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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씨네21> 베스트 & 워스트 [1]
김현정 김도훈 2007-01-04

시상식의 계절이 돌아왔나 싶더니 벌써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 올해 최고의 영화, 최고의 감독, 최고의 배우, 최고의 작가…. 그러나 한번쯤은 2006년 가장 열심히 노가다를 뛰었던 캐릭터는 누구였는지, 최고의 사기꾼과 악당은 누구였는지, 다정했던 퀴어커플은 몇쌍이나 되었는지 뽑아보는 것도 괜찮은 정리방법일 것이다. 하다보면 엉망진창이라고 믿었던 영화에서 장점이 보이기도 하고, 미처 비웃지 못했던 약점이 보이기도 한다. 연말이라 모두가 바쁘다지만 바쁜 척을 해야만 하는 외로운 이들도 분명 있을 터, 특히 그분들에게 권한다. 2006년 몹시 주관적인 베스트 워스트 시상식을 개최해보기를.

더이상 갈 데가 없다, 궁극의 시한부

제주도라는 말에 혹하여 <연리지> 촬영현장 취재를 자청했던 <씨네21> 모 기자는 엄청난 비밀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너네 <연리지>가 어떤 영화인지 알아? <연리지>는 말이지… 시한부의 끝을 보여주는 영화야. 이제 더이상의 시한부는 없어!” 그랬다. 남녀 주인공이 모두 시한부라는데, 어떤 시한부 영화가 그 앞에 명함을 내밀겠는가. <씨네21> 기자들은 모두 한국영화가 사랑해 마지않던 시한부 떠나는 길을 슬퍼하는 척하며 꽃잎을 뿌려주려고 했지만, 어떤 시한부 영화가 그 앞에 명함을 내밀고 말았으니, 아까 그 모 기자가 또다시 제주도에 혹하여 촬영현장을 취재한 <각설탕>이었던 것이다. <연리지>가 시한부의 양적 확장을 시도했다면, 천둥이가 죽어가는 <각설탕>은 시한부의 종(種)적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니, 2007년엔 제발, 시한부여 안녕!

올해의 어머니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던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한국 어머니들. 이제 살림 좀 폈다 싶은데 한국영화는 예전 그대로죠? 못돼먹은데다가 지능과 감성은 15살 여드름쟁이 시절에 머물러 있는 무작스러운 조폭 아들놈(그리고 아들놈 친구, 혹은 아들놈 웬수) 위해 국밥 해서 멕이랴, 제발 그러고 살지 말라고 울고 불며 구슬리랴, 돌아오면 내 새끼 우짜냐며 꼬옥 안아주랴, 내 자식은 그런 놈일 리가 없다고 항변하랴. 이젠 쿨하게 사시고 싶으실 텐데 자꾸 애들처럼 보채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비열한 거리에서 해바라기 꺾는 열혈남아들 좋아하는 제작자, 감독님들께 항의문이라도 보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래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오오생하시이네. 아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어. 잠깐만….

최고 최악의 CG 효과

특수효과의 발전은 컴퓨터 천재들이 가내 수공업적 노가다로도 별들의 전쟁을 창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는 곧 본새 과시하기용 특수효과는 약발이 떨어지는 시대가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히려 특수효과를 숨기거나 미장센의 일부로 근사하게 사용한 영화들에 상찬을 내리는 것이 어떨까.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엄정화의 머리와 피아니스트의 몸을 이어붙여 관객을 감쪽같이 속였다. <뮤직 오브 하트>를 위해 8주 동안 두문불출 바이올린 연습만 했다는 메릴 스트립의 일화는 이제 전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샤말란의 <레이디 인 더 워터>는 거대한 독수리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을 수영장 물밑에서 바라본 시각으로 그려내며 특수효과에도 시적 서정성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최악의 특수효과는 싸구려 MTV 뮤직비디오용 특수효과로 필름을 떡칠한 <무극>. 장백지의 시간을 거스르는 탱탱한 얼굴을 위해 투여되었을 현대 의학의 발전이 훨씬 경이롭다.

올해의 궤변

2006년 가장 스케일이 컸던 궤변은 제작비 96억원의 <한반도>였다. 고종황제가 100년 전에 가짜 도장을 찍어 공문서를 위조했는데, 그걸 숨기는 게 아니라 증명해야 한다는 내용의 <한반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민재(조재현)가 말하기를, “11월17일(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여편네들에게 반말도 못해.” 한국사를 전공했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날을 절대 몰랐던 사람으로서는 민재가 그저 반말하기를 즐겨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님, 혹시 저를 만나신다면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그냥 말 까세요. 반면 같은 아는 척이라도 이 남자는 귀엽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대우(박용우)가 말하기를, “유치해서 유치원 다녔고, 좋아하는 시인 청마 유치환, 좋아하는 극작가 유치진…”. 혹은 아는 척을 못하면 어떤가.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이 말하기를, “그럼 태권도장 운전기사 하면 되겠네”. 이런 게 진짜 생활의 지혜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올해의 사이코

사이코가 <쏘우> 같은 공포영화 시리즈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정신병원 영화에서만 모습을 들이미는 것은 아니다. 사이코는 어디에나 있다. 회사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고 국회에는 많고, 다들 알다시피 백악관에는 사이코의 제왕이 한분 계시다. 그러나 올해 최강의 영화 속 사이코는 두명의 소담한 여인, <달콤, 살벌한 연인>의 미나(최강희)와 <웨딩 크래셔>의 글로리아(이슬라 피셔)에게 돌아가야 한다. 미나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는 인간을 죽였을 뿐”이라는 궤변을 귀엽게 늘어놓는 살인마 사이코. 그에 비하면 글로리아는 덜 위험하지만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탱탱한 남자를 파김치에 시래기가 되도록 밤마다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색정광 사이코인 탓이다. 빈스 본 같은 백인 건강남도 두손 두발 들게 만들었으니 한반도에 그녀를 견딜 자 없을 것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

김기덕 감독의 <괴물> 관련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2006년 작은 영화들은 소문내지 않고 착실한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메종 드 히미코>는 16일 만에 관객 3만명을 돌파했고, 이 기록은 금세 <유레루>에 추월당했다. 이 두 영화에는 오다기리 조가 출연했는데, 그가 <유레루>에 더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다들 눈치채버린 걸까? 다큐멘터리 <사이에서>도 3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송환>이 가지고 있던 다큐멘터리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현재 작지만 매운 고추 계열을 잇고 있는 영화는 관객 4만(확인 필요!!)을 넘기며 대량의 폐인을 생산하고 있는 <후회하지 않아>다. 매운맛 열풍을 타고 <후회하지 않아>도 장기흥행하기를 바랍니다.

영화인가, CF인가

CF라고 하여 모두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소화제나 숙취해소음료 CF를 보면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쁘지만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나면 “저거 CF 같아!”라며 투덜거리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을로>는 동해안 7번 국도 여행을 권장하는 관광청 CF일 거라는 의견이 절대 다수였지만 오래전 ㄱㄴ초콜릿 CF와 착시현상을 일으켰다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데이지> <마이애미 바이스>는 적금을 깨지 않고서야, 적금이 있다면 말이지만, 갈 수 없는 나라 네덜란드와 마이애미와 쿠바를 홍보해 많은 관객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특히 <데이지>는 감독판이 따로 있어 반드시 두번 봐야 하는 줄 알았던 순박한 관객을 분노케 했다고 한다(사실 그건 나다!). 녹차밭과 펜션 홍보 CF였던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그나마 서민적이었지만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동행도 없는 이에겐 진짜 필요없었다.

최고의 악역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는 똑똑하고 철저하고 프라다까지 입은 편집장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악당이다. 이런 편집장을 만났다면 8년 동안 기자를 하기는커녕 8일 만에 울면서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부하직원에게 출판되지도 않은 <해리 포터> 원고를 구해오라고 시키는 못된 편집장 엄마라면, 갖고 싶다. <배트맨>의 조커를 향한 경배인지 입이 찢어진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의 비달 대령은 절대 갖고 싶지 않은 아버지다. 오필리아의 갓난 동생, 딸이었다면 요람째 들어다 내버렸을 것이다. 밥그릇이 철로 되어 있어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 소문난 대한민국 공무원 일동은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괴물> 이후 너무 변변치 않아서 악당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집단으로 밀쳐졌다. 그리고 카타르 사태를 보니 그 밥그릇, 생각보다 허술할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사기꾼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까짓 거 액셀 한번 밟아봐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도 예술로 한번 살아보고. 그래서 저 이 사람, 고니가 타짜로 나선 거 아닙니까. 근데 세상에 껌 좀 씹는다는 타짜들. 참 많습디다. 전설적인 저의 사부님 평경장도 계시고요, 가슴으로 판 홀리는 정 마담도 있고요. 아, 어리버리 판돈 싹 쓸어가는 고광렬이도 있지요. 아귀놈은 제가 한방에 보냈슴다. 타짜. 이제는 정부가 육성해야 합니다. 제임스 본드인가 오공 본드인가 하는 놈은 영국 정부 돈으로 수천만달러짜리 판에도 끼던데 말이지요. 뭐라더라. 카지노 로얄이라든가? 우리 정부도 이제부터는 국민 GNP에 기여하는 타짜들을 좀 인정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하도 단속이 심해서 우리 신토불이 타짜들이 맥을 못 춥니다 그려. 이 판 떠나면 할 것도 없지라. 호스트바에서 아줌마들 술이나 따르다가 녹차밭에 궁궐 짓고 사는 눈먼 국민 여동생, 아니. 상속녀 재산이나 노려야재.”

올해의 의치

어떤 여배우가 성형수술을 했는지 치아교정을 했는지 지금도 가끔 논란이 되고 있지만, 치아가 인상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이론은 분명 사실이다. 2년간의 치아교정 끝에 얼굴형이 동그라미에서 세모꼴로, 아 물론 역삼각형으로, 바뀌는 과정을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의 변신 혹은 올해의 분장이 아닌, 올해의 의치인 것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임수정은 눈썹을 탈색하고 몸무게를 39kg으로 줄였지만 무엇보다 충격은 틀니였다. 이런, 틀니를 해도 예쁘잖아! 사실은 이것이 충격이었다…. <홀리데이>의 최민수는 금니를 넣었는데, 충격의 강도 면에선 분명 올해의 의치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도로 빼셨기를.

최고의 삽입곡

영화 <도마뱀> 시사회가 열렸던 극장 앞 쓰레기통 부근, 영화 <도마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대화만을 나누고 돌아왔었다. “저기, 이상한 노래가 자꾸 생각나.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다. 도마뱀~.” 그게 무슨 노래였는지 궁금해서 땅을 파보았더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80년대 TV애니메이션이 나왔기에 도로 땅에 묻어두었는데, <해변의 여인>의 문숙(고현정) 때문에 다시 삽을 들어야만 했다. 수풀을 헤쳐나가며 문숙도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도마뱀을 만나고 싶었던 걸까. 추억을 찾아 땅을 파게 만든 또 한편의 영화는 <라디오 스타>다. 최곤(박중훈)과 비슷한 세대의 관객은 향수에 젖어 언젠가 들어보았지 싶은 최곤의 히트곡 <비와 당신> 발굴작업을 시작했지만, 이 노래는 <라디오 스타>를 위해 새로 작곡된 것이었으므로, 문자 그대로 삽질에 그치고 말았다는 사연이다. 그나저나 KMDb가 정리한 <해변의 여인> 키워드 중에 ‘개똥철학’이 들어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