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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중국영화는 지아장커에 멈춰 있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동안 보지않던 중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먼 훗날 우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등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영화가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잃고 있음을 깨달았다. 멜로드라마적 각성.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기
2018년 중국에서 개봉한 <먼 훗날 우리>를 넷플릭스를 통해 뒤늦게 관람하면서 20여년 전 <8월의 크리스마스> <박하사탕> <파이란> 등 한국 멜로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먼 훗날 우리>는 지금 한국영화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정서와 문제의식이 지금의 중국에는 현재의 것으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 되돌릴 수 없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눈물짓는 멜로드라마의 인물들은 어느덧 한국영화에서 사라져버렸다.
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가 불러일으킨 반성적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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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클래식한 이탈리아 모던시네마의 한 사례로 받아들일 것이다. 누군가는 영화 이미지와 필름의 물질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기묘한 사례로 받아들일 것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생각을 떠올려봤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는 “국가의 환상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개인의 꿈은 둘로 서 있는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고다르의 견해는 하나의 원리로 작동되기를 바라는 세계 자본주의와 국가, 그리고 그 안에서 둘 이상의 이미지를 결합하며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를 향하고 있다. ‘세계화’란 결국 그런 것이다. 단일한 원리로 통합되는 국가란 개인들의 차이가 각인되지 않는 세계, 낯선 결합을 일으키지 못하는 세계, 그러므로 영화-이미지가 없는 세계를 구축한다. 노년의 고다르가 쇠약한 육체와 목소리로 “지구는 병들어 있다”(<이미지 북>)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은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른다. 질병을 앓는 상태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
'마틴 에덴'이 영화 이미지와 필름의 물질성에 대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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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의정 감독이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의도적으로 인용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다리를 저는 창복(유재명)과 어수룩하고 무기력한 태인(유아인)을 보자마자 이청준이 내가 태어날 무렵에 쓴 소설을 떠올렸다. 이청준이 은유적으로 쓴 제목을 그들은 육체에 그대로 뒤집어쓴 채로 스크린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청준의 인물이 지식인으로서 과거의 정신적 상처를 고도의 지적인 행위를 빌려 드러내고 치유하려고 애쓰는 것과 비교해, 과거의 역사를 육체 위로 새겨둔 창복과 태인은 현실의 굴레 아래 사는 노동자다. 홍의정이 각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데뷔작에서 눈길을 준 대상은 수십 년 전, 혹은 현재의 지식인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매일 매일 살려고 버티는 하층민이다.
창복과 태인은 범죄자이면서 노동자다. <소리도 없이>에서 범죄는 분업화돼 실행된다. 머리를 짜 기획하는 자가 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있으며, 성과의
'소리도 없이'의 선택 없는 결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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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기보다는 다양한 영화 클립으로 채워진 아카이브 영화 관람기 혹은 비평을 위한 사전 작업의 흔적에 가깝다.
클로즈업과 목소리의 영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마크 커즌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여성, 영화사>(2019)이다. 장장 840분에 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재료 삼아 40여개의 주제를 탐구한 로드무비다. ‘영화사’라는 제목과 840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1997)를 연상시킨다. 영화사를 쓰는 동시에 해체하는 고다르의 작품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날 법한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고다르식 영화사와 달리 커즌스는 명확한 규칙성을 지닌 채 개별 영화를 공들여 소개하는 쪽에 가깝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일단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여성, 영화사' 조각난 영화를 체험하는 일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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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노우즈 왓>은 할리(아리엘 홈스)와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서로를 보듬고 입을 맞추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그 위에 할리의 울음소리를 얹으며 상황을 전복시킨다. 이어지는 신에서 일리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할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할리는 그런 일리야 곁을 맴돌며 용서를 구한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벌써 죽었겠다!” 자신이 죽으면 용서하겠냐는 할리의 말을 무기 삼아 일리야는 결국 할리가 손목을 긋게 만든다. 여기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영화가 처음 보여준 둘의 애틋함은 환상이었나? 할리는 왜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사랑을 증명하려 하나? 손목을 치료하고 나온 할리는 옷을 꿰매야 한다는 일리야의 말에 아둔한 손짓으로 바늘에 실을 꿰려 애쓴다. 저렇게까지 헌신하는 이유가 뭘까.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답을 이야기하고,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의문을 품은 채 할리를 따라가게 된다.
질주보다 방랑에 가까운
사프디 형제의 2014년작 <
사프디 형제의 '헤븐 노우즈 왓'이 결핍과 욕망을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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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이정현)는 지나치게 완벽해 거의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던 남편 만길(김성오)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해 흥신소 소장 닥터 장(양동근)에게 뒷조사를 의뢰한다. 조사 결과를 보니 만길은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희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더 알고 봤더니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 언브레이커블 집단의 일원이다. 소희는 어쩌다 만난 고등학교 동창 세라(서영희), 양선(이미도)과 반격에 나선다. 하지만 이름값 하는 남편은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다.
신정원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신정원 감독의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쌈마이 영화다. 처음부터 대놓고 유치하려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유치하다고 지적하는 건 비난이나 욕이 되지 못한다. <점쟁이들>이 나왔던 2012년 이후 신정원의 신작을 기다렸던 관객도 ‘웰메이드’ 어쩌고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신정원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뭔가? 유치함은 아니다. 유치해도 되지만 꼭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이 재미있는 코미디영화 그 이상이 되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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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PC방과 노래방 업주들이 팀을 짜서 찾아온다. 코로나19로 영업이 금지된 이후부터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을 생각하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버틴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제게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관료제는 그렇게도 도망칠 구멍을 잘도 만들어주었다. 나의 시간은 그들의 고통과 무관하게 재깍재깍 잘도 흘러간다. 그런데 그 고통을 마주한 채 이렇게 별 탈 없이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그렇게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
연루의 세계
익히 알려져 있듯이,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삼부작’은 프랑스 국기에 표현된 프랑스 대혁명의 세 가지 가치,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그 가치를 이상화하기보다는 그 실현을 가로막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 삼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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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절제한 비행(卑行)으로 발목이 부러진 혼혈소녀 슈안은 어머니의 아파트에 감금된다. 속절없는 억류에 따분해진 그는 무작위로 번호를 골라 장난 전화를 건다. “당신의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요.” 슈안이 꾸민 스토리는 소설가 주울분에게 도달한다. 그러나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슈안이 알려준 주소지에서 울분을 맞이하는 사람은 낯선 청년이다. 이 청년은 울분을 자극하여 식어버린 창작의 열정을 부활시킨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전화, 성명불상의 청년은 영화의 초입에 등장했다가 울분의 백일몽으로 처리되었던 상황과 기이하게 연결된다. 그 꿈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경찰차, 도박장에서의 총격전, 사이렌 소리에 이끌린 사진가에 관한 이미지로 구성 되었다. 울분은 매너리즘에 빠진 결혼 생활과 일상에 침투한 파편적인 사건을 조합하여 소설의 스토리를 만든다. 소설의
제목은 ‘결혼실록’. 나른해진 부부 관계를 자극하는 한통의 장난 전화가 파문을 일으켜 비극적 결말로 치달아가는, 일본 추리소설풍의 이야기다. 인과
'공포분자'의 공포분자들과 종결될 수 없는 해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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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나선 감희(김민희)는 잠시 골목에 멈춰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걸어왔던 건물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장면에서 아무도 없는 극장 내부로 들어서면 그녀가 바로 직전에 보고 들었던 흑백영화의 한 장면과 음악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기묘하게도 이번엔 흑백이 아니라 컬러의 형태로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다. 카메라는 영화를 보는 감희의 눈빛으로부터 천천히 움직여 파도가 이는 바다의 풍경이 가득 채워진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이것이 <도망친 여자>의 마지막 두 장면이다.
홍상수 영화의 결말에서 골목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들의 걸음을 포착하거나,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인물의 눈짓을 담아내는 것은 그다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감희는 그런 익숙한 몸짓들 사이를 생경하게 오가며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는 낯선 행동을 취한다. 감희는 영화를 보러 돌아온 걸까, 아니면 극장 바깥으로부터 도망친 걸까. 그녀가 보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과 다르다… '도망친 여자'가 멈추는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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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영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회자되고, 다른 영화는 그렇지 않을까. <하워즈 엔드>를 보면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중간의 기원
코로나19로 개봉작이 줄면서 재개봉작과 뒤늦은 개봉작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 몇몇 작품의 개봉은 관객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뤄졌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2011)와 <워터 릴리스>(2007)의 뒤늦은 개봉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후 감독을 향한 관심을 반영한다. 때로는 감독이나 배우가, 때로는 계절이나 영화를 둘러싼 상황이 특정 작품을 소환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하워즈 엔드>(1992)의 재개봉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각색자인 제임스 아이보리의 전작으로 주목이 이어진 결과다. 앞서 개봉한 <모리스>(1987)가 동성의 사랑을 다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분명한 연결점
'하워즈 엔드', 시대를 뛰어넘는 영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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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의 영화 <경주>(2014)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최현(박해일)의 ‘자살’을 목격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주변에 물으니 아무도 그런 장면을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수풀에 가려진 물결의 소리 너머로, 마른 강물로 뛰어드는 최현의 뒷모습을 분명 느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 <후쿠오카>(2019)를 보고 나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같이 본 친구에게 “소담 역할은 육체가 있는 귀신이야”라고 말했는데,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장률의 최근작을 말하기 위해서 ‘모호함’ 자체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있어 <후쿠오카>는 추상적인 내용을,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영화였다.
두 남자와 이상한 여자
기묘한 에피소드가 영화에 차례로 등장한다. 첫째, 해효(권해효)가 농아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만난 소담은 그를 보자마자“말할 것
장률 신작 '후쿠오카'가 추상적인 내용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