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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갓을 벗고 서양에서 들어온 문제의 천조각을 머리에 동여맸다. 써보니 관모보다 더 위엄이 느껴졌다. 발견을 스스로 기특해하며 관리는 천조각에 이름을 하사하였다. 아니 불. 높을 아. 놈 자. 이름하여 ‘불아자’.
사실 그건 브래지어였다. 2세기 전만 해도 서양인을 도깨비 취급하던 조선이었으니, 브래지어를 서양식 갓으로 착각하고 ‘뽕’의 개수를 지위의 높낮이로 해석한다 한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문물검역소>는 이처럼 서역만리 신문물을 처음 접하는 조선 관리의 좌충우돌 검역기를 다룬 소설이다. 과거시험을 망쳐 제주로 발령난 선비 함복배는 ‘신문물검역소’에서 신(新)문물의 쓰임새를 밝히는 임무를 맡는다. 여기에 난파한 배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인 벨테부레(조선 이름 박연)가 합류해 큰 도움을 준다. 치설(칫솔)을 치질 치료제로, 곤도미(콘돔)를 골무로 착각하는 민망하고도 우스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결혼을 앞둔 제주 처녀들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도서] 나는 불아자를, 너는 곤도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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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이민자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으로 삶의 뿌리를 옮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렇다. 옮겨심기 좋게 뿌리를 내리지 않고 살아남는 데 익숙하다.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면 사랑, 일, 주거, 가족의 문제에서 우리는 어찌나 ‘기꺼이’ 부유하는지. 줌파 라히리의 소설이 마음을 움직이는 대상이 단순히 인도계 미국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다. 미국 이민 2세대의 이야기를 주로 쓰는 줌파 라히리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야만 굴러가는 가족의 비밀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본국의 가치를 버리지 못한 부모 세대와의 갈등으로 비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이민의 문제와 관계없이 어느 집에서나 맞딱뜨리는 문제들. <그저 좋은 사람>에 실린 한 단편 제목처럼 ‘지옥-천국’인 한 처마 밑에서 너무 오래 서로를 알아왔던 인간들의 이야기.
이 책에 실린 몇몇 단편을 처음 읽었던 몇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때보다 지금의 감흥이 더 깊은 건 내가 그만큼의 시간을 더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 젖은 눈빛으로 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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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SF 장르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 뭐였습니까? 한국 SF소설 팬들의 대답은 비슷비슷할 거다. 대부분의 SF팬들이 90년대 초반 처음으로 출간되기 시작한 장르의 고전들로 SF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와 함께 SF계의 ‘빅스리’(Big3)로 불리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은 국내에 정식으로 계약되지 않은 채 세번이나 불법 출간된, 이 장르의 클래식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원에서 90년대 초 출간된 판본으로 이 책을 접했다. 알고보니 이번에 출간된 <여름으로 가는 문>이 국내에서 처음 발간되는 정식 한국어판 완역본이란다. 일본어 중역본의 압축본을 오리지널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장르팬이라면 다시 구입하는 게 거장에 대한 도리다.
SF장르의 팬이 아니라도 <여름으로 가는 문>은 아무런 부담이 없는 책이다. 궤변과 하드SF적 설정이 많아진 후기 하인라인의 작품과 달리 <여름으로 가는 문&g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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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삶도 그렇지만 이 이야기도, 행복한 결말을 맺으려면 말이다, 아가, 희생이 필요해. 즉 누군가의 불행 말이다. 절대 잊지 마라. 한 가지 행복마다 두 가지 불행이 생겨난단다.” 상상 속 이야기에서조차 비극만이 가능한 이곳은 ‘아프가니스탄 어느 곳, 아니면 다른 곳’이다. 마치 적막한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듯 작은 방이 먼저 보여진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녀는 그의 아내이고, 그들에게는 두딸이 있다. 그녀는 연주를 굴리며 신의 이름을 암송하며 남편이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돌덩이처럼 꼼짝 않는 남편, 집 밖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폭격 소리. 여자는 신의 이름 대신 다른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한다. 시아버지가 말했던 ‘인내의 돌’ 이야기가 생각나서다. ‘인내의 돌’, 그 돌을 앞에 놓고 그 앞에서 모든 불행, 모든 괴로움, 모든 고통, 모든 비참한 이야기 이런 걸 다 탄식하며 털어놓으면 된다. 어느 날 그 돌은 비밀을
[도서] 버릴 수 없는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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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무라카미 하루키 관련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신기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맥주, 스파게티, 야구, 재즈를 좋아한다는 것. 한 작가를 좋아하기 이전에 비슷한 취향으로 묶여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루키의 장점이다. 그는 취향을 매력적으로 전시하는 방법을 알고, 그로부터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반면 ‘과잉된 스타일로 옅은 깊이를 감추려 한다’는 비판도 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루키 문학을 얘기할 때 이와 같은 ‘깊이 논란’은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5년 만에 출간된 하루키의 <1Q84>는 이러한 논란을 어느 정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984년의 평행 세계인 ‘1Q84’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제목만 봐서는 <해변의 카프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환상성을 기대하기 쉽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그 어느 때보다 리얼리티가 풍부하고 문학적 깊이가 느껴진다. 여자
[도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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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원작 소설. 안으로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견제와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에 맞서 치열한 삶을 삶았던 명성황후. 긴박한 정치상황 속에서 결국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된 불우한 조선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여기까지다. 여기에 작가는 명성황후의 호위무사, 이무명을 새롭게 등장시킨다. 작가의 말에 설명되어 있듯이 “황후의 삶은 고단하고 치열했다. 그녀의 옆에 조그만 위로라도 될 만한 무엇을 배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평생을 바쳐 그녀를 사랑한 한 남자다”.
이야기는 흑귀로 불리는 무명이란 사내가 중전 간택을 40여일 앞둔 최종후보에 선발된 소녀 민자영을 감고당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한다. 첫눈에 둘은 서로를 마음속에 품는다. 민자영이 왕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간 지 만 2년 뒤, 무명은 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 같은 곳인 용호영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그날까지 아무도 모르게
[도서] 조선의 마지막 황후와 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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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평평한 땅만이 펼쳐져 있다. (중략) 이 평원 위에 목욕탕 굴뚝이나 튼실한 창고 몇 개, 그리고 두꺼운 철제 문으로 보호된 단단한 건물 몇 개가 엄지손가락처럼 솟아나 있다.” 종전 직후 도쿄의 주재기자였던 러셀 브라인스의 글은 당시 일본의 겉모습만 묘사한 것은 아니었다. ‘교다쓰’(허탈)라는 단어가 <전후 신조어 해설>이라는 소사전에 특별히 등재될 정도로 일본인의 내면 역시 극도로 황폐해졌다. 전후 일본사 전문가인 존 다우어가 쓴 <패배를 껴안고>는 패전 직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통해 일본이 어떻게 패전 직후를 헤쳐왔는지 보여준다. 이 논픽션으로 다우어는 1999년에 전미도서상을, 2000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책을 펴들기만 해도 손목이 시큰할 정도의 판형과 두께(주석 포함 860여쪽)가 위압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다우어는 압도적인 자료를 동원해 유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구체적이다. “견디기
[도서] 일본식으로 패전 극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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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이하 <그리고 좀비>)의 첫 문장은 어떤지 한번 보자. “한번 뇌를 먹어본 좀비가 더 많은 뇌를 원하게 된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책 제목과 도발적인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좀비>는 오스틴 특유의 클래식한 연애소설에 좀비와 닌자 등의 하위문화를 토핑한 코믹소설이다. 역병이 창궐해 좀비들이 들끓는 19세기 영국, 홍차와 수다를 즐기고 사랑의 완성을 꿈꾸던 베넷가의 숙녀들은 어깨엔 머스킷총을, 가슴엔 좀비를 위한 단도를 품은 여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전세계 여성들의 영원한 우상 미스터 다아시는 위대한 좀비 헌터로 등장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건 그저 제인 오스틴과 등장인물의 이름을 빌린 완전히 다른 종류의 좀비 소설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다아시가 좀비 헌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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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지만, 노골적인 제목을 단 책의 저자는 출세하려면 본적부터 파야 한다는 위협을 먹고 자란 전라도 깽깽이가 아니다. “전라도 사람이란 빨갱이랑 일본 놈 다음으로 나쁜 피를 받은 종족”이라는 유년 시절의 확신은 비교적 뚜렷했고, 무엇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자처했던 그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자신이 응원했던 팀의 욱일승천 기세를 빼앗은 뒤 몰락을 걷게 만든 천적이었다. ‘빨갱이에 대통령병 환자’라는 낙인이 찍힌 김대중의 행보와 ‘해도 해도 너무하는’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행진. 그는 무엇하러 깽깽이들만의 아이콘을 “최강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가장 약한 영웅을 추억한다”는 치사와 함께 불러들인 것일까.
‘꺾인 현실의 날개’였던 김대중과 ‘날아오르는 희열’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20년이 교차하는 동안(흥미롭게도 두 호남 아이콘의 흥망 곡선은 마술처럼 정반대다. 역시나 ‘선상님’이 떠나신 2009년, ‘호랭이들’이 다시 뛰고 있다) 저자가 정작 들춰보
[도서] 뜨겁게 부르는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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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를 업어다 기른 지 1년이다. 고양이를 기르다보니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길고양이들과 매일매일 마주친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 한 지역에 머물며 살아간다. 덕분에 고양이 사료를 매일매일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며칠 전에 본 길고양이가 나타나면 사료 한줌이나마 바닥에 뿌린 뒤 잘 살아가라고 빌어준다.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시인이자 여행작가인 이용한이 1년간 사진과 글로 기록한 동네 길고양이들의 이야기다. 겨울로부터 막을 올린 책은 겨울을 마지막 장으로 끝난다. 어떤 고양이는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어떤 고양이는 자동차에 깔려 죽는다. 어떤 고양이는 그냥 사라진다. 이용한의 글은 감상적이지 않다. 그는 서서히 고양이들과 친구가 된 뒤 담담하게 그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양이책을 보며 우는 남자라니 너무 초식남스럽다고? 이 책을 읽고나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두고보자). 고양이 애호가라면
[도서] 아아, 길냥이가 애틋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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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을 즈려밟는 거대 괴수도, 한순간에 모든 걸 끝내버리는 핵무기도 아니다. 대신 어떤 물리법칙에도 영향받지 않고, 총탄도 레이저포도 통하지 않는 지름 2m 정도의 구, 완벽하게 둥글고 새까만 구가 시속 4km로, 아주 천천히 다가와 인간을 흡수한다. 세계 멸망의 전주곡이라기엔 좀 완만하지만, 그 완만함 때문에 더욱 소름이 끼친다.
1억원 고료의 제1회 멀티문학상을 거머쥔 장편소설 <절망의 구>는 어둡고 날카로운 상징들로 가득하다. <양말 줍는 소년> <오후 다섯시의 외계인>에서 동화 같은 감성을 보여준 김이환 작가의 팬들이라면 적잖은 이질감을 느낄 법하다.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섬세하고도 냉정한 필치로 파고든 점에서는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을 연상시키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스토리 전개와 ‘검은 구’의 존재는 긴장과 함께 다양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장르적인 즐거움, 그리고 누구도 그다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우리를 짓누르는 그 덩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