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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2012)은 조작된 혈액과 세포로 다른 인간과 연결되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소재였으나 이야기가 겉도는 끝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느낌을 줬는데,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포제서>는 주제와 연출 면에서 훨씬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아버지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나 <엑지스턴스>(1999)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단계를 더 나아갔고, ‘왜 인간은 기계와 결합되기를 원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는 ‘인간과 기계는 어디까지 결합하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질문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현실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연결함과 동시에 갈라놓는다.
<비디오드롬>과 <엑지스턴스>에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해 진입하는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를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나란히 놓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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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무수한 거리들이 있다. 의도된 것과 인식되는 것 사이의 거리.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거리.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 느껴야 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 그 모든 거리의 거리의 거리에 관해.
아이, 게이 그리고 양
한국 멜로영화가 실종되었다는 표현은 분명 과장이다. 그렇다 해도 멜로영화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멜로의 위기는 장르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승리호>에 대해 ‘그래도 멜로로 빠지지는 않았다’며 긍정하는 반응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서사의 흐름 속 멜로는 피해야 할 클리셰로 인식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애 멜로에 한정된 이야기다.
논의의 초점을 퀴어 멜로에 맞추면 사정은 달라진다. 2016년은 한국 멜로영화를 이야기할 때 기억해야 할 해다. <아가씨> <연애담> 등 레즈비언 멜로와 함께 <아수라> 등 동성 군집 영화가 퀴어의 맥락에서 해석되
'정말 먼 곳'의 거리두기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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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매우 좋은 영화지만 할 말이 많은 영화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맑고 투명하며 정직해 보였고, 영화의 국적부터 의미까지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 탓도 있다. 하지만 막상 걸음을 떼고 보니, 내가 가진 언어의 역량으로 포획하기 힘든 장면들이 너무 많다. <스파이의 아내>를 비롯해 최근 부쩍 그런 영화들이 극장에 걸려 괴롭고, 행복하다.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어둠 속에서 덜거덕거리며 달리던 마차 소리가 들리다가 다음 순간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신기한 망각의 세계로 빠지고 만다. 그날 밤에 느꼈던 감정들은 너무도 생생해서 손만 뻗으면 어루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중략)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 소중한 과거를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윌라 캐더 저, <
'미나리'의 세 가지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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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복수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에 관한 글에서 한번 이야기했으니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추가하기로 하자. 하나, 일단 장르가 형성되면 작품이 이 틀에서 벗어나기가 극도로 힘들다는 것. 둘, 관객은 이 소재를 다룬 모든 영화를 장르의 틀 안에 넣어보게 된다는 것.
에메랄드 페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의 이야기를 맺는 후반부도 이 영화가 강간복수극이고 관객이 이 장르의 규칙 안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르가 고정된 상태에서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겨우 셋이다. 하나, 주인공은 앞에 선언한 복수에 성공한다. 둘,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다. 셋,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성공했다.
영화 후반의 서스펜스는 영화가 이들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지 관객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관객은 1번의 가능성이 사라진 뒤로는 3번이길 바라지만 2번일 가능성은 의외로 높다. 수많
'프라미싱 영 우먼'이 강간복수극 장르의 규칙 안에서 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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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하고 유려하다. 영화 <미나리>는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선 이민자 가족의 역경을 다룬다.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되지만 감성적으로는 만국어로 통역 가능할 보편적인 정서를 펼쳐낸다. 미국 제작 영화임에도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비영어권 언어가 준 이질감 탓이 크다. 이 영화가 폭넓은 감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고립된 인간들의 관계성에 주목한 점에 있는 듯하다. 교회와 병원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아칸소 시골의 이동식 주택에 한인 가족이 이주해 온다. 주위엔 마을이라 할 만한 공동체가 없다. 가족은 온전히 그들끼리 삶을 감당해야 한다. 물과 불은 자연이 주는 운명적 고난이며, 병약함과 노쇠는 인간적 가냘픔을 드러낸다.
병아리 감별이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물길을 내어 농장을 일구는 일상 속 곤란은 대부분 좁은 이동식 주택 내부 가족 사이의 미묘한 갈등으로 드러난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냉소적이지 않으며 그윽하고 깊다. 어
'미나리'의 탈국경적 영화 경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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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특별전에 젊은 관객이 꽤 많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라떼는 말이야’라고 빈정거리면서 우리 세대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절 우리를 매혹시켰던 왕가위 영화를 보겠다고 달려든다. 라떼는 말이야, 라며 코아아트홀에서 왕가위 영화 보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좋아하려나?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위한 연가
왕가위의 영화는 표면적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멜로드라마로 수렴된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단순히 멜로드라마라고 부른다면 그것만큼 그의 영화적 세계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사로만 본다면 왕가위는 멜로드라마에서 그 뼈대만 빌려온다. 좋게 말하면 과감한 생략으로 그 빈틈에 대한 해석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앙상하고 상투적이다 못해 구식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왕가위는 그 앙상함이 풍요롭게 보이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감독이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선풍기가 무기력하고 나른한 오후의
‘사랑에 대한 영화’라는 왕가위의 말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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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철>은 두 남자의 차 사고를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의 비밀도 들춰보는 서스펜스영화다. 그러나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처럼, 진실의 실체보다는 거기에 도착하는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전경들이 빛을 발한다. 봉준호의 서스펜스 뒤편에는 한국 사회의 뒤틀린 구조도가 펼쳐져 있다면, <빛과 철>의 후면에는 진실을 얻으려는 자가 관통해야 하는 엄중한 법칙이 버티고 있다. 진실에 다가서는 자와 그 주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종대 감독은 자신이 축조한 영화적 세계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영화는 묘한 영상으로 시작된다. 도로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이미 두대의 차가 파손된 사고 현장에 도착한다. 막 사고가 난 듯 열기가 가득한 현장.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로의 질료마저 감각할 수 있는, 현장의 생생한 현실감이다. 이 장면의 생생함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돋보
'빛과 철'의 냉혹한 성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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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클로드 카리에르에 대한 부고이자 그가 직간접적으로 흔적을 남긴 세편의 영화(<세브린느>(1967), <세브린느, 38년 후>(2006), <사랑을 카피하다>(2010))에 공명하는 제스처와 소리를 둘러싼 짧은 생각이다. 지나고 보니 미로처럼 만들어진 묘지를 헤쳐왔다는 인상이다. 카리에르에서 루이스 부뉴엘로, 부뉴엘로부터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로, 올리베이라에서 미셸 피콜리로, 다시 카리에르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로, 또다시….
종소리가 들리면 영화는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볼 뿐인 우리는 어떤 흔적을 가지고 시나리오작가에 접근할 수 있을까? 카메라에 붙잡힌 장면의 세부적 요소, 혹은 배우가 선보이는 강렬한 이미지와 대사, 그도 아니라면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의 구조와 형식에 대한 인상 같은 것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론한 요인들 가운데 어느 것도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각본가의 텍스트가 완
프랑스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죽음이 남긴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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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반란을 도모한다. 세 영화 속 세 인물이 마구 뒤섞이는 투쟁과 화해의 장으로 당신을 소환한다.
반동의 트라이앵글
남자들이 죽었다. 여자들의 만남이라는 ‘빛’ 뒤에는 남자들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거나(<아이>), 이미 죽은 상태이거나(<빛과 철>), 죽은 것과 다를바 없는 상태를 거쳐 죽임을 당한다(<고백>). 잠깐, 이러한 분석에는 수상한 데가 있다. 이미 죽었거나 죽임당하는 존재의 자리에는 주로 여성이 놓여왔다. 영화 속 여자들은 리얼리즘적 현실 반영이라는 조건 아래 이미 죽은 상태이거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거쳐 죽임당했다. 현실이 재현을 만드는지, 재현이 현실을 만드는지 혹은 재현이 그러한 현실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은 영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처럼 보였다.
이는 너무도 익숙해서 삭제된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읽어내지 않을 때는 쉽게
<아이> <빛과 철> <고백>이 남자를 죽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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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화면 안에 두 소녀가 밤길을 달리고 있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꼭 붙든 조금 더 큰 소녀의 몸짓은 불안하며, <세자매>를 열고 있는 이 밤은 불길하다.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내의 차림의 아이들이 차가운 겨울밤을 달려야 하는 상황적 배경이 밝을 리는 없다. 하지만 더 암담한 사실은 두 소녀가 언젠가 이 밤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설명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게다가 플래시백의 한 부분이라면, 이 밤 속으로 영화의 감정들이 고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매>의 서사를 복기한 결과가 아니다.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전개다. 영화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이 인물들의 현재와 동떨어져 기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 상태의 징후로서 기능하든 기원으로서 작동하든, 그것은 대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인력을 형성한다.
인물들의 온갖 기행을 나열하며 세상의 보편적인 감정에 기어코 다다르려 하는 이승원 감독 역시 인물들의
'세자매'가 감정을 분출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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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하면서 봤다. 아마도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가성비 영화일 것이다. 이만한 예산에 이만한 결과물을 뽑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집에서 보는 아쉬움을 삼키며 이 영화가 지닌 초월성에 대해 썼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말순이가 초월적으로 귀여웠다면 <승리호>의 꽃님이는 초월적으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순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네버랜드와 원더랜드 사이 어딘가에서
<승리호>를 싫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주를 무대로 한 영상의 완성도는 한국영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어나고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속도감은 경쾌하고 유려하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를 운항하는 승무원은 모자란 듯 꽉 차 알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참 쉽고 친절하며 착하다. 조성희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승리호>는 인간에 대한 믿음
'승리호'를 마냥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