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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의 태반을 보습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보냈다. 학원 옆에는 주유소가 있어서 열린 창으로 기름 냄새가 스며들었다. 냄새 때문인지 문제지에 고개를 처박은 핏기없는 아이들 때문인지 교실에 들어가면 자주 멀미가 났다. 도대체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어 막막하던 때였다. 시험 대비용 문제지를 풀어주는 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도저도 생각하기 싫어서 틈날 때마다 잠을 잤다. 어떤 꿈에서는 낯선 도시를 헤맸다. 어떤 꿈에서는 깨고 나면 새까맣게 잊어버릴 소설을 썼다. 간혹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도 꿨다. 똑같은 문제를 계속 풀어주거나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쩔쩔매는 꿈이었다.
친구는 날마다 전화를 걸어와 실패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쏟았다.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문제를 풀라고 시켜놓은 틈에,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 말고 복도로 나와서, 자다 말고 일어나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사랑 때문에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다고
[내 인생의 영화] <밝은 미래> -소설가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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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씨를 사적으로 만나, 나와 관련한 쾌락의 요청을 충족시켜주기로 한다.” 허버트 백작부인은 이런 조건으로 네빌과 계약을 맺는다. 약속대로 백작의 영지를 열두장의 그림에 담던 중, 네빌은 자신이 이미 그린 곳에 자꾸 그림을 그릴 때에는 없었던 물건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원치 않는 변화에 불평을 하면서, 충실한 자연주의자답게 그는 새로 나타난 그 물건들을 제 그림 안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탈만 부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 같다며, 네빌의 그림들 속에 살인의 단서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물건들은 네빌의 살인을 말해주는 증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원의 살인사건에 애거서 크리스티와 같은 과학적 추리를 들이대는 것은 쓸데없는 일. 그림에 담긴 그 단서라는 것들의 기호적 성격은 그 인접성으로 사건을 증언하는 ‘지표’가 아니다. 그저 막연한 암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기호 아닌 기호다.
영화 전체를 통해
[진중권의 이매진] 화가의 죽음, 주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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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들면서 몇 가지 결심을 했었다. 꽤 많은 결심을 했던 것 같지만 기억나는 것은 이것저것 말고 하나만 하는 일관성있는 인간이 되겠다는 것과 유부남은 건드리지 않겠다, 술 마시고 취해서 옛날 애인에게 전화하지 않겠다, 이 세 가지 정도뿐이다. 가끔 휘청거리긴 하지만 일관성 면에서는 그럭저럭 본전치기는 한 것 같고 유부남 문제는, 필사의 각오로 건드리지 않았다기보다는 건드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유부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 나의 의지보다는 저도 모르게 나에게서 자신을 지키고 만 그들의 공이 컸다. <어깨너머의 연인>에서 수완(이미연)이 건드린 유부남만큼 섹시하고 단단한 몸매를 지닌 유능하며 부유한 유부남이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면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다 해도 별일 없었을 것이다. 원래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강제로 자제를 당하게 되는 법망이란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결의 중 3분의 2를 지켰으니 나는 결심을 잘 지키는 인간이라며 우쭐대고 싶지만 그러기
[냉정과 열정 사이] 술 마시고 남자한테 굳이 전화를 해야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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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가 엄마가 됐다. 정확히 말해 친엄마는 아니지만 하여간 어쩌다보니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유흥업소를 전전하다 병을 얻어 한 남자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 그녀는 졸지에 한 아이와 꽤 긴 동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고 무시하고 살지만, 혼자서 너무나 오랜 외로움을 견뎌왔던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된다. <열한번째 엄마>의 김혜수에게선 <타짜>의 요염한 모습도, <바람피기 좋은 날>의 생기발랄한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좋지 아니한가>의 철부지 이모의 연장선이라 할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누워 철지난 음악을 듣거나, 바람이 쐬고 싶으면 마당으로 나가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우는 것 정도다. 아이의 비상금을 뒤져 김밥과 떡볶이를 사다 먹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삶에 대해 무심하면 할수록 아이에 대한 사랑은 더 커져만 간다.
이처럼 김혜수가 누군가
[김혜수] 정 마담에서 마이 마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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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와 <인랜드 엠파이어>의 DVD가 출시됐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데이비드 린치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만들어진 두 DVD는 영화만큼 인상적이다. 크로넨버그와 린치를 한자리에서 거론하는 게 이젠 지겹겠지만, 한판 승부를 바란 듯 2주 간격으로 선보인 두 DVD의 비교를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지 싶다. 평소 무섭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크로넨버그에게 DVD는 그 이미지를 바꿀 좋은 기회다. 음산한 목소리로 난해한 이야기를 펼칠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영화 안팎을 자상하게 짚어주는 음성해설에서부터 놀라움은 시작된다. 영화의 배경 정보뿐만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펼치는 등, 관객을 향해 속내를 털어놓는 자세는 다른 거장의 음성해설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놀랍게도 린치와 그의 작품을 직접 언급하기도 하는데, 자기 영화는 린치의 아이러니한 영화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에서 대중을 향한 몸짓이 느껴진다. 기괴한 세계가 두려워
친절한 크로넨버그, 고집스런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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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게임의 대명사로 알려진 동명의 게임을 영화화한 <히트맨>. 원작 게임 팬들을 배려한 부분도 적지 않지만, 영화 <히트맨>은 게임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인 살벌한 폭력 연출과 냉철한 캐릭터 묘사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게임의 경우 킬러라는 직업의 특성을 살린 캐릭터 '에이전트 47'의 카리스마와 반사회적 소재라는 평을 받을 정도의 높은 폭력 수위로 유명했다. 그러나 영화는 악당이라기 보다는 단지 킬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가슴 따뜻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덕분에 무수한 총격전들은 기존 액션 영화와 구별되는 뚜렷한 개성을 가지지 못했다. 몇몇 장면들은 게임 팬들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들지만 오래 지속하는 힘이 부족하다.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를 찾는 관객에게 적당해 보인다.
김종철/ 익스트림무비(extmovie.com) 편집장
[전문가 100자평] <히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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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미국에서 돌아온 이명세 감독이 <형사 Duelist>를 준비하던 시점부터 <씨네21>이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할 일이 있을 때면 도맡아왔고, <형사…>와 <M>의 개봉 때는 그가 주장하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존중하며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전달 차원에서의 기획기사도 써왔다. 이미 <형사…>를 본 뒤 한번의 거리감을 경험했으며 올해 부산에서 <M>을 본 뒤 그 거리가 좁혀질 수 없는 것임을 확인했음에도 <M>에 관해 “이명세의 필치로 쓴 <율리시스> 혹은 <꿈의 해석>”이라며 비경쟁 영화제의 데일리에 걸맞도록 호감어린 20자평을 쓰고 별 셋을 적은 건 이 영화와 나의 감상 사이에 놓인 공감 때문이기보다 그동안 인터뷰와 현장 방문을 통해 이명세 감독을 만나고 또 그가 가진 열정적인 신념을 확인하면서 갖게 된 깊은 존경심 때문이었다. 이명세는 결코 그의 신념을 쉽게 꺾지 않을 것이다.
[전영객잔] 이미지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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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에 있는 장면이다. 성찬의 집에 방송사 PD와 VJ인 진수가 찾아와 요리대회가 열린다는 걸 알려주는 시퀀스인데, 성찬의 요리솜씨가 맨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손 대역을 하는 분이 있었지만, 강우씨는 야채를 빨리 썰거나 하는 장면들은 종종 직접 하곤 했다. 하지만 된장찌개나 밑반찬 등 직접 음식을 만드는 장면은 푸드스타일리스트들이 했다. 촬영이 끝나면 스탭들이 달려가 맛을 보곤 했는데, 나로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방금 찍은 피사체를 바로 입으로 느끼는 거니까. (웃음)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만들면 라면도 맛이 다르더라. 여러 음식들이 있었지만, 제일 인기가 있었던 음식은 3초 삼겹살이었다. 숯을 만드는 장면에 실제 등장하기도 하는데, 정말 지금까지 먹어본 삼겹살 중 가장 맛있었다. 푸드팀쪽에서 음식사진을 예쁘게 찍어달라는 주문이 잦았는데, 덕분에 다른 스탭들보다 먹을거리를 좀더 많이 챙겨주더라. (웃음)”
[숨은 스틸 찾기] <식객> 맛있는 영화의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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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피아프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았으며 미국에까지 그 이름을 널리 떨친 흔지 않은 가수다.” <뉴요커>는 ‘프렌치 블루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속 삶’이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라비앙 로즈>는 프랑스 국민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그린 전기영화다. 마리옹 코티아르가 피아프의 삶을 가슴 뭉클하게 연기하기는 했으나 128분의 러닝타임은 47살의 일기를, 열정적이고도 비극적이었던 한 예술가의 생을 낱낱이 펼쳐 보이기에 역부족이 아닐까. 영화 감상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피아프와 관련된 정보를 묶었다.
1. 이름, 에디트 피아프
피아프의 본명은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 어머니 아네타 조반나 밀라드에게서 미들네임을 물려받았다. 에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서 도망친 프랑스군을 도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영국 간호사, 에디트 카벨을 따라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35년 피아프를 데뷔시킨 카
[알고 봅시다] 노래와 사랑이 삶의 이유이자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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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연미라고 하고요, 9살이에요. 저기… 제가 나온 <검은 땅의 소녀와> 보셨어요? 저는요, 9번이나 봤어요. 어른들은 애들 보기엔 어렵다는데, 그냥 볼 때마다 너무 재밌었어요. 왜냐하면 영림이는 용감한 애니까. 특히 오빠 괴롭힌 닭을 때려주는 장면 있잖아요. 닭이 계속 도망가서 다리를 막 묶어놓고 한 건데 찍을 때요, 진짜 재밌었어요. 후후. 또 드라마랑 다르게 영화는 내 얼굴이 되게 크게 나오니까 기분이 좋아요. 감독님이랑 저랑 베니스영화제에도 갔잖아요. 외국에 처음 간 건데,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말로 사인해달라고 하니까 정말 신기했어요. 아, 연기를 어떻게 하게 됐냐고요? 원래 TV 보고 따라하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요, 드라마 <황금사과>에서 사투리 쓰는 배우를 찾는다는 얘길 언니한테 들었어요. 제가 원래는 대구 살았거든요. 오디션 보러 갔는데, 한번 울어보라고 해서 막 울었더니 작가님이랑 감독님이랑 제가 딱 맞는다고 하셨어요. 드라마 끝나니까
[유연미] 아주 특별한 아홉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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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에서 어린 선동열이 고깃집에 등장하는 장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관객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멍게 여드름 가득 얼굴에 붙인 이건주(26)를 보고 “선동열 감독과 닮았다”면서 그냥 웃는다면 10대. “아, 순돌이다!”라는 반가움이 튀어나온다면 그 이상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10여년 전까지 순돌이는 ‘국민 막동이’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방영된 장수 일요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을 기억하는지. 만물수리점을 운영하며 자칭 맥가이버라 여기는 임현식을 아버지로, 목청 높은 잔소리로 정을 과시하는 박원숙을 어머니로 뒀던 그 순돌이가 벌써 스물여섯이 됐다. “동선을 알았겠어요, 리액션을 알았겠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던 거죠. 자고 먹고 뛰어놀 나이에 카메라 앞에 섰는데요, 뭘. 그래도 신기하게 칭얼대고 울고불고하면서도 카메라 앞에 서면 잘했대요. 임현식, 박원숙 선생님이 그때 이야기하시면서 ‘넌 (연기) 오래 할 줄 알았다’고 하
[이건주] 다시 카메라 앞에 선 순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