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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월드는 기본적으로 ‘집’을 빼앗는 자와 되찾으려는 자의 싸움이다.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이 지닌 욕망의 궁극으로 그려진다. 이 세계의 입문작인 <아내의 유혹>(SBS)과 최근작인 <펜트하우스>(SBS)가 모두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한 상류층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김순옥 월드를 향한 뜨거운 반응의 핵심에는, 갈 데까지 간 막장의 재미보다 부동산공화국 한국의 욕망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순옥 월드의 3단 진화
김순옥 월드의 역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MBC), <황후의 품격>(SBS)이 각 시기의 출발점이다. <아내의 유혹>으로 시작된 김순옥 월드 1기가 복수 위주의 이야기라면, <왔다! 장보리> 이후는 기존 복수에 성공의 욕망이 더해지고, <황후의 품격>부터는 그 욕망의 서사가 블록버스
김순옥 월드의 종합판 '펜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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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유령의 영화’를 만든다면, 유령의 역량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유령은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을 돌려주는가. 페촐트의 ‘유령’이 진부한 비평적 수사로 소화되기 전에 그 부분을 질문해보고 싶다.
토킹 픽처 혹은 영화의 훼손과 치유
전후의 베를린을 무대로 삼은 <피닉스>에서 주인공인 유대인 넬리는 얼굴에 큰 화상 자국을 남기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다. 영화 초반부에 그녀는 성형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원래 얼굴을 되찾는 대신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다(영화는 넬리가 찍힌 흑백사진을 어렴풋이 제시하지만 그녀의 원래 얼굴은 결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넬리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얼굴로 남편 조니를 만나는데, 그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아내와 닮은 낯선 이로 착각한다.
수용소에서 넬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조니는 그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눈앞에 나타난 넬리에게 자신의 아내 역할을 요구하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로부터 넬리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멜로드라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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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 앤 뷰티풀> 개봉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수아 오종은 “성매매에 종사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의 판타즘을 건드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의 인터뷰어는 왜 하필 ‘욕망’과 연계되는지를 물었고, 이에 감독은 “섹스의 객체가 되는 것은 추정컨대 매우 분명한 무언가가 있는 경우다”라고 답했다. 한동안 나는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두 가지로 그의 대답을 이해했다. 먼저 감독이 설명하듯 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의 속성 중에는 분명 ‘수동성의 부류’라 언급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만 영화가 극단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몰두하기에 이해가 난해할 따름이다.
둘째로 섹슈얼리티 자체가 간접적인 목적으로서 이를테면 추상적 ‘자본의 영역’에 귀속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두 번째가 더 흔한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영앤 뷰티풀>의 캐릭터는 두 번째 추정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마린 백트가 연기하는 17살
프랑수아 오종의 '썸머 85'가 절망에 빠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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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이크 숏이 인상적인 영화 두편이 올해와 지난해 초 우리 곁을 찾았다. 한편은 위기에 빠진 극장의 구원투수가 될 임무를 안고 달렸고, 다른 한편은 OTT 플랫폼의 품에 무난히 안겼다. 지켜지고, 지속되길 바라는 외침이 가득한 롱테이크 속에서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버틴다.
눈에 비친 희박한 공기
<그녀의 조각들>의 롱테이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각들’이라 명시된 제목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조각들>은 롱테이크를 주된 형식으로 가져가기보다는 특정 장면에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왜 롱테이크로 보여주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롱테이크 시퀀스는 마사(바네사 커비)의 출산이다. 출산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담긴다. 가정 출산을 결심한 마사가 느끼는 산통, 예정된 조산사 바바라와의 어그러진 약속, 그를 대신한 다른 조산사 에바(몰리 파커)의 등장, 병원에서의 분만을 권하는 남편 숀(샤이아 러버프), 침실에서 진행된 분만과
영화 '그녀의 조각들' 눈에 비친 희박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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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켄트 감독의 <나이팅게일>에는 두개의 장르가 공존한다. 하나는 강간복수극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극이다. 강간복수극 이야기를 먼저 하자. 이름에 속한 두 단어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장르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강간당한다. 주인공은 강간범들을 한명씩 최대한 잔인하게 죽인다. 20세기 중후반 여성 주도 액션물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장르를 피할 수가 없다. 주연이 팸 그리어건 라켈 웰치건 가지 메이코건 여자주인공이 남자들을 살육하는 액션을 시작하는 동기로 거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강간이 등장했다. 이 리스트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가이드를 따라 챙겨보다보면 한 없이 길어질 수 있고, 그 리스트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킬 빌> 시리즈다. 현란한 액션과 재미에도 불구하고 <킬 빌> 시리즈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960, 70년대 선정영화의 정서에 지나치게 충실해 발전 없이 그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강간복수극과 서부극이 공존하는 '나이팅게일'이 택한 최소한의 윤리적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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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첫 영화로 무엇을 말할까 고심하다가 뒤늦게 이 영화를 만났다. 극장이 비어가는 가운데 변화하는 플랫폼 환경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이다. <스위트홈>을 비롯한 화제의 시리즈도 재미있게 봤고 이에 대한 할 말도 많지만 아무래도 2021년의 첫 시작은 이걸로 하고 싶다. 그러니까 하고픈 말은, (어쩌면 이미) 죽었지만 (아직, 아니 영원히) 죽지 않았습니다.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 했어요
우리는 마치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아니다. 이 글을 읽을 당신의 상황이 어떤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나는’이라고 수정해야겠다. 죽음은 지위 고하, 삶의 형태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찾아오는 거의 유일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동시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내게 죽음은 막연한 공포였다. 죽고 난 뒤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맨정신으로 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한번 잠이 들면 다시 깨지 못할 것 같아
영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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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부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는 택시 안에 있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구불구불한 곡선의 도로 위를 달리며 택시 기사와 흥주는 30년 전 흥주가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회고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1988년, 서울에서는 올림픽이 열렸고 청평사 근처에서 소라를 팔았던 노점상들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모두 철거를 당했노라고 택시 기사는 말한다. 택시 기사의 이 말은 부부를 인도하여 3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게 하는 발화점이다.
그때 은주는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뒤를 이어 정체불명의흰색 밴이 위협적으로 클랙슨을 울리더니 택시를 앞질러 간다. 외견상 피상적이고 우연한 이 도입부의 삽화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메아리를 되짚어가는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메타포이다. 소거당한 기억과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차를 돌려 되감기는 시간(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판본에는 택시가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개봉 버전에서는 삭제되었다), 사랑이
장우진이 '춘천, 춘천' '겨울밤에'에서 계절과 풍경을 관계의 우화로 조형하는 방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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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는 도시 모형을 설명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운디네>를 보며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나보다.
부서진 세계
어쩌면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역사와 신화, 현실과 가상, 정치와 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까? 아니, 그 경계를 넘나드는 정도가 아니라, 이 둘이 한몸이 되어 그 성격을 단선적으로 규정하기 힘든 ‘유령의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일 것이다. <트랜짓>에서도 그랬지만,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 신비한 세계를 펼쳐 보이면서도 그 신비한 매력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러울 정도다. 어쩌면 페촐트는 영화란 애초에 유령의 예술(또는 매체)이라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트랜짓>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운디네>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그리고 절실하다.
배신당한 베를린의 꿈
물의 정령인 신화 속 운디네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
'운디네', 신화를 경유해 베를린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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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으로 완벽한 구조 아래 차가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는 오슨 웰스의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시민 케인>과 유사하다.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시민 케인>은 완전하게 반(反)장르적인 작품이다. 케인이 여느 누아르의 인물처럼 몰락하는 부분에서 감정을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맹크>에서 MGM의 수장인 루이스 B. 메이어는 훗날 거장으로 성장할 조셉 맹키위츠에게 스튜디오의 세 가지 룰을 말하며 첫 번째로 ‘눈물을 이끄는 감정’을 꼽는다. 그는 감정이란 머리와 가슴과 성기에서 나온다고 몸짓하는데, 어떤 감정을 가져오더라도 케인을 품기란 힘들다. 차가운 이성으로 대하더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극중 유일하게 타인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별 장면에서도 그는 그녀가 아니라 자신을 더 보호하려고 애쓴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인물은 누아르 남자주인공의 성격과 정확하게 배치(背馳)된다.
그런
데이비드 핀처가 '맹크'에서 할리우드의 비극을 재연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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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민을 자아내던 불쌍한 캐릭터들의 자리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몇편의 스릴러영화를 복기하며 이에 관해 생각하려 했다.
한 사람의 싱크로나이즈
최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영화 두편이 나란히 관객을 만났다. 아니시 차간티 감독의 <런>(2002)과 이충현 감독의 <콜>(2020)은 두 여성 캐릭터의 폐쇄적인 관계가 중심이 된다는 점, 서사적으로 관계의 전환 과정이 촘촘히 짜여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두 영화는 비교적 일찍 기억에서 희미해진 다른 영화를 상기시킨다. 조슬예 감독의 <디바>(2020)는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인 영화는 아니나 적어도 비평적으로 아무런 언급도 나오지 않는 것은 가혹하다. 세 영화는 공통적으로 배우의 연기로 호평받았다. 특히 영화에서 ‘악역’을 담당한 신민아와 전종서, 사라 폴슨의 연기가 주목받았다. 이들이 연기한 캐릭터는 장르영화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런' '콜' 그리고 '디바' 좋은 여성 캐릭터를 향한 욕망은 장르와 어떻게 소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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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냐. 왜 하냐. 왜 사냐. 자주 되뇌는 질문이지만 사실 대부분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굳이 원인을 고르고 답을 찾으려는 건 그저 강박일까. <맹크>를 보다 마지막 한 장면에 위로받았다. 자기를 크레딧에 올려달라는 맹크의 말에 분노한 오슨 웰스가 박스를 집어던져 부수자 맹크는 영감을 받은 듯 메모한다. “수잔이 케인을 떠날 때 그걸 넣어야겠군. 충동적인 폭력.” 내내 그것만 생각하게 되는 것. 뭔가를 ‘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가지 않은 길로 덮어쓰기
<힐빌리의 노래>와 <맹크>를 연달아 보며 문득 이란성쌍둥이 같다고 느꼈다.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영화는 필연적으로 비교당하는 운명을 타고난다. 론 하워드와 데이비드 핀처의 스타일을 논하자면 백만 광년 정도 차이가 있으니 사실 두 영화가 닮았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발언이다.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조건, 관객과 만나는 방식, 무엇보다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형식이 두 영화를 자꾸만 겹쳐 보이
'힐빌리의 노래'와 '맹크', 플래시백의 쓸모와 가능성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