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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엔 감독의 <남색대문>(2002)은 정서적으로 한창 예민한 17살 세 청춘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그것이 첫사랑이든 짝사랑이 됐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잘 담아낸 청춘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요즘 제철인 아오리 사과가 떠올랐다. 초록색을 띠고 있어 시각적으로 여름과 잘 어울리는 과일이지만 사각거리는 식감과 풋풋한 향기를 갖고 있어 과일의 단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아오리 사과처럼 <남색대문>이 다른 청춘영화와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 설익은 풋풋한 사과처럼 서툴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여고생 멍커로우가 첫사랑의 감정을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느끼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스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것
영화
20년 만에 개봉한 대만 청춘영화 '남색대문'이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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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적 질감과 뇌와 정신의 여정이 한 스크린에서 동시에 펼쳐질 수 있을까? <자마>는 그런 망상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파괴와 망상
한 손에 검을 들고 머리엔 삼각모를 쓴 남자가 해안가 앞에 꼿꼿이 서 있다. 제국주의 개척자를 묘사한 회화의 한 장면처럼 조직된 프레임의 구도가 허물어지는 건 화면 바깥에서 정체 모를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다. 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옮긴 남자는 나체로 진흙 목욕을 하는 원주민들을 훔쳐보는데, 그의 시선은 금방 여인들에게 발각되고 도망치는 남자를 쫓아온 한 원주민 여인과 비루한 몸싸움을 벌이기에 이른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네 번째 장편영화 <자마>의 도입부는 익숙하게 여겨지는 풍경 위에 이질적인 세부를 덧칠한다. 위엄 있는 자세로 식민지 풍경을 주시하는 백인 남성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런 남자의 시선이 원주민들의 벗은 몸으로 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훔쳐보던 것을 들킨 남자가 옹졸한 자세로 몸을 숨기고 우
'자마'의 큐비즘적 화면 구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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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우리, 둘>은 니나(바르바라 수코바)와 마도(마틴 슈발리에)라는 두 인물을 단일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들이 함께일 때 비로소 성립된다면, 한쪽이 허물어질 때 다른 한쪽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 영화는 이를 질문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중요한 기제로 설정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두 인물이 한 아파트에서 좁은 복도를 사이로 맞은편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외견상 이들은 각자 독거노인이자 서로 막역한 이웃 사이쯤이지만, 실상 한 침대를 공유하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요컨대 이들은 분리와 결합이 혼거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을 토대로 범박하게 축약한다면, <우리, 둘>은 정주와 탈주의 가능성을 모두 지닌 이중적 장소로서의 집을 탐구하는 영화다. 물론 이 점은 본편이 퀴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모티프다. 퀴어에게 있어 스스로를 타인과 대면시킬 일차적인 방법으로 커밍아웃이 있다면, 이는 단어가 그대로 지시하듯
'우리, 둘'이 이동의 감각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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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언급한 원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번역서 <가윈 경과 녹색기사>(이동일 옮김)를 참고했다. 원작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데, 원작을 참고하는 것이 영화 속에 나온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상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결코 살해될 수 없는
아서왕(숀 해리스)과 원탁의 기사들이 모여 크리스마스 향연을 벌이던 날, 낯선 외양의 말 탄 기사가 성문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나무 형상의 기사는 다음 크리스마스 무렵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의 일격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일격을 가할 용기 있는 자가 있는지를 묻는다. 이 제안을 왕의 조카인 가웨인이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린 나이트>는 러닝타임 대부분을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가웨인(데브 파텔)의 여정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영화의 본질 역시 이 무모한 여정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견 온당해 보인다. 그러나 가웨인의 여정을 추동하는 힘은 어디까지나
'그린 나이트', 데이비드 로어리가 실사의 세계에 배양한 환상의 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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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나왔다. 평점이 좋을 수 있지만 사실 평론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즐거움 외엔 의미가 없기에 가치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굳이, 방구석 키보드워리어가 되어 쓸모없는 의미 부여를 해봤다. 제임스 건 감독도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
모두가 악당인 세상에서 영웅 (안)되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창의적으로 죽인다. 참 많이도 죽인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빛과 그림자는 단 두줄로 요약 가능하다. 창의적으로 죽이는 게 영화의 밝은 부분이라면 많이 죽여 지치게 만드는, 혹은 이제 정이 든다 싶으면 캐릭터를 가차 없이 탈락시키는 게 그림자다(물론 그림자에 열광하는 사람, 분명히 있다). 공으로 벽면 치기를 하고 있는 서번트(마이클 루커)가 어디선가 날아온 새를 공으로 맞혀 죽이는 첫 장면부터 제임스 건은 잔인하리만치 투명하게 영화의 목적지를 고백한다. 어떻게 하면 더 과감히, 더 창의적으로, 기발하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제임스 건이 캐릭터를 사랑(이라고 쓰고 집착이라고 읽는)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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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측 차량에 탄 한신성(김윤석)의 표정을 창밖에서 건조하게 비추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크레딧이 오른다. 여기서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여기서 끝내지 못하는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은 이야기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곳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주인공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자면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다음 선택에 생긴 변화를 보여주는 에필로그로 끝을 낸다. 주로 편견으로 가득 찬 인물이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시대극의 경우에는 시계를 현재로 돌리기도 한다. 예로 <국제시장>은 황정민을, <택시운전사>는 송강호를 분장까지 시켜가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모가디슈>의 ‘여기서 끝나는’ 엔딩과, 그렇지 않는 다른 엔딩을 두고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영화들에서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 엔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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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번째 장편영화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일을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16년 첫 번째 장편 <로우>로 관객에게 자기 이름만큼은 확연히 각인시켰을 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의 얘기다. 현재까지 언론을 통해 얼마간 알려진 수상작 <티탄>에 관한 정보는 어린 시절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알레시아가 괴기한 욕망에 따른 기행을 벌이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는 뱅상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는 것 정도다.
이 짤막한 정보만으로도 <티탄>에서는 뒤쿠르노의 전작과 같이 신체에 대한 과도한 탐닉과 변형, 훼손, 성 집착, 피칠갑의 향연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주인공이 자동차와 성적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며 휘발유로 수유한다는 SF 장르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함은 상상 이상일 것으로 판단되면서도, 전작 <로우>를 성장통에 관한 우화로 본 시선을 호기롭게 무력화는 데서 오는 통쾌함도 느낀다.
성장이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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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화들에 있는 두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몇년 동안 떠들고 다녔는데, 지겹지만 이번에도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이걸 빼먹으면 <블랙 위도우>라는 영화가 설명이 안된다. 하나는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멤버 구성이다. 이건 눈치 없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결과가 아니다. 마블 코믹북 유니버스에서 어벤져스가 이렇게 백인 남자로만 구성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건 심지어 마블의 기존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다. DC가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회사라면 마블은 늘 격변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회사로 알려졌다.
어벤져스가 얼마나 이상한 모양인지 알려면 역시 같은 회사에서 나왔고 코믹북에서는 같은 우주를 공유하며 심지어 몇년 일찍 나온 <엑스맨> 시리즈를 보면 된다. MCU를 만든 사람들은 그냥 눈치 없었던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혐오 행위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단물을 빼먹고 절대로 당연시
'블랙 위도우'로 블랙 위도우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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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엔딩을 되새기며, 서정시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서정의 영화에 대해 썼다.
재건과 복원의 딜레마
<피닉스>의 넬리(니나 호스)는 육체로 자신을 증명하며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얼굴을 감싼 붕대를 풀어 자신을 증명했던 넬리는 영화의 엔딩에서 팔에 새겨진 숫자로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한다. 넬리의 육체는 그 자체가 아우슈비츠를 증명한다. 아우슈비츠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이 육체적 증명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아우슈비츠를 생략하려 했던 전후 독일의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육체에 새겨진 아우슈비츠의 고집스러움은 그 흔적을 지우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도록 했음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를 생략하려 했던 역사, 그럼으로써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려 했던 시도
'피닉스'에서 보여준 페촐트의 역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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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벽화 속의 말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부한 욕망의 기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시각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쉽지만 장점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이하 <죽어도 좋은 경험>) 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원형(archetype)이라 할 수 있는 <하녀> (1960)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 물질의 화신인 남성 캐릭터의 세계로 그로테스크한 혼동의 여주인공이 침입하는 서사를 지녔다. 이른바 ‘악녀’와의 조우다. 하지만 <하녀>의 주인공이 ‘자본주의’라는 거대 유령과 싸웠던 것과 달리 이번 주인공은 처음부터 악이었거나 혹은 악의 영역으로 서서히 침범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와 다투고 있다.
연출자 김기영의 단호한 목소리
김기영의 남성주인공은 아무리 권위 있는 자라 해도 결코 정신의 영역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에서 인간의 극단적인 열망이 드러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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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의 초반부,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넬리(니나 호스)는 훼손된 얼굴을 복구하는 성형수술을 받고 머리에 붕대를 두른 채로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집으로 되돌아가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와 재회하는 꿈을 꾸던 넬리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그녀와 똑같이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환자복을 입은 여인이 반쯤 열린 문 앞에서 넬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음 장면에 잠에서 깨어난 넬리는 그녀를 지켜본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복도를 걸어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벽면에 여러 장의 사진이 걸려 있는 또 다른 작은 방이다. 그곳에서 넬리는 자신의 원래 얼굴이 찍힌 흑백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본다. 외견상으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다, 넬리를 지켜보고 사진이 걸린 방으로 이끄는 여인에 대해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장면은 꽤 기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별다른 전조나 예비도 없이 불쑥, 기원이 불분명한 영화적 분신(‘double’)이 각인되는 것이다. 나와
'피닉스'의 붉은 원피스와 검은 상의가 의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