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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짝은 매일 함께 16번 시내버스에 탔다. 이어폰 한쪽씩을 나눠 끼고 피노키오의 노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듣곤 했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날도 함께 등교하던 중이었다. 잠깐, 오늘 미술 시간 있는데, 스케치북을 놓고 왔어. 친구를 버스에 먼저 태워보내고 준비물을 챙겨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탔다. 하지만 매일 오가던 한강 다리는 더이상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수진은 그렇게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은 채 세상에 남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를 소재로 한 정윤철 감독의 단편 <기념촬영> 이야기다. 수진이 살아남은 건 스케치북을 깜빡했다는 이유뿐이었다. 올림픽을 치르느라 무리한 기간에 완공된 성수대교는 강남 팽창에 따른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더디고 오랜 조사 끝에 당국이 밝혔다. 처벌은 공사 실무자에게만 내려졌다. 그로부터 20년 뒤. 멈추지 않은 어른들의 탐욕은 진도 앞바다에서 30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2023년
[비평] 참사의 시간, 영화의 시간,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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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마이클 패스벤더)는 타깃(엔드리 휼즈)이 맞은편 건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며 명상적 독백을 쏟아낸다. 그중에는 청부살인을 수행하는 킬러 자신의 작업 계율도 있다. 그렇지만 첫 번째 챕터를 지나 여섯 번째 챕터에 이르기까지 그가 벌이게 될 싸움에는 보수가 따르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더 킬러>는 타깃 사살 임무에서 실패했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사살하는 킬러의 이동 경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끊임없이 되뇌는 계율은 진심이 아니거나, 언제든 위반할 수 있는 한낱 독백에 불과하다. 제거하라, 나의 실패를 알고 있는 자들을. 이것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킬러의 0순위 행동 강령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사를 하나둘 지워나간다. 그리고 최종 관문이자 실제로 보수를 지급하는 자인 클라이언트(알리스 하워드)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을 때 킬러는 클라이언트를 향해 겨눴던 총구를 내려버린다.기이한 양가성의 인물
짙게 드리운 히치콕의 그림자 아래에
[비평] 실패사를 지우는 이 자의 정체는, ‘더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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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처음 본 건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통해서였다. 때는 2022년 10월 초였고, 이번 극장 개봉을 맞이해 또 한번 영화를 보게 되었다. 관람 시기를 밝히는 이유는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처음 영화를 보고 떠올린 사건과, 이번에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떠올린 사건이 달라졌다. 두 사건 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참사였으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사회의 제대로 된 위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두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닐 수 있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너와 나>를 보며 이 영화가 소재로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10·29 이태원 참사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질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조심스레 해야만 하는 이 생각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떠올랐다. 죄책감을 가진 채
[비평]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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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찾지 마.” 삶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이냐, 묻는 재원(하성국)에게 홍의주 시인(기주봉)이 단호하게 말한다.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무언가의 표면을 바라보고 느끼고 틈을 내며, 온전히 존재하거나 존재감이 희박해질 때까지 밀어붙였던 방식은 홍상수의 세계를 따라온 관객에게도 체험되어온 양식 아닌가. 그래서일까. 재원이 술기운이 도는 채로 진지하게 삶과 사랑과 진리와 같이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물을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관객인 ‘우리’는 관성의 힘으로 웃었던 건 아닐까. 재원의 치기 어리고도 아름다운 질문에 언젠가 나도 되뇌었을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서도,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해져 웃는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신에서 웃지 않은 이들도 많았을 테고 더욱이 홍상수 감독이 유머를 구사하고자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웃음은 즉흥적이지만 때론 덩달아 웃는 경우도 있는지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관람한
[비평] ‘우리’라는 따뜻하고 연약한 말, ‘우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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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라짐으로부터 되돌아온다. 닫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스크린 위에 빛이 맺히고 이미지가 되살아날 때, 영화는 보이지 않던 과거를 나타나게 한다. 잃어버린 것, 금지되고 추방된 것, 기억에서 지워진 것들이 스크린이라는 투사의 장치를 매개로 돌아온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하는 경험에 속한다. 로베르 브레송이 영화를 ‘두개의 죽음과 세개의 탄생’을 거치는 매체라 말한 이유(“내 영화는 내가 기용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실제 사물들에 의해 부활했다가 필름 위에서 죽는다. 그러나 일정한 순서로 배치해서 스크린에 상영하면, 물에 담긴 꽃처럼 생기를 되찾는다”)와 장뤼크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에서 “영상은 언제나 부활의 시간에 도래한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탄생한 이미지는 부재의 시간을 통과해 죽음으로 던져진 뒤에 흰 스크린에서 비로소 부활한다.
부활한 이미지는 그러나 전과 다른 모습으로 귀환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
[비평] 죽음과 소생, ‘플라워 킬링 문’과 ‘당나귀 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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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거미집>에서 김열 감독(송강호)이 집착해 마지않았던 플랑 세캉스(시퀀스 숏)는 이충현 감독의 시작이었다. 데뷔작 단편 <몸 값>을 향한 찬사와 환호는 14분 분량의 러닝타임이 전부 플랑 세캉스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데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원조 교제 현장이 실은 장기 매매 장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끝나는 영화에서 플랑 세캉스가 주는 마법은 리얼리즘에 있다. 하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실시간의 리얼리즘, 다른 하나는 소품이나 배경, 인물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현장감의 리얼리즘, 또 관객이 범죄 서사를 허구가 아닌 현실로 수용하게 하는 내러티브의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몸 값>은 하나의 숏-시퀀스가 전체 작품 속 복수의 시퀀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독립한 ‘몽타주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곱씹을 만하다. 물론 ‘몽타주 없는 영화’라는 말은 하나의 시
[비평] 몽타주 없는 몽타주,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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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과 <거미집>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한국영화이자, 장르영화다. <화란>은 누아르이자 성장영화이고, <거미집>은 코미디이자 영화에 관한 영화다. 애석하게도 둘은 (다른 많은 개봉작이 그랬듯) 기대보다 낮은 관객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었다는 점 외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 영화는 편집에 관한 인식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통한다. <거미집>은 극 중 ‘플랑 세캉스’라는 편집 용어를 이례적으로 자주 언급한다. 김지운 감독은 이를 두고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나, <거미집>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떤 것도 중심의 자리에 놓을 수 없으므로 부차적 요소로 치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거미집>은 맥거핀을 모아 생성한 거대한 집과도 같기 때문이다. <화란>에는 시퀀스를 마무리하는 편집점이 너무 빠르거나 느슨한 순간이 있다. 어떤 시퀀스는 인물의 대사가
[비평] 지루함 혹은 지연에 관한 옹호와 의심, ‘거미집’과 ‘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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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이하 <보스톤>)은 역사적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거미집>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며,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은 웹툰을 각색했다. 추석 시즌에 개봉한 이 세편의 영화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스토리를 발굴하는 세 경향을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세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모두 합해도 300만명에 못 미친다(한주 늦게 개봉한 <30일>과 <크리에이터>를 합해도 400만명이 안된다). 그러니까 추석부터 이어진, 흥행에 꽤 유리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지 못했다. 추석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못 넘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이 흥행 스코어가 극장이나 한국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 작품이 지금 한국영화계의 어떤 변화를 미약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
[비평] 2023년 추석 시즌, 극장에서 떠올린 상념들, <1947 보스톤> <거미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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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꿈을 꾼 것 같다. 지난 4년간 다큐멘터리 13편을 취재·연출했다. 이들 중에는 세상에 내놓을 정도는 된다고 여기는 것도 있고 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 칸영화제 취재기처럼 한달 만에 급조한 것도 있고 오랜 기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인류의 위기를 걱정한 특집 다큐멘터리도 있다. 모두 초저예산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와 가차 없는 제작 기간 속에 낳은 자식 같은 아이들이다. 산고는 대개 화면엔 드러나지 않는다. 난관의 시작은 카메라 앞에 등장인물을 모시는 과정부터다.
주제에 맞는 인물을 찾더라도 대중 앞에 나서겠다는 이는 몹시 드물다.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분을 찾아내더라도, 제작 기간 내 서로 일정이 맞지 않기 일쑤다. 세상 모든 영상 제작자에게 코로나19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제약을 가져왔다. 무슨 수를 쓰든 그분을 만나야 해. 어떻게든 만나서 그 말 한마디를 받아야 한다. 가까스로 카메라 앞에 세웠는데, 전화로 나눴던 말씀을 촬영 중에는 왜 안 하
[비평] 다중몽(多重夢), ‘거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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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놀라운 걸작 <당나귀 EO>를 말하기에 앞서, 이 작품이 두번의 오마주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나귀 EO>가 각색한 <당나귀 발타자르>는 로베르 브레송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각색했다고 밝힌 영화다. 브레송은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이 당나귀에 관해 말한 짧은 대목을 읽고, 아예 미쉬킨을 당나귀로 치환한 새로운 서사를 착상했다. 하지만 <당나귀 발타자르>는 <백치>와 무연하다고 봐도 무방한 독자적 작품이다. 갑작스레 상속된 유산, 공원의 벤치 장면 등 원작을 연상하는 요소가 엿보이지만 그 정도 유사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장기인 시끌벅적한 난장판과 과장된 만화적 유머 감각 대신 평론가 폴린 케일을 질색하게 했던 지독한 엄숙주의가 있다. 우리는 <백치>를 각색했다는 브레송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서로 다른
[비평] 죄의식 대신 물질의 흐름에 집중한 시청각적 환상곡, '당나귀 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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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새 좀 봐요.” 새로운 요양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셔온 산드라(레아 세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말한다. 귀여운 새들이 새장 안에 있다. 이 대수롭지 않은 장면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철창 안에서만 날아다닐 수 있는 새들을 통해) 시종 이동하더라도 그 이동의 굴레 자체에 갇혀 있을 삶을 무심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내 보는 산드라의 일상에는 출구가 없다. 그녀는 지금 아버지의 병환, 딸아이의 성장, 뜨겁지만 위태로운 연애 사이에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어느 멋진 아침>의 태도는 부정한 세계가 반복된다는 진실을 비관하는 데 그치기보다, 그 안에서 불쑥 조우하는 기쁨과 슬픔의 디졸브를 기껍게 여기는 편이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처럼 모험을 경유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현실의 재인식에 교훈을 두는 서사는 이제 흔해졌다. 희비를 수용하는 일은 판타지로의 도피 없이, 반복되는 매일의 한가운데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어느 멋
[비평] 기쁨과 슬픔의 디졸브, ‘어느 멋진 아침’