데 자꾸 말린다는 것이다. 조 오빠가 어찌나 많은 영화를 사들이는지 조 대표는 최근 ‘3개월간 영화 구매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6명이 마케팅을 포함해 한달에 서너편을 개봉시키고 있으니 살인적인 강행군이 계속되는 게 사실이다. 시네코아 2개관을 임대해 만든 스폰지하우스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았지만, 실은 조 오빠가 즉흥적으로 결정했던 일이고 이후 몇 개월 동안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등골이 휘었다. 그런데 내년 1월부터 시네코아 1개관을 더 추가하려는 내심을 비추니 두 여왕이 또다시 김유신과 유성룡이 되려는 판이다.

아메리칸필름마켓(AFM)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준비회의가 열렸다. 해외시장 담당인 송유진 대리가 준비한 서류 두께가 백과사전만하다. 10여편 내외를 내놓은 40여개 회사의 작품 정보(여기에는 가격이 포함된다)가 빼곡히 정리돼 있다. 송 대리와 조은운 대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조 오빠의 입을 쳐다본다. ‘또 얼마나 사들이려고’ 하는 눈빛이다. 부산영화제 인기작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00000>는 내부적으로 구입하자고 만장일치를 본 작품인데도 경계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 작품, 우리가 원하는 건 알고 있지?”(조 오빠) “AFM에서 개봉 일정 등 좀더 구체적인 내역을 달라고 하네요.”(송 대리) “빨리 미팅 잡자. 근데 도대체 누가 또 나섰기에 우리가 사겠다는 데도 그러지?” “애니메이션 하는 이들은 다 사려고 하겠지.”(조 대표) “가도카와의 OOO에게 안부전화하면서 슬쩍 물어볼까?”(조 오빠) “그래도 되죠. 그런데 아주 싸게는 안 될걸요.”(송 대리) “그래도 10만달러불 이상 가겠어?” “충분히 갈 것 같은데요.”(조 대표) “찝찝하네. (딜을) 끝내고 (AFM에) 가는 게 좋을 텐데. 우리가 의사 밝혔는데 말없이 팔진 않겠지? 조 대표?” “내가 파는 사람이라면 마케팅 플랜을 중요하게 볼 것 같아요.”(조 대표) “그럼 조 대표가 (마케팅 플랜) 짜죠. 사긴 사야 하는데 좀 불안하네. <9중대>는?”(조 오빠) “그 영화는 왜요? 지난해 러시아에서 흥행 1위 작품이라죠.”(송 대리) “그런 거 믿으면 안 되지. 할리우드 전쟁영화도 힘든데.”(조 대표) “팔렸나 알아보지. 안 팔렸으면 AFM에서 미팅하자. (서류 뒤척이며) 이건 제니퍼 로페즈의 살사영화야. 토론토영화제에서 봤는데 헉~이야. 보지 않은 회사는 관심 가질 텐데. (서류 넘기며) <밀리언 달러 베이비> 프로듀서의 작품이네. 음, 배우가 맘에 안 들어. (또 서류 뒤척이며) 이번에 포커스피처스는 날 샜네. 리안만 체크하자. 리안은 이번에 포커스에서 소식없나?”(리안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놓친 게 올해 최대의 실수 아닌 실수였다.) “리안의 아시아 판권은 빌 콩(홍콩의 <와호장룡> 프로듀서)이 맡았대요. 포커스는 <9>을 추천하던데요. 팀 버튼이 프로듀서 맡은 거예요.”(송 대리)

회의 끝에 탐색 작품이 39편으로 좁혀졌다.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한다는 정보가 전부인 구스 반 산트의 신작 등 10편을 왕가위, 마이클 윈터보텀, 수오 마사유키의 작품보다 우선 구매 순위에 놓았다. 지난 봄 칸에서 마켓당 50만달러를 넘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70만달러어치를 구매했고, 구매는 않겠다며 날아간 토론토영화제에서 예정에 없던 두 작품을 사들인 이력이 있어 최대한 줄인 게 이 정도다.

조은운 대표 등이 ‘과다’ 구매를 말리는 건 실은 행복한 고민이다. 사고 싶은 영화를 누구보다 먼저 살 수 있고, 저쪽에서 부른 50만달러를 10만달러로, 5만달러를 1만달러로 조정해 합리적 가격에 살 수 있는 능력은 조 오빠의 핵심 자산이다. 2000년 칸영화제 마켓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아모레스 페로스>와 <어둠 속의 댄서>를 사고 싶어 어렵사리 미팅을 갖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노하우 부족으로 결국 구매에 실패했던 과거가 있다. 지금? 예컨대, 브래드 피트의 <바벨>을 놓고 영국 배급사 서밋과 오랜 신용으로 일찌감치 거래를 끝냈다. AFM을 앞두고 서밋은 이런 내막을 모르는 한국쪽의 미팅 요청이 35건이나 밀려들었다고 알려왔다.

궁합을 토대로 한 비즈니스 방식

조 오빠는 사람이든 회사든 궁합을 중시한다. 역술적 의미가 아니라 관계를 맺어가는 스타일과 취향의 의미다. 그와 궁합이 맞는 외국 영화사는 포커스피처스, 셀룰로이드 드림, 기타노 오피스 등이다. 셀룰로이드와의 신뢰는 ‘케네스 브래너의 <마술피리>는 어차피 살 거 아니냐. 이번 마켓에서 계약서 사인부터 해라, 가격은 나중에 원하는 수준에 맞춰주겠다’고 먼저 제안받거나 ‘하네케가 <퍼니게임>을 미국에서 리메이크하는데 나오미 왓츠가 나온단다’는 정보를 미리 받아 곧바로 계약을 맺는 데 이르렀다. 기타노 오피스와의 관계맺기를 보면 조 오빠의 비즈니스 방식을 알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를 놓고 어려운 영화인데 우리 영화라고 생각하고 개봉할 회사를 찾는다며 굳이 한국에 팔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돌스>는 단관 개봉할 작품이라고 설득해 2만달러에 사서 오버리지를 작게나마 보내줬더니(수익이 나서 일부를 보내주는) 그쪽에서 놀라워했어요. 그전에는 한국 수입사 중에 그런 곳이 없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자토이치> 완성 전에 10만달러를 부르기에 7만달러로 하자고 사인했는데 두달 뒤에 완성된 걸 보니까 얼마나 뿌듯하던지. 또 그 다음에는 ‘이번에는 감독하는 건 아니고 최양일이라는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건데 영화가 무겁고 재일동포 이야기라 잘 모르겠다’며 <피와 뼈> 시나리오를 줄 테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기에 시나리오 필요없다며 바로 사버렸죠. 어떻게 필름은커녕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사냐고 하는데 믿음이 가는 사람의 작품은 그냥 삽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세요. 보고 나서 좋으니까 사려고 하면 내가 아니어도 살 사람은 많지 않겠어요? 내가 의심하면 저쪽도 날 의심합니다.”

포커스와는 <나쁜 교육>과 <베니티 페어>를 시작으로 <인 굿 컴퍼니>(스폰지 최다 흥행작이다), <콘스탄트 가드너> <브로큰 플라워> <귀향> 등을 거래해왔다. 조 오빠는 이들 회사에 대해 자기가 구매의사를 밝힌 작품은 국내의 다른 어떤 곳에도 넘기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며칠 간격을 두고 수입과 배급에 관한 질문을 꺼낼 때마다, 조 오빠가 빠뜨리지 않고 반복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수입업자에 대해선 같은 영화인이 아니라 그저 ‘업자’ 취급을 하는 충무로 풍토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영화 제작사에 다니면 갓 일 시작한 막내조차 당당히 명함을 내밀며 무시하는 눈초리를 보냅니다. 수입업자는 무슨무슨 영화 수입한 누구라고 구차스럽게 소개하지 않으면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이건 한국영화의 높은 점유율이 반영된, 계급화된 풍경이에요. 컬렉터는 창작자와 다르지만 준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실체가 없는 상황에서 뭔가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게 일종의 창작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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