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 작가 알레그라(엘리자베스 리저)는 정착에 대한 기피가 극심한 수준이다.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 믿는 그녀는 여자친구 사만다(줄리언 니콜슨)를 사랑하지만 관계가 심각해질 여지가 보일 때면 황급히 그것을 차단하곤 한다. 알레그라의 방식에 진이 빠진 사만다는 “난 레즈비언이 아니야!”라는 선언과 함께 떠나고, 상심한 알레그라는 방황하던 중 철학 교수 필립(저스틴 커크)에게 끌린다. 남자를 만나는 것에 대한 찜찜함에 두통을 앓던 중 그녀는 남자친구와 권태기에 빠져 있다는 그레이스(그레첸 몰)와도 관계를 맺게 되고, 필립과 그레이스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양다리를 유지한다. 관계의 곡예가 극에 달할 즈음, 알레그라는 필립과 그레이스가 오래된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고 혼비백산한다.
<푸치니 초급과정>은 미국 TV시리즈 <FBI 실종수사대>의 각본가로 더욱 잘 알려진 마리아 매겐티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95년 레즈비언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
우디 앨런 코미디와 <섹스 & 시티>의 감수성 <푸치니 초급과정>
-
에이미(김지선)는 미국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소녀다. 그녀는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외롭고 단조로운 일상을 버티며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트란(강태구)과 어울린다. 서툰 영어와 낯선 환경 탓에 또래 문화 안으로 쉽게 들어서지 못하는 둘은 언저리에서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시간을 지켜간다. 그 시간 속에서 소년과 소녀의 우정은 점차 사랑으로 변해가는데, 이 둘은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지에서 이제 막 시작된 불안정한 삶, 그 속에서 맞이한 정서적 요동, 이제 막 사랑에 눈떠 어찌할 바 모르는 서투른 슬픔이 두 청춘의 주변을 감싼다.
감독 자신의 십대 시절을 반영한 듯한 <방황의 날들>은 줄곧 하얗게 눈이 쌓인 푸르스름한 길 위에 존재한다. 에이미와 트란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카메라는 이들의 쓸쓸한 뒷모습과 막막한 앞모습에 갑갑할 정도로 밀착해서 함께 흔들리며 따라간다. 한인타운에서 감독이 직접 캐스팅한 비전문배우들은 마치 자신의 경험을
하얗게 눈이 쌓인 푸르스름한 길 <방황의 날들>
-
‘사쿠란’은 우리말로 착란이다. 시각과 청각에 ‘감각의 폭격’을 퍼부어 관객을 착란케 하는 한편, 뒤에 남은 미묘하고 쓰디쓴 공허함을 맛보게 하는 것은 현대 예술의 익숙한 미학이다. 하지만 니나가와 미카의 <사쿠란>은 이런 시청각적 화려함 뒤에 공허함을 넘어서는 다른 것을 병치시켰다. 몸을 파는 키요하(쓰치야 안나)는 70년대 한국 호스티스 멜로물의 여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는 억압을 ‘내면화’하기보다는 억압으로부터 ‘인생을 배운다’. <사쿠란>에서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남자 고객들이다.
키요하는 유곽인 요시와라로 팔려오던 여덟살 때부터 “망아지 같은” 성격이었다. 탈출할 때마다 매번 수행원 세이지에게 붙잡히던 그녀는, ‘담임 게이샤’인 쇼히의 설득에 넘어가 최고의 게이샤가 되기로 결심한다. 열일곱이 되어 데뷔하자 그녀는 당당한 자세와 요염한 자태로 뭇 남자들을 휘어잡는다. 눈부시고도 험난한 그녀의 일대기가 이어진다. 순수하게 생긴
일류 게이샤의 유곽탈출 비법 <사쿠란>
-
가족이란, 혈육이란 과연 무엇일까. <마이파더>는 지난 5월 개봉한 장진 감독의 <아들>, 개봉 준비 중인 <귀휴>와 같이 부모와 자식, 더 좁게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의문을 던지는 영화다. 자상한 양부모 아래 구김없이 자랐지만 입양아인 제임스 파커(대니얼 헤니)는 여전히 친부모를 찾고 싶어한다. 주한미군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파커는 부대 내에서 한방을 쓰는 카투사 신요셉(김인권)의 도움을 받아 TV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해 부모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리고 마침내 친부임을 자처하는 황남철(김영철)과 만나지만 놀랍게도 그는 살인을 저지른 죄로 감옥에 갇힌 사형수다. 파커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며 자주 감옥으로 걸음하고, 제대로 된 추억조차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조금씩 정이 싹튼다.
옥살이하는 남자 혹은 절절한 부성애를 그린다는 점에서 <아들> <귀휴>와 궤를 함께하지만 <마이파더>는 KB
과하지 않게 눈물샘 자극 <마이파더>
-
-
삶은 소설보다 멀리 있지 않다. 모든 문학의 보편적 주제가 삶의 지속성, 죽음의 필연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희극 아니면 비극, 소박하게 말해 사랑하거나 죽기다. 여기 숫자와 규칙으로 가득한 삶을 살던, 성실해서 슬플 정도로 평범한 남자 해롤드 크릭(윌 페렐)의 체크리스트를 보자. 관능없이 살던 그의 리스트엔 비극적 항목이 압도적이다. 그의 삶에는 어떠한 스토리도, 그럴듯한 발단 전개 위기 절정도 없다. 융통성없는 국세청 직원 해롤드 크릭은 그 이름에서 연상되듯 째깍대는 시계바늘처럼 규칙적으로 일상을 패턴화한다. 그런데 숫자와 계산에 둘러싸인 그의 삶에 어느 날 문득 낯선 목소리가 침입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주석을 다는 소설가의 내레이션이 그의 삶과 죽음을 예지하고 있는 것. 해롤드의 일상의 패턴은 이러한 낯선 문학적 목소리의 개입과 더불어 매력적인 아나키스트 파티셰인 안나 파스칼(매기 질렌홀)의 등장으로 동요된다. 차가운 시계처럼 돌아가던 그의 심장은, 안나 파스칼 앞에서 어
마음이 훈훈해지는 판타지 <스트레인지 댄 픽션>
-
애덤 샌들러에게 프랭크 카프라는 영원한 이상이자 강박이다. 이 남자는 미국 노동자 계급 남자들을 위한 이상적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직접 카프라를 인용하거나, 혹은 미국적 이상주의를 은은히 토로하는 영화들에 곧잘 출연해왔다. 낙관주의 하나로 사랑도 쟁취하고 성공도 거두는 미국 남자를 샌들러만큼 잘하는 배우도 드문데 심지어 샌들러의 신작 <척 앤 래리>는 무려 가짜 게이 커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성애적 교훈극이다.
“우리 영화의 무대는 고급 여피들의 세상인 뉴욕이 아니에요”라고 주장하듯 맨해튼으로 향하던 카메라가 브루클린으로 방향을 틀며 영화는 시작한다. 소방관 척(애덤 샌들러)과 래리(<Mr. 히치: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의 케빈 제임스)는 평생 죽마고우.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래리는 아이들을 연금수혜자로 지정하려 하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말에 고민한다. 뉴욕시가 동성커플에게도 결혼과 똑같은 권리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척과 래리는 온
애덤 샌들러의 게이 코미디 <척 앤 래리>
-
빌리 레이 감독의 <브리치>는 등장인물 대다수가 FBI 요원인데도, 첩보스릴러보다 ‘직업의 세계’나 ‘인간극장’에 가까운 야릇한 영화다. 영화는 이중간첩 행위로 미국 국가안보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미국 스파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FBI 간부 로버트 한센(크리스 쿠퍼)의 체포 직전 마지막 나날을 그린다. 25년 재직기간 중 무려 22년을 이중간첩으로 암약한 한센의 진짜 동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쉬운 짐작은 물론 돈이다. 가톨릭 신자인 그에겐 여섯명이나 되는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KGB로부터 받은 140만달러의 상당액은 인출 불가능한 계좌로 입금됐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미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를 교란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신념? 이건 본인이 노발대발할 추측이다. 한센은 바지 입은 여자를 미워하고 성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골수 보수주의자였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바로 그) ‘오푸스 데이’의 단원이었던 한센은 사무실을 가족
어느 FBI 이중간첩의 초상 <브리치>
-
<디스터비아>를 성공적인 대중영화로 만든 것은 스릴러적 완성도가 아니다. 그 흔한 반전 하나없이 직선주로를 달리는 플롯은 스릴러로서 큰 매력이 없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를 엮어가며 서스펜스를 직조하는 솜씨도 그리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 범인과 일전을 벌이는 장면은 구성상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데도 긴장감이 떨어진다. 마지막 1대1 대결은 주인공 못지않게 악당의 동선을 적절히 스케치해야 장르적 재미가 생기는데, 이 영화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만듦새가 결코 좋지 않았는데도 크게 히트하며 숱한 아류작을 낳았던 공포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가 성공했던 이유. <디스터비아>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스릴러에 수혈된 청춘영화적 에너지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충격을 받은 고교생 케일(샤이어 라버프)은 교사를 폭행해 90일간 가택 연금된다. 전자 발찌가 채워져 30m 밖으론 나갈 수 없게 된 신
스릴러에 수혈된 청춘영화적 에너지 <디스터비아>
-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소년들에게 대서양 너머는 모험의 땅이었다. 그곳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스릴은 물론이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넘쳐났다. 뿐만 아니라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도 가득했다. 동네 극장에서 조악한 피아노 연주곡을 배경으로 상영되던 흑백필름은 전쟁의 참혹함 대신 낭만을 일깨웠다. 미국 정부는 참전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미국 청년들이 연합군에 지원한 데에는 그러한 매혹이 있었을 것이다. 빚 때문에 가업으로 내려오던 목장을 잃고 주먹질을 일삼던 롤링스(제임스 프랭코)에게도 하늘을 나는 전투기의 모습은 매혹의 대상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의지와 함께 현실을 도피하고 싶던 롤링스는 프랑스로 건너가 비행전투단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새로운 모험에 안달하고 있는 또 다른 7명의 미국 소년들을 만난다.
미국 최초의 전투 비행단의 실화를 다룬 <라파예트>는 이 ‘비행소년’들의 성장담이다. 영화는 이들이 한명의 어른이자 전쟁의 영웅으로 자라는 과정
‘비행소년’들의 성장담 <라파예트>
-
참으로 꼬일 대로 꼬인 인생들이다. 두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동승한 서울에서 목포까지의 국도 여행길. 야산과 계곡, 들판과 모텔, 그럴듯한 보리밭과 바닷가가 차창 밖으로 하나씩 펼쳐진다. 그러나 세 여행자의 모티브는 이런 피크닉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차라리 ‘누아르’적이다.
은행 강도를 하다가 총을 맞은 철주(백수장)의 출혈은 갈수록 심해진다. 택시기사 상훈(조한철)은 그의 협박 때문에 차를 몰지만 안 그래도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도망자와 인질 사이의 외면적인 마찰음은 조만간 연민으로 발전한다. 그들이 치료차 국도변 모텔에 들르면서 창녀인 지수(선우선)가 합류한다. 곳곳에 삽입된 재기발랄한 에피소드들과 돈 가방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줄거리의 긴장을 유지시켜준다. 러닝타임과 함께 ‘하강하는 시간’은 서서히 지속한다. 서울과의 거리에 비례해서 분위기는 나른해지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죽음을 초탈하는 ‘편안한’ 정서가 세 주인공을 지배한다. 하지만 진짜
‘막장’에서 생겨나는 인간적 유대감 <오프로드>
-
떠돌이 무하마드(무하마드 라히모프)는 모스크바에서 도박으로 빚을 지고 우즈베키스탄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성공한 바이올린 연주가 행세를 하는 한편,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집을 팔고 도시로 떠나자고 사정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아들의 바이올린 케이스 속에 바이올린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할아버지 역시 손자의 거짓된 욕망을 말없이 꿰뚫어본 뒤다.
<괜찮아, 울지마>는 민병훈 감독의 <벌이 날다>(1998)와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 사이에 위치하는, ‘두려움에 관한 3부작’ 중 순서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벌이 날다>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검사라는 권력에 맞서는 가난한 교사의 이야기이고, <포도나무를 베어라>가 여인에 대한 사랑과 신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신학생의 이야기라면, <괜찮아, 울지마>는 끊임없는 거짓말로 두려움
‘두려움에 관한 3부작’ 중 두 번째작 <괜찮아, 울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