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겁없이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도대체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일까? <구멍>은 안성기라는 A급 배우를 기용한 것 이외에 사실상 상업적 고려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영화다. 또 김국형(36) 감독은 현실적 한계를 예상하고 작정이라도 한 듯, 주류 시스템에서 한발짝 물러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제멋대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지금처럼 하면 몇년 안에 폐인 될 것”이라는 주변의 걱정도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김국형 감독은 단호하다. “현실인식은 바뀔 수 있어도 가치관, 영화관은 변할 수 없다. 내 방식대로 해보고 싶다. 이런 영화 만들기가 내 몫이라면, 이대로 계속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구멍>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을 보인 이래 개봉 일정을 잡지 못해 난항을 거듭하다 지난 3월4일에야 가까스로 서울 4개관, 지방 6개관에서 단출하게 개봉했다. 결과는 ‘예상을 크게 빗나지 않아’ 관객 수를
게릴라 방식으로 만든 정통 문법의 영화 <구멍> 감독 김국형
-
세개의 코미디가 얽히면서 진행되는 <고>는 제목 그대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영화다. 어른들은 지켜 보기에도 숨이 가쁠 정도지만, <고>의 아이들은 세상을 무시한채 가볍게 그 속도를 타고 넘는다. 젊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삶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도 좋으며, 지난 일을 아쉬워하는 청승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시간을 뚫고 뻗쳐나가는 에너지가 있을 뿐이다. 이 혈기 왕성한 아이들, <고>의 감독 덕 라이먼의 말대로 “세트장을 젊음의 열기로 채운” 그 아이들 중에서도 케이티 홈스(21)는 유독 두드러진다. 천성처럼 품고 있는 편안함 탓이다. 가는 곳마다 사고에 부딪히는 사이먼(데스먼드 애스큐)이나 밀린 방세를 내지 않으면 내일 당장 거리에 나앉을 판인 친구 로나(사라 폴리)와 달리, 홈스가 연기하는 클레어에게는 어떤 절박한 문제도 없다. 로나가 단돈 몇십달러를 위해 연장근무까지 하는 슈퍼마켓 계산대. 그 앞에서 클레어는 나른한 눈길로 게이 커플을
케이티 고!고! <고>의 케이트 홈스
-
신혼여행이 누구에게나 달콤한 판타지인 건 아니다. 미처 말 못한 비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신혼여행은 자신들의 순도를 확인받기 위한 필사적 의식이다. 제주도로 떠나기 전 말 못할 사연은 반드시 뭍에 묻어두어야 한다는 철칙을 모를 만큼 <신혼여행>의 7쌍이 어리숙하진 않다. 첫날을 무사히 보낸 이들, 둘째날 밤 안도감에 취하지만 누군가 호텔 앞 바닷가에 어물쩍 비밀을 토해놓고, 새벽 밀물은 그 자리에 한 남자의 시체를 뱉어놓는다. 영락없이 살인용의자로 몰리는 신혼부부들의 ‘끔찍한’ 신혼여행을 ‘코믹 설탕’과 ‘스릴러 크림’으로 발라놓은 영화 <신혼여행>. 여기서 모든 사건의 비밀을 쥐고 있는 신비한 여인이 정선경이라면 믿어질까. <신혼여행>에서 정선경은 비로소 선머슴이나 뒷골목 여인의 거친 이미지를 벗고, 고요한 기품과 미스터리한 매력의 ‘귀족적’ 연기를 선사한다. “평범하지만 섬뜩한 사랑을 하는 여자예요. 집착도 사랑임을 보여주는 그런 인물이고. 저에
비밀에 싸인 허니문 레이디, <신혼여행>의 정선경
-
배우의 얼굴에서 그가 살아온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성폭행의 경험을 지워버린 마릴린 먼로는 순진무구한 백치미로 최고의 섹스심벌이 되었으며,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톰 크루즈는 성공한 여피의 초상으로 미국 젊은이들에게 꿈의 대변자가 되었다. 현실보다는 환상에 가까워야 하는 직업. 그러므로 배우의 얼굴은 시간이나 기억에 침범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조지 클루니(38)는 다르다. 나이보다 몇년을 앞서는 그의 얼굴에 팬 깊은 주름에는 삶의 고난이 묻어난다. 그 때문일까. TV시리즈 <ER>의 다정한 소아과 의사 로스 역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쓰리 킹즈>에 함께 출연한 배우 마크 월버그가 “내가 왜 그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너무나 잘생겼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이 미남배우는 영화 속에서 항상 고달픈 삶의 자취를 품고 다닌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에 좀더 가까운 사람이다.
<ER>에 처음 등장했던 94년, 클루니는 벌써 10
영화왕국 ‘그레이 킹’, <쓰리 킹즈>의 조지 클루니
-
-
고단한 삶을 새빨간 루주와 매니큐어로 가린 연화. 힘들어서 피신한 조그마한 레코드 가게에서 네명의 남자를 만난다. 끊어질 듯 위태로운 삶의 줄 위에 서 있기는 이들도 매한가지나 그들은 태연스레 기타의 줄감개를 매만지며 음을 고르고 있다. 도돌이표 따라 제자릴 맴도는 것 같아 연화는 더딘 보폭에 지루함을 느끼지만 ‘영화’가 끝나고 ‘산책’이 시작될 쯤이면 그들 곁에 나란히 선다. 그때까지는 혼자 좋아라 앞서기도, 뒤를 돌아보느라 처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잔잔히 흐르는 수면 위로 통통 튀어 오르는 물고기 같은 느낌이에요. 연화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들 중에서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죠.” 연화 역을 맡은 박진희가 자세히 소개하는 <산책>은 ‘보는’ 영화가 아니라 ‘듣는’ 영화다.
“혹시 제가 너무 오버하지 않았나요?” 영화를 미리 본 주위 사람들이라면 박진희에게서 한번쯤 시달렸을 만한 질문이다. “내면을 그냥 통째로 드러내선 안 되고 묻어나야 하는데 힘들더라구요.” 상스
“웃으면 밉상되는데”, <산책>의 박진희
-
94년 <쇼생크 탈출>로 미국 평단의 찬사와 아카데미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뤘던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41). <쇼생크 탈출>은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혔고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그를 단숨에 A급 감독 대열에 올려놨다. 하지만 성공한 감독의 다음 행보는 뜻밖에 오랜 침묵이었다. 작가 겸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다라본트는 제작부 조수, 세트담당, 배우 등을 두루 거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나이트메어3> <플라이2> <프랑켄슈타인> 등이 그의 각본이다. <쇼생크…> 이후 5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신작 <그린 마일>은 역시 킹의 소설이 원작. 선량하면서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흑인 사형수와 간수장의 관계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묻고 있다. 6천만달러의 <그린 마일>은 제작비 2배가 넘는 수익을 올리고 아카데미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두편의 영화가
<그린 마일>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
여배우에게 아름다움은 덫이 되기 쉽다. 배우를 지망하는 소녀에게 아름답다는 것보다 더 유용한 무기는 없겠지만, 그 쉬운 시작에 기대는 순간, 배우가 스크린 속에서 생명 없는 정물로 머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밀라 요보비치(24) 역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다. 녹색의 돌덩이처럼 차가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도록 투명한 눈동자, 동유럽의 혈통을 내비치는 강한 윤곽의 얼굴선 덕에 그녀는 “10대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톱모델이었다. 고작 11살의 나이에 패션잡지 <마드모아젤>의 표지를 장식하며 데뷔한 이후, 모델로서 요보비치의 경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표정없는 얼굴만으로도 이면에 도사린 어두운 관능의 그늘로 끌어들이는 요보비치는 한번도 깜찍한 요정이었던 적이 없기에 성인으로의 힘든 도약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그녀에게 나이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장애였다
셔릴린 펜의 여동생 중 한명이었고 <투 문 정션>으로 연기를 시작
청춘의 덫을 빠져나온 전사, <제5원소>의 밀라 요보비치
-
“안녕하세요.” 겅중거리는 다리와 샛노란 머리가 스튜디오 문을 씩씩하게 열어젖힌다. 껌을 씹으면서 쉴새없이 말을 건네고, 중간중간 섞어대는 “우헤헤헤”하는 웃음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간이세트 위에 털썩 앉자마자 시작한 촬영 내내 배두나는 그냥 그대로 껍죽대지만 돌돌한 명랑만화 주인공이다. 그러다가 연두색 원피스로 갈아입고선 입을 조금씩 우물거리며 물끄러미 카메라를 응시하기도 하고 금세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을 만들어선 타고 오르기도 한다. 이번에는 빈 연습실에서 혼자 남아 연습하는 팬터마임 배우가 된다. 모델로 시작한 배두나는 카메라가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그 앞에서 자유롭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씩씩하게 꽁지머리를 묶고 실종된 개를 찾아다니는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 평상시엔 축 늘어져 있다가도 한 군데 빠져들면 누가 끌어내도 뿌리치고서 몰두하는 점이 자신과 똑같다. “언젠가 저 아니면 못해낼 것 같은 역을 꼭 하고 싶다 말한 적 있죠. 그런데 현남이 너무 빨리 찾
달려라 두나! <플란다스의 개>의 배두나
-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탄 1996년작 <그림 속 나의 마을> 개봉에 맞춰 서울을 방문한 히가시 요이치 감독(東陽一·66)에게 한국 나들이는 이번이 네 번째다. 1993년 <NHK> 다큐멘터리 <한국의 서커스>를 위해 두 차례 취재 여행을 다녀갔고, 1998년 서울 국제독립영화제 손님으로 초대받은 것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교육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이름난 이와나미영화사를 거쳐 1969년 히가시프로덕션을 설립한 히가시 감독은 <써드>(78), <다리없는 강>(92) 등 일본사회의 저변을 훑는 사실주의적 영화들로 일본평단에서 가볍지 않은 믿음을 쌓아온 노장. 필름 위에 빛으로 그린 그림책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에서도 그의 투명하고 엄정한 시선은 그대로다.
지난 2월9일 회색 양복에 갈색 편물 넥타이를 맨 젊은 차림새로 <씨네21>을 방문한 히가시 감독은 활달한 손짓을 곁들여 자신의 영화와 인생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그림 속 나의 마을>의 히가시 요이치 감독
-
마더 테레사와 함께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보낸 일주일을 생애 최고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에서 느꼈던 초월적 영감을 잊지 못하고, 어쩌지 못할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치유하기 위해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서적와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을 읽는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26)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면 뜻밖일까? 그러나, ‘스페인의 최고스타’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후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스페인 배우’ ‘청순과 관능의 아우라를 함께 두른 여신’이라는 수사어보다 이 단편들이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러니까 이미지와 풍문의 미망에서 벗어났을 때라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페도르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여성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 나이에 비해 깊고 넓은 내면을 지녔기 때문일 게다.
원색의 나라, 스페인의 딸답게 크루즈는 <하몽하몽>(199
인형이 난 싫어,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페넬로페 크루즈
-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꼬질한 차림에 어수룩한 윤주가 뭘 생각하는지 정도는 말이다. 그런데 ‘추리닝’에 손 넣고 빈둥대는 윤주가 오늘은 심상찮다. 삐주룩한 머릴 빨간 조교 모자로 감추고 얼굴 반만한 크기의 뿔테 안경으로 변장하고 나선 것이다. 주위를 살피는 윤주. 곧바로 자신의 적 강아지를 싸고도는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재빨리 다가가선 냉큼 집어든다. 그러고는 주인이 뒤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비호처럼 옆 화단으로 몸을 날린다. 그러곤 성공을 외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아파트는 실험실로 변한다. 계속 반응하느라 헐떡대는 윤주는 이성재가 아끼는 또 하나의 분신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캐릭터예요. 때론 과장이나 극단적인 면도 갖고 있고. 떳떳하거나 마음 편한 위치에 당당히 서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살아가면서 다들 갈등하는 거죠. 순수와 타협의 갈림길에서 희화화한 윤주는 제 모습이기도 해요.”
원래 무겁고 신경질
"배우, 직업이자 취미이자 특기",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