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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두살 터울인 언니가 있었어요. 인물이 고운 언니는 이웃 고을의 큰 부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지요. 언니가 시집을 가 더이상 아가씨가 아니게 될 일을 서운해하던 혼례 전날, 저는 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산으로 꽃구경을 갔답니다. 그런데 언니가 그만, 호랑이처럼 커다란 괭이, 그러니까 산묘와 마주친 거예요. 놀란 언니는 실신했는데 정신이 들고도 어쩐지 멍해보였죠. 그런데 혼례날, 식 중에 언니가 없어진 거예요. 언니는 내게만 말해주었어요.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결국 혼담은 깨졌는데, 언니의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언니는 산묘와 눈싸움을 했던 그 장소에서 남자 음색과 여자 음색을 나누어 쓰며 노래를 부르고… 그래요, 실성한 거지요. 결국 언니는 굶어죽었고, 시신 주위에는 산묘의 털이 많이도 떨어져 있었답니다.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한 이 이야기는 에도시대 괴담을 모티브로 한 괴담집 <항설백물어>의 첫 번째 이야기다. 제목이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귀신보다 무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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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냐 우연이냐의 문제는 재능이냐 노력이냐의 문제만큼이나 자주 질문되지만 성공적으로 그 답이 제시된 적은 없다. 모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게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으로 보이는데, <뉴욕타임스>의 수석 미술 비평가로 일하는 마이클 키엘만은 그 절충점인 ‘우연이 운명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을 미술사 속에서 탐색한다. 미술은 미술이되 미술인지 헷갈리는 미술인 “참 쉽죠잉”의 밥 로스 이야기부터 발품을 팔아야만 감상할 수 있는 대지미술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예술가와 그들의 뒷이야기가 재미있게 실렸다.
특히나 현대미술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다른 읽을거리가 되어준다. 독특한 걸작들, 그러니까 ‘닥치는 대로 수집하다가 나온 걸작’은 신상 구두로 성이라도 쌓을 것 같아 보이는 서인영과 예술품 수집가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모나리자 앞에서만큼이나 이삿짐을 싸다가 발견한 다 해진 옛 사진(구도가 엉망이고 초점은 맞지도 않는)에
[도서] 어쩌다 보니 걸작이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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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논문의 주제가 되는 일은 많지만 논문이 소설로 인정받는 일은 흔치 않다.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이렇게 기적 같은 성공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커리드웬 도비의 <함정>은 원래 문예창작 석사 논문용으로 쓰였고, 2007년 출간되어 영미권 국가들에서 주목을 받았다. 독재정권이 쿠데타로 전복된다. 대통령과 그의 전속 화가, 이발사, 요리사가 포로로 억류된다. 그들과 관련된 여자들 역시 난폭한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각기 안간힘을 쓴다. 가까스로 정권이 자리를 잡아가던 때,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난다.
도비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쿳시는 “오만한 권력, 그 황홀한 얼굴 뒤에 숨겨진 욕망의 실타래를 파헤치는 한편의 우화”라고 <함정>을 추어올렸다. 도비는 권력이건 욕망이건, 순수해 보이던 희망이건, 성취한 순간부터 부패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인류학을 공부하고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저자의 뛰어난
[도서] 쿠데타,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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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으로라도 책장이 술술 읽힌다고는 못하겠다. 존 드릴로의 <리브라> 이야기다.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이야기와 의미를 파악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혼란은 멈추지 않는다. 의기소침한 독자를 다독이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이야기에 대해 이미 꽤 잘 알고 있다는 사실. <리브라>는 JFK 암살사건을 둘러싼 세상을 그린다. 미국 안팎 정보기관의 음모, 리 하비 오스왈드의 어려서부터의 삶을. 이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미국 대통령 암살), 어떻게 그런 결과로까지 이어졌는지 그 이유와 과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있기는 할까?).
소설가 존 드릴로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암살사건(범인이 잡혔지만 그가 진범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방대한 자료가 밑바탕이 되었지만, 그래서 몇몇 장면에서는 마치 기억 속 장면을 낡은 사진으로 재확인하는 기분마저 들지만, 이
[도서] 암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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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실리는 <씨네21> 714호에는 별책부록 <이 책에 마음을 놓다>가 따라붙는다. 간단히 설명하면 출판사 편집자들이 추천하는 신간 모듬인 셈인데, 별책을 만드는 동안 편집기자들이 먼저 낚여서 주말 동안 광화문에 나가 책을 샀다. 그중 특히 인기있었던 책이 바로 이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였다. 사진 촬영을 위해 책을 받았는데, 사진팀에서 사진을 찍고 디자인팀에서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을 내가 가져다본 뒤 디자인팀에 반납, 그 책을 이번엔 주말에 출근했던 교열팀 K선배가 보려고 책상에 가져다뒀는데 월요일에 나와보니 책이 사라졌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회사에서 자주 생기는 일인데, 책 행방을 수소문하다 보니 이거야 원. 다들 “나도 보려고 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것 아닌가.
잡담이 길었는데,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고스케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음산하고 괴이쩍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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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대한늬우스>를 보고 분노했던 이유는 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황당해서기도 하지만 너무 재미없어서기도 했다. 웃기는 사람들을 썰렁하게 만드는 기똥찬 발상! 그들과 정반대 지점에서 경제 공부를 유행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KBS 인터넷에서 경제 상식을 알리는 <최진기의 생존경제>의 강사 최진기, <십자군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등으로 (주로 중세) 유럽 역사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은 김태권이 바로 그들이다.
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은 부제 ‘신 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이 알려주듯 현대 경제학의 논쟁적인 이슈를 한자리에 불러모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시장원리나 경제논리는 오늘날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고 진지한 문제제기를 금한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비정규직 문제, 건강보험을 비롯한 공공부문 민영화 문제, 환경과 주거 문제 등 최근 일년 새 먼 정치판의 구호가 아니라 생활과 밀접한 문제가
[도서] 경제 상식 갖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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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이라는 사자성어가 말하듯, 같은 걸 본다고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이마 이치코의 <뷰티풀 월드>는 <찬란한 유산>을 보며 이승기와 배수빈이 주먹질할 때 그 둘 사이에서 뭔가를 느끼며 혼자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만화다. ‘썩은 여자’(BL에 열광하는 동인녀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살면서 만화를 그리는 이야기가 코믹하게 펼쳐진다. BL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전문용어(?) 안내도 자세한 편이라 ‘그쪽’을 잘 몰라도 읽기 편하다. (그림체로는) 초등학교 3학년 같은 얼굴이지만 사실 중년 여자인 작가 자신이 계속 뭔가에 흥분하는 이야기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리는 걸 보고 있으면 너무 웃겨서 정신이 이상해질 듯. 미국, 일본의 영화·드라마를 많이 보는 사람이라면 특히 즐길 만한 대목이 많다. <올드보이>에 대해 “유감스럽게 20년 이상 가둬두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듯…”이라고 천연덕스럽
[도서] 작가님, 얼굴 그만 붉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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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왜 나를 버렸을까?” 30년 이상 같은 질문을 해온 남자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펜을 들었다. <지미 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하 <지미 코리건>)은 저자 크리스 웨어의 자전적 경험이 모티브가 된 그래픽 노블이다. 주인공 지미 코리건은 평범하다 못해 볼품없는 30대 남자다. 소심한 그의 어깨는 둥글게 굽었으며 풀 죽은 눈빛은 어떤 시선과도 마주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라고는 양로원에서 매일 전화를 거는 어머니가 전부다. 그런 그에게 편지 한장이 도착한다.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자는 아버지의 초대다.
<지미 코리건>은 이미지의 사용과 상징이 풍부한, 참신한 시각언어로 완성된 성인용 성장담이다. 일견 팝아트 그림책이란 착각도 들지만, 페이지 한장 한장에 담긴 의미의 무게는 팝아트의 가벼움에 비할 게 아니다. 어두운 주제와 상상 속에서만 ‘가장 똑똑한 아이’가 되는 주인공의 현실도피적 성향은 서사의 흐름을 분절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도서] 아버지 왜 떠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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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올 히가시노 게이고 책이 있느냐고, 종종 질문을 받는다. 아무리 읽어도 어느새 인터넷 서점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 책이 나와 있다. 엄밀히 따지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워낙 한국에서도 인기가 좋아 그의 예전 작품까지 모두 소개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여튼, 또 나왔다. 그것도 네권이 한꺼번에. <졸업>으로 시작하는 ‘가가 형사 시리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가로 데뷔한 이듬해인 1986년 시작한 것으로, 지금까지 일곱권이 소개되었다. 현대문학에서 이번에 펴낸 것은 <졸업>을 시작으로 <잠자는 숲>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였다>. 시리즈 중 <악의>와 <붉은 손가락>은 기출간작.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가가 형사는 20여년 동안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성장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젊었고, 그의 주인공도 젊었다. <졸업>을 보면 딱 그렇다. 가가 형사
[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작가는 젊었고, 주인공도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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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들 말씀에 따르면 남자의 99%는 자위를 하고 1%는 거짓말을 한다… 고 한다. 그 자위에 필요한 동력으로 가장 사랑받는 건 실제 경험보다는 각종 영상, 그러니까 AV다. 성과 폭력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프리라이터 이노우에 세쓰코의 <15조원의 육체산업>은 일본 성인비디오를 다각도로 들여다본 르포타주다. 표본이 다소 작은 감은 있지만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AV에 관한 인식(본다면 얼마나 보는지, 얼굴 사정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등)을 살피고, 여성용 성인비디오 시장의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한다.
아동학대와 매춘 등의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는 도시전설처럼 떠도는 “AV 여배우 중 성폭행을 경험한 여성이 많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아쉽게도 직접 취재를 한 글은 없지만 AV 잡지에 실린 관련 내용의 여배우 인터뷰를 인용해 싣고 있다. 시부야 인근에서 스카우터가 일반 여성을 길거리 캐스팅하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2002
[도서] 그의 사정, 그녀들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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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인도에 간 겁니까?” 수없이 들었을 이 질문에, 작가 후지와라 신야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모든 것에 엉망진창으로 지기 위해서 갔던 게 아닐까.” 짐작했겠지만, <인도방랑>은 인도에 대한 친절한 가이드북이 아니다. 유려한 언어로 인도의 신비로움을 팔아먹으려는 책도 더더욱 아니다. 후지와라는 25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인도로 떠났고, 이후 천일 동안 인도를 방랑하면서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존재였고, 삶의 진정성이었다.
삼등열차의 무질서한 풍경과 사막의 모래폭풍, 화장터에 모여든 죽은 자와 산 자, 뜨거운 태양과 비쩍 마른 거리의 개들. 빈곤함과 풍요로움, 비루함과 고귀함의 경계를 넘어, <인도방랑>에는 날것 그대로의 인도로 가득하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은 빛보다 어두움에 더 가까우며, 글은 수다스럽기보다 겸허한 침묵에 가깝다. <인도방랑>은 많은 젊은이들을 인도로 떠나게 한
[도서] 패배할 각오로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